1. 성서학의 이질적인 사고방식

나는 근래에 부쩍 성서학의 인기 없음을 느끼곤 한다. 물론 이것이 조사 기관의 통계도 아니고 일개 개인의 한정된 생활 범주 안에서 느끼는 주관적 판단이긴 하지만, 적어도 내게 성서학의 인기 없음은 피부에 와닿는 진실이다. 아마 그 이유는 성서학이 요구하는 사고방식이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도 이질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는 성서학의 사고방식을 접하면서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같은 반응을 보인다. 아마도 향유하고 수덕하기를 지향하는 교리적·신학적 사고방식의 틀에서 볼 때 성서학의 비평적·분석적 접근 방식은 너무나 '기술적'이어서 그럴 것이다. 다른 누군가는 성서학이 지나치게 변증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마도 비평하고 분석하는 데 익숙한 근대인의 종교사적 사고방식에서는, 고대 종교를 묘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비신화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향유하고 수덕하는 교리적 사고방식과 비평하고 분석하는 근대인의 종교사적 사고방식. 현대 기독교인들의 종교 인식론은 많은 경우 이 둘 중 하나에 속해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학문과 신학적인 물음이 서로 풀 수 없는 모순 상태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입증하는 데 관심"(9쪽)을 갖고 있다는 마르틴 헹엘의 말처럼, 현대 성서학은 이 둘 사이를 가로지르며 두 사고를 깊은 차원에서 모두 충족시키기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성서학의 사고방식은 이질적이다. 시대가 두 사고방식 중 어느 쪽으로 기울든 간에, 성서학의 사고방식은 모든 시대에 이질적일 것이다.

일례로 마르틴 헹엘은 아돌프 폰 하르낙이 내세운 '본디 더욱 실천적이고 혁명적이었던 예수의 복음을 바울의 헬레니즘이 사변적으로 오염시켰다'는 명제가 널리 자리 잡은 지금의 '비평적 사고의 시대'에 매우 이질적인 사고를 보여 준다. 그는 이 책 <하나님의 아들>(감은사)에서 자료를 꼼꼼하게 비평하면서도 신학적으로 일관된 고대 교회의 경향성을 예민하게 잡아내, 기독론 분야에서 상식과도 같은 하르낙의 주장을 반대한다.

<하나님의 아들 - 기독론의 발생과 유대교-헬레니즘 종교사>(제2판) / 마르틴 헹엘 지음 / 이영욱 옮김 / 감은사 펴냄 / 192쪽 / 2만 2000원
<하나님의 아들 - 기독론의 발생과 유대교-헬레니즘 종교사>(제2판) / 마르틴 헹엘 지음 / 이영욱 옮김 / 감은사 펴냄 / 192쪽 / 2만 2000원
2. '하나님의 아들', 헬레니즘의 오염을 극복할 돌파구

헹엘의 주장은 단적으로 말해, 신약성경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칭송하는 것은 단순했던 예수의 복음이 헬레니즘 철학과 종교에 의해 오염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약성경 곳곳에서, 특히 바울에 의해 제시되는 최초기 기독교의 고기독론은 헬레니즘적이기보다는 '유대적'이다.

헹엘 이전의 수많은 연구자들은 바울의 고기독론이 헬레니즘의 수많은 신화와 당대 철학·신학에 영향을 받은 결과물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앞서 언급한 하르낙은 "살아 있는 신앙이 신앙고백이 되었다"(22쪽)는 주장을 필두로, 본디 예수 전승이 간직하고 있었던 최초기 교회의 신앙은 훨씬 더 역동적이었으나, 바울이 헬레니즘을 통해 그것을 사변적 기독교 교리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맥락의 주장은 유대교 안에서도 제기됐다. 쉡스는 바울이 예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부여함으로써 명백한 "이교적 전제"(25쪽)를 갖고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천상의 존재"(24쪽)로 묘사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비판에 헹엘은 바울과 최초기 기독교의 고기독론에 헬레니즘화 내지 사변화·신화화라는 부정적 꼬리표를 달 수는 없다고 반박한다. 바울서신 내의 다른 신약성경과 병행하는, 바울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은 기독론 전승들을 미루어 봤을 때, 이러한 전승들에 근거한 바울의 고기독론은 다른 헬레니즘의 신화와 비교해도 매우 독특한 점을 갖고 있다. 헹엘에 의하면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선재하는 아들', '아들을 세상에 보냄', '창조와 구원의 중보자' 등의 의미들을 충족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렇다면 하르낙과 같은 종교사학파적 견해를 지닌 이들이나 쉡스와 같은 유대교 비판자들의 생각대로, 우리는 위와 같은 기독론적 의미들을 헬레니즘 문화 내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신의 아들'이라는 단어는 헬라 문화권 전반에서 발견할 수 있으니 분명 모종의 관계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헹엘은 기독론의 원형으로 의심받은 헬레니즘의 그 어떤 모티프도 바울과 최초기 기독교의 '하나님의 아들'과 같을 수 없다고 말한다.

기독교가 헬레니즘의 모티프를 수용하고 바울이 기독교를 헬라화했다고 주장하기에는, 헬레니즘의 모티프들이 바울과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과 중대한 부분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헹엘이 상세히 분석해 밝혀 낸 바, 오시리스와 같이 '죽고 살아나는 신'들은 결정적으로 '신의 아들'이 아니며(60~61쪽), 애초에 '휘오스 테우(신의 아들)'라는 표현이 호칭으로 사용되는 사례는 로마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단 하나밖에 없고(69쪽), 헬레니즘 전반에 나타나는 '신적 인간' 모티프에서 그들은 선재하지 않으며, 신에 의해 세상으로 보내지지도 않는다(72쪽).

