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톰 라이트와의 만남

내가 N. T. 라이트(톰 라이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군대를 막 전역했던 2014년 무렵이었다. 톰 라이트는 당시 미국 침례교 목사 존 파이퍼와 칭의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내가 수학했던 신학교 교수님들이 그의 바울 해석, 특히 칭의론에 대해 우려를 표하거나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던 터였다. 이렇듯 신학교 내에서 뜨거운 감자였던 톰 라이트는 성서학에 호기심이 많던 한 신학생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때 나는 어떠한 정보도 없었기에, 교수님들과 친구들에게 톰 라이트를 이해하기 위해 어떤 책을 읽어야 좋을지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많은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크리스챤다이제스트(현 CH북스)에서 출간된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의 문제(Christian Origins and the Question of God)' 시리즈를 권했다. 분량을 보니 정말 어마어마했다. 나만 느낀 바가 아니었던 듯, 톰 라이트는 <바울을 논하다>(감은사) 서문에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의 문제'중 한 권인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PFG>의 분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서평자들은 PFG의 분량이 바울서신 전체보다 25배나 더 길며(아마도 성경 전체보다 더 길 것이다), 미국 세법에 맞먹는다고 보았다. (중략) 거의 모든 서평자가 책 분량이 더 적은 게 나았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11쪽)

N. T. 라이트(1948~). N. T. Wright Online 홈페이지 갈무리.
N. T. 라이트(1948~). N. T. Wright Online 홈페이지 갈무리.

나도 현재 세법을 공부하고 있는 터라, 재미삼아 한국 <세법전>의 분량과도 비교해 봤다. 한국의 2023년 개정판 <세법전>은 대략 3700여 쪽인데,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의 문제' 시리즈는 번역본 기준 총 합계가 5400여 쪽에 달했다. 물론 한국 세법전이 글씨 크기가 더 작기는 하지만, 톰 라이트의 저작은 그와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는 분량이었다.

이 막대한 분량의 시리즈 중 가장 중요하다고 평가받는 책은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The New Testament and the People of God·NTPG>이다. <NTPG>에는 신약 해석의 선행 연구와 더불어 예수와 바울을 해석하는 데 사용된 톰 라이트의 학문적 방법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NTPG>에서 제시하는 '비판적 실재론'과 세계관 비평을 통한 성서 해석 방법론은 톰 라이트의 예수에 관한 해석과 바울에 관한 해석의 골조를 이룬다. 따라서 <NTPG>에 대한 고민과 이해가 없이는, 그의 저서를 읽어도 읽은 것이라 말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책의 난이도도 높을 뿐더러 방법론에 대한 부분만 있음에도 무려 800쪽이 넘는 분량이라서, 철학·신학에 대한 기본기와 인내심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학술서가 분량이 많고 어려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톰 라이트의 관점이 주는 유익을 많은 이와 공유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런 어려움을 이해하기라도 한 듯, 신간 <바울을 논하다>(감은사)는 200쪽이라는 짧은 분량과 더불어 마치 옆집 아저씨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편하게 읽히는 책이다. 매끄러운 번역을 위한 최현만 선생님의 고심과 노력의 흔적이 많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단지 짧고 가독성이 좋다는 것, 그것만이 이 책의 장점일까? 그렇지 않다. <바울을 논하다>는 표면적으로는 <PFG>의 논의만을 담아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의 문제' 시리즈 전체를 망라하는 내용을 매우 압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바울을 논하다 - 사도 바울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주제들> / N. T. 라이트 지음 / 최현만 옮김 / 감은사 펴냄 / 209쪽 / 1만 6800원
<바울을 논하다 - 사도 바울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주제들> / N. T. 라이트 지음 / 최현만 옮김 / 감은사 펴냄 / 209쪽 / 1만 6800원
1. 양자택일? 'OR'의 미학

<바울을 논하다>를 읽기 전 목차를 보며 흥미로웠던 점은, 대부분의 챕터가 'A 대 B' 구도로 구성돼 있다는 것이었다. 이 '대'라는 표현의 원문을 찾아보니, 최현만 선생님께서 'OR'를 '대'로 번역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OR 구도의 목차는 꽤나 많은 부분을 시사한다.

우리가 양자택일의 문제라 생각하는 부분 중 사실 알고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바울을 논하다>를 읽다 보면, 톰 라이트가 분명하게 OR의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그 중간 어딘가 혹은 보다 설득력 있는 제3의 길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톰 라이트가 OR 구도의 목차를 통해 독자를 일방적으로 설득하려 한다기 보다는, 그가 마련한 토론장으로 초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지막 장에서 그는 자신의 학문 방법론을 설명하면서, 본문'만' 읽는 것에 그치는 주해가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우리가 재구성한 바가 본문의 증거와 부합하는지 검토하는 작업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100% 실재에 도달했다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증거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토론을 통해 그 중심에 보다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비판적 실재론'에 근거한 그의 학문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 준다.

<바울을 논하다> 각 챕터의 구도를 살펴보면서, 무조건적인 비판이 아니라 톰 라이트가 어떤 입장을 견지하는지, 나는 해당 주제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민하며 읽는 것이, 이 책의 저술 의도에 부합하는 독서라고 생각한다.

