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은 교회음악·예배학 전공자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가 교회력 '공동 성서 정과(RCL)'에 맞춰 신자들의 묵상과 영성 생활을 돕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연재는 매주 금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2023년 7월 2일, 성령강림 후 다섯째 주일 공동 성서 정과 본문(클릭)
시편 13 / 창세기 22:1-14 / 로마서 6:12-23 / 마태복음 10:40-42

 

떠나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대상과 나는 분리되고 간격은 벌어지니, 누려 왔던 관계는 시간의 뒤로 숨고 그 자리에는 부재가 남습니다. 전에 있던 것이 없어지니 거기에는 패인 구덩이가 보입니다. 아브라함의 굴곡진 인생은 떠남으로 점철된 삶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에 깊게 패인 구덩이는, 아브라함이 아브람이었던 시절,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집니다.(창 12:1) 여호와의 언약은 무언가로부터 떠나오면서 시작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아브라함은 함께 여정을 나섰던 조카 롯과 그의 식구들도 떠나보내지요.(창 13) 롯은 아브라함에게 마치 아들과도 같은 존재였을지 모릅니다. 자녀가 없는 아브라함이 롯을 떠나 보낸 후에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떠나보냅니다. 새벽의 기운이 가시기 전에 가죽 부대를 하갈의 어깨에 지워 주며 아브라함은 눈물의 모자와 결별합니다.(창 21) 그리고 결국은 그의 아들 이삭을 떠나보낼 시간에 놓이게 되죠. 과거 자신의 전부였던 하란에서의 삶으로부터 떠난 그는, 자신의 이름도 떠나보내고, 미래의 전부인 이삭마저 떠나보내야 합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2)

하나님이 보여 줬던 언약의 표징인 밤하늘 가득한 뭇별이 빛을 잃고 부서집니다. 성서 기록은 아브라함의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지만, 아들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묵묵히 모리아 산으로 향하는 아비의 가슴속 구덩이는 걸으면 걸을수록 커져 갔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지요.

3일 밤낮을 쉬지 않고 결연하게 걷는 그의 모습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지 말아 달라고 여호와 앞에 섰던 아브라함과는 분명 다른 존재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자신의 일부였던 소중한 것들을 반복해서 잃은 시간들은 아브라함을 무언가 다르게 만든 것 같습니다. 떠나보낼수록 그에게 또렷이 보였던 것은 상실의 자리였을까요, 아니면 거기에 계신 여호와였을까요?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 '아브라함에 의해 희생당한 이삭'.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 '아브라함에 의해 희생당한 이삭'.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자취와 여운 살피기

상실의 자리에는 무언가가 남기 마련이고, 그 자취는 잃은 것이 남긴 심연의 깊이입니다. 결별에 익숙했던 아브라함은 누구보다 후에 남겨진 자취와 여운에도 익숙했을 것입니다. 그에 대한 고백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라는 대목으로 알 수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것을 떠나보낸 뒤에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여호와의 인도하심이었고, 아브라함은 그것을 수차례 경험한 목격자였던 셈입니다.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는 아브라함은 부재 이면에 있는 텅 빈 곳을 바라볼 수 있었죠. 그런 그의 삶을 '비타 콘템플라티바(Vita contemplativa)' 즉 '사색하는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멈춰 서서 돌이켜 자취와 여운을 살피는 아브라함은 어느새 '여호와 이레(준비하시는 하나님, 보시는 하나님)'을 닮아 있지 않은가요?

우리가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이 코랄(Choral·회중 찬송)은 바흐의 오르간 소책자(Das Orgelbüchlein) 46곡 중 한 곡입니다. 이미 존재했던 코랄 선율과 가사를 바흐가 편곡했지요. 침착하고 고르게 움직이는 왼손의 음형과는 비교되게, 오른손의 음형은 꾸밈음과 32분음표가 장식적으로 흘러갑니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도움이 없음을 확인하는 듯한 두리번거림이 느껴지는 주선율은 멈춤없이 어디론가 움직입니다. 주선율을 따라 왼손의 기도가 합류하고, 곧이어 등장하는 베이스의 소리는 오히려 하행하며 보다 더 낮은 곳의 심연을 향해 이동합니다.

낮은 음역의 페달의 급격한 옥타브 도약(3마디 이후)은 밤과 낮, 시작과 끝도 없는 근심의 소용돌이를 보여 주는 듯하지요. 마침내 종지(Cadence)를 앞두고는, 신실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듯 가장 높은 음을 향하다가 다시 으뜸음으로 안전히 회귀합니다.

우리가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을 때
다른 곳에는 도움이 없음을 우리는 아네
밤과 낮 근심이 가득할 때
아무 도움이나 위로가 없을 때
그때 우리의 위로는 오직 이것이네
우리가 당신의 보좌 앞에서 만날 수 있도록
부르짖으며, 신실하신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비참한 고통으로부터 구하소서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우리가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을 때 Wenn wir in hochsten Noten sein(BWV641)'

바흐가 20대에 작곡한 이 코랄은 그가 임종하는 마지막 순간에 새롭게 재편곡됩니다. 심각한 뇌졸증을 회복하지 못하고 실명한 바흐는, 그의 사위였던 요한 크리스토프 알트니콜에게 곡을 구술하고 받아 적게 하지요. 그렇게 바흐의 마지막 곡 '저는 이제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는 침상에서 작곡됩니다.

당신의 보좌 앞에 나 이렇게 나아가
오 하나님, 겸손하게 비오니
당신의 자비로운 얼굴을 돌리지 마옵소서
창백한 얼굴을 한 죄인인 나에게서 말입니다
내게 축복의 끝맺음을 허락하소서
마지막 날에 나를 깨우실, 주님이시여!
그건 내가 당신을 영원히 볼 수 있다는 것
아멘 아멘 내게 귀 기울여 주소서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저는 이제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Vor deinen Thron tret' ich hiermit(BWV668)'

앞서 '극심한 고난'의 순간을 화려한 장식음과 급격한 도약으로 작곡했던 바흐는, 생의 끝자락에서 모든 장식음을 다 떠나보내고 이탈시킨 채로 마지막 곡을 작곡합니다. 오로지 정선율의 최소한의 것만을 남겨 두고 그것을 도치시키거나 음의 간격을 벌여 늦게 출발시키면서 말이지요.

뼈대만 남은 것 같은 앙상한 선율은 오히려 장엄한 기도가 됩니다. 바흐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20명의 자녀 중 10명을 잃는 슬픔을 겪으며 '떠나보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죽음을 향해 가는 바흐는 그간의 찬란하고 눈부셨던 수많은 곡을 뒤로하고, 존재하는 것의 원형만을 포착해 내듯 자신의 마지막 기도를 겸손히 읊조려 나갔습니다.

오늘의 경건한 청음은 위에서 말한 바흐의 두 곡입니다. 아브라함의 떠나보내는 삶을 반영하는 듯한 바흐의 '우리가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을 때 Wenn wir in hochsten Noten sein(BWV641)'와 상실과 떠나보냄 후 자취와 여운의 자리에서 마주한 하나님을 바라보는 곡 '저는 이제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Vor deinen Thron tret' ich hiermit(BWV668)'입니다.

오르가니스트 볼프강 체어러의 2007년 녹음으로 첫 번째 곡 '우리가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을 때'를 감상하시고, 두 번째 곡은 원래 오르간 곡이지만 현악사중주와 여성합창으로 편곡된 버전으로 들어 보시겠습니다. 덴마크 스트링 콰르텟과 덴마크 국립소녀합창단이 부르는 '저는 이제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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