심지어 기독교의 헬레니즘화에 가장 큰 혐의를 받는 '영지주의' 모티프조차 바울과 기독교의 '하나님의 아들'과 결정적인 일치를 보이지 않는다. 종교사적인 부분을 따져 봤을 때조차, 기존의 상식과는 순서상의 불일치를 보인다. 즉, 기독교의 발생에 영지주의가 영향을 주었다기보다 오히려 "영지주의의 발생을 촉구했던 것은 바로 초기 기독교였다."(77쪽)

마르틴 헹엘(Martin Hengel, 1926~2009).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공용
마르틴 헹엘(Martin Hengel, 1926~2009).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공용

헹엘은 이러한 반증을 통해, 바울과 초기 기독교의 고기독론적 선언인 '하나님의 아들'은 유대교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정적 일치를 보이지 않는 헬레니즘 문헌과는 다르게, 유대교의 수많은 문헌 속 '하나님의 아들' 모티프에서는 바울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포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정확하게 발견할 수 있다. '요셉의 기도'와 같은 유대교 외경에서는 모든 피조물에 앞서 선재하는 '하나님의 아들들' 중 하나가 인간의 모습을 취하여 이 땅에 내려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다(103쪽).

이러한 선재하는 영적 존재는 유대교 문헌 곳곳에서 등장하며, 심지어는 잠언 8장에 나타나는 '지혜'처럼 창조의 중보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벤 시라의 '집회서'에서 볼 수 있듯, 이 선재하는 하나님의 딸(108쪽)인 '지혜'는 하늘을 떠나 땅으로 내려온다(106쪽). 이 선재하는 중보자, 보냄받은 하나님의 아들은 각 전승 속에서 하나님과 비견되는 신적 존재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받아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구원의 중보자가 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헹엘의 비평적 분석 틀에서 돋보이는 것은, 그의 비평이 단지 종교사상의 역사적인 비평과 분석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종교적 전승들의 역사적인 연관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아들' 개념이 유대교 내에서 신학적으로 매우 일관성을 보인다는 것을 발견해 냈다.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수많은 자료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이른바 메시아, 신적 인간 그리고 하나님의 종말론적 중보자를 그려 낼 때, 한 분이신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다루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176쪽).

이러한 일관성은 살아 있는 예수의 사역과 그의 전승을 마주한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를 그들의 중보자 언어(하나님의 아들)로 해석하도록 했다. 말하자면 놀랍게도 예수를 경험한 유대 출신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테트라그람마톤(Tetramrammaton, 신명사문자·YHWH)' 혹은 그 문자의 독법으로 널리 인정됐던 '퀴리오스(kyrios)'를 예수에게 옮겨 사용하기를 거리끼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신학적 일관성은 예수를 단지 새로운 모세 혹은 하나님의 양아들 된 여타 위인들로 그려 내는 데 멈추지 않았다. 예수는 그 신학적인 함의 속에서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려 온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진 단 하나의 강력한 사랑의 계시로 이해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최초기 기독교의 모티프는 결코 헬레니즘의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나 인간 사이에 공존 하는 영지주의 반신半神과 같을 수 없다. 헹엘이 포착한 유대인들의 신학적 물음 안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를 단지 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에 도달한 인류 정도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는 예수는 헬레니즘의 사변적·신화적 오염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유대적 사고방식을 사변적·신화적 오염에서 벗어나게 해 줄 돌파구다.

3. 이질적인, 하지만 보다 깊은 차원의 기독교 이해

기독교의 교리들을 하르낙적 상식하에 비평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상식으로 자리잡은 시대에, 헹엘은 <하나님의 아들>에서 시대정신의 요구대로 신약성경 기독론에 관한 다양한 자료를 상세히 비평하면서도, 매우 독특하고 이질적인 분석을 내놓는다. 그는 하르낙처럼 단지 헬레니즘의 유사한 병행 모티프나 구절들을 신약성경의 자료들과 연관시켜 '이러한 부분이 일부 비슷하니 상호간에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 않는다.

현대의 많은 성경 주석가들은 종종 접근하기에 편리한 사고방식을 취하곤 한다. 그런 이들에게 종교사에 대한 헹엘의 접근은 '지나치게 변증적'이라는 생각과 함께 거부감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학적인 것과 비평적인 것 둘 중 하나만을 생각하는 것이 편리할지는 몰라도, 기독교 교리의 본질을 파악하기에 좋은 접근법은 아니다. 헹엘의 말대로 "신약 기독론의 신학적 경향과 그 내적 일관성을 파악하지 못할 경우 역사가는 신약 기독론의 본질을 오해하게 되고, 최초기 기독교의 수십 년간의 기독론의 역사적 과정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교리적 접근은 고작 추상적인 사변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9~10쪽)다.

마르틴 헹엘은 기독교를 보다 깊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사고방식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나는 부디 이 초대가 사람들에게 매력적이길 바란다. 만약에 여전히 현대적인 기독교인의 사고방식 어디쯤 머물고 있는 내 인식이 그의 이 독특한 논조를 재구성하고 전달하는 데 방해가 됐다면, 부디 그의 책 <하나님의 아들>을 직접 읽어 보기를 권한다. 단순하고 편리한 일방적 측면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이질적이고도 짜릿한, 성서학이 기독교를 분석하고 또 향유하는 방식이 분명 맘에 들 것이다.

권우진 / 틈을 내는 사유의 실천, '짓;다' 에디터. 학부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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