2. 바울, 그는 누구인가

톰 라이트를 위시한 '바울에 관한 새 관점' 학파가 신약학에 가장 크게 기여한 부분은, 기존의 바울 해석이 견지해 온 바울과 유대교의 무조건적 대립을 재고하도록 촉구하고, 바울이라는 인물을 다시 면밀하게 살피도록 했다는 점이다. <바울을 논하다>에서 톰 라이트는 바울이 지닌 '유대인' 정체성을 강조한다.

유대인으로서 바울의 정체성과 메시아에 관한 해석, 기독론과 교회론은 긴밀하게 연관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 톰 라이트가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다. 톰 라이트는 예언서와 제2성전기 문헌들에 기반해 1세기 유대교인들의 세계관을 재구성한다(이것이 서론에서 언급한 <NTPG>의 핵심 작업 중 하나다).

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 내부에 있는 사도 바울 조각상. 뉴스앤조이 여운송
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 내부에 있는 사도 바울 조각상. 뉴스앤조이 여운송

그들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두 축은 '유배(exile)'와 '출애굽'에 관한 이야기다. 이스라엘의 악함으로 유대인들은 여전히 이방인들(바벨론-그리스-로마)의 지배에 놓인 (유배) 상태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그 옛날 출애굽 사건처럼 유배 생활을 종결시키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바울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지점부터 출발해야 하며, 예수에 관한 해석 역시 이런 유대교 세계관의 급진적인 재해석, 즉 메시아를 통한 '구원의 우주적 확장과 새 창조'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매우 간략한 요약이지만, 톰 라이트는 200쪽짜리 얇은 책 안에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근거 본문을 함께 제시한다. 해당 본문들을 쫓아가면서 톰 라이트가 재구성한 유대인들과 바울의 세계관에 대해 비판적으로 읽는다면 보다 풍성한 독서가 될 것이다.

3. '칭의 논쟁'과 교리 재판

요즘은 조금 시들해졌지만, 톰 라이트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많은 분이 여전히 그의 바울 해석, 특히 '칭의론'을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톰 라이트의 저서들을 보면 (이 책도 마찬가지다) 그의 바울 해석에서 '칭의'가 차지하는 부분은 그가 주장하는 거대한 담론에서 매우 적은 분량이다. 톰 라이트는 바울이 '메시아를 통한 구원의 우주적 확장', 즉 이사야서에 언급된 '이방인 선교'에 대한 사명의 회복을 주장하는 것이라면서, 바울이 왜 로마서·갈라디아서에서 '칭의'를 논하는지 설명한다. 여기서 칭의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믿고 고백하는 이방인들이 이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처럼'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는 '언약의 백성'이 됐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톰 라이트의 칭의에 관한 해석만을 떼어 '이중 칭의론', '행위 구원론'이라며 교리적 잣대로 비판하는 것은, 이 주제가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거대한 서사 중 한 부분일 뿐이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독이 아닐까 생각한다. '칭의 논쟁'에 매여 교리 재판을 하기보다 그가 이 주제를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고민해 본다면, 보다 건설적인 비판과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바울을 논하다>는 그런 측면에서 톰 라이트의 거대한 서사를 압축적으로 제시하면서, 그 안에서 칭의가 지닌 의미를 잘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평소 톰 라이트의 '칭의'에 의구심을 가졌던 분들께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나가며: '교회를 위한 신학'으로서 톰 라이트 읽기

톰 라이트의 주장에 동의하느냐와 별개로, 그가 뛰어난 신학자이자 목회자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의 저술들을 보면 학문적이면서도 동시에 철저히 선교적이고 목회적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요즘 교회에서 제시되는 주요한 화두 중 하나는 '환대'다. 톰 라이트 신학의 맥락에서 본다면, 교회 안에 서로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갖고 있는 이들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언약 백성이다. <바울을 논하다> 첫 장에서 톰 라이트가 말하듯, 새로운 언약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는 '메시아의 마음을 품는 공동체'여야 한다.

"본래 상태로는 도저히 친구나 동료가 될 수 없는 타인들과 함께 이 새 창조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질적인 구성원들의 모임인 그 공동체에 겸손과 융화를, 무엇보다도 바울이 핵심으로 삼았던 미덕인 아가페(agape), '사랑'을 요구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의 마음을 가진다'는 표현으로 바울이 의도했던 핵심에 근접한 의미다." (26쪽)

"이것이 바로 '메시아의 마음'을 가지려고 애쓴다는 것, 새 창조에 적합한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한다는 의미다." (39쪽)

메시아의 마음을 품는 것은 지속적인 '수행'이며, 이와 같은 가치관을 함께 공유한다면 '환대'가 화두인 요즘 교회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바울을 논하다>는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신자들과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접근성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톰 라이트의 바울 해석을 신자들과 공유하면서 함께 선교와 교회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해 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이 책은 5700여 쪽에 달하는 시리즈 전체 내용을 200쪽이라는 비교적 짧은 분량에 담아내면서도, 바울을 설명하기 위해 독자들이 알아야 할 <NTPG>의 내용 역시 매우 간단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이해하기 어렵다거나 설명이 부족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 <바울을 논하다>에서 다룬 주제들에 관해 부족함을 느끼거나 더 깊은 공부를 원한다면, 이 책을 교두보 삼아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의 문제' 시리즈에 직접 도전해 보는 것도 좋은 심화가 되리라 생각한다.

좋은 책을 써 주신 톰 라이트와 이 책을 출판해 주신 감은사, 번역해 주신 최현만 선생님께 감사를 드리며, 그들의 귀한 사역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서평을 마친다.

김태영 / 신학교 졸업 후 세법을 공부하고 있는 고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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