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돈, 큰 아파트, 큰 차, 비교 의식, 체면, 끝없는 경제성장과 신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공부를 잘해야 하는 것도 결국엔 돈을 많이 벌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8~9쪽)

평소 '기후 위기'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후배와 저녁 식사를 함께했습니다. 즐거운 대화 중 저도 모르게 그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근데 아무개야, 우리가 진짜 기후 위기를 막을 수 있을까? 현 상황을 담은 자료들을 보면 너무 절망적이지 않니?" 질문을 던지는 즉시 '아차' 했습니다. 혹시라도 밥맛 뚝 떨어지는 소리로 들리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후배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름다운 대답을 들려줬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이 문제를 포기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원래 알았지만, 역시 멋진 후배라는 걸 새삼 느낀 행복한 저녁 시간이었습니다.

기후 위기를 막을 수 있든 없든, 끝내 '제자의 길'에 우직하게 서 있으려는 주님의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을 만났습니다. <지구 정원사 예수 -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그리스도인>(신앙과지성사)입니다.

<지구 정원사 예수 -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그리스도인> / 데니스 오하라 외 지음 / 신앙과지성사 펴냄 / 256쪽 / 1만 5000원
<지구 정원사 예수 -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그리스도인> / 데니스 오하라 외 지음 / 신앙과지성사 펴냄 / 256쪽 / 1만 5000원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지 않는다면, 우리와 직접 상관없는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우리와 우리 아이들이 기후 위험에 빠지게 된다." (44쪽)

이 책은 기후 위기에 관한 '모음집'입니다. 읽기 다소 어려운 글과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 한데 어우러져 있습니다. 순서대로 읽지 않으셔도 된다는 뜻입니다. 평소 독서에 어려움이나 부담을 느끼는 분들을 위해 생각을 나누자면, 우선 '프롤로그'로 워밍업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아, 나는 도대체 그동안 예수를 어떻게 믿어 왔던 거지' 하는 참회의 시간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이어서 2번째 장인 '담대한 전환'을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전문가의 글이지만,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에 대해 저와 같은 일반인이 큰 틀에서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입니다. 그다음에는 마지막 장인 '기후 위기에 응답하는 그리스도인'으로 훌쩍 건너뛰셔도 무방합니다. "지구의 운명은 그리스도교에 달려 있다"(223쪽)는 비장한 문장이 적혀 있다는 걸 미리 알려 드리니, 부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으십시오.

"이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형상에 따라 창조하시고 아울러 다른 피조물, 특히 자연을 잘 관리하고 다스리게 하는 사명을 주신다." (107쪽)

'기후'가 '위기'를 맞았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이 '성경' 혹은 '신앙'과 무슨 상관인지 의문을 갖는 분들은 7번째 장인 '정원의 꿈'을 읽어 보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이 주제에 관해 공부하고 설교할 때마다 "교회에서 왜 환경 이야기를 하느냐"며 불편해하던 신자들을 만난 기억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분들의 평소 인격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따뜻하고 좋은 분들이었지요. 그런데 그런 분들조차도 성경이 "생태학적 의미를 갖는"(120쪽) 책일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하고 계시더군요. 그분들을 그렇게 만든 설교자들에게 주님의 심판이 있지는 않을까 두려울 뿐입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저와 같은 감리교인이 계신다면 꼭 기억해 주십시오.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장정'에 실린 '감리회 사회신경'을 보면, 첫 번째로 등장하는 항이 '하나님의 창조와 생태계의 보존'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 환경문제를 놓고 씨름하는 목회자들을 '사상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으로 보지 말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인류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상호 연결된 통합적인 생태계, 하나의 성스러운 공동체와 이야기의 일부이다. 관계성은 참으로 우주 생성의 그 시초부터 내재해 있었다." (38쪽)

기왕 이 책을 입수하신 분들은, 첫 번째 장인 '지구의 꿈을 살기'도 꼭 읽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평소 독서를 즐기지 않으셨던 분들에게는 다소 어려울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과학' 이야기가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최대한 이해해 보려고 애써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글입니다. '인간은 우주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라는 세계관 속에 살아가고 있을 뭇 기독교인들의 생각에 균열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이 하찮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은 "상호의존적인 우주의 복잡성"(24쪽)에서 자유롭지 않은 존재입니다. 가령 "식물들과 곤충들, 심지어 태양계들"(21쪽)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은 겸허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러나 참 아쉽게도, 기독교 신앙의 기저에는 "인간중심주의와 이원론적이며 기계적 세계관"(213쪽)이 흐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기후 위기'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를 우주의 중심에 놓고 나머지를 주변화해 온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은, 결국 우리가 서 있는 땅을 스스로 허물어 버린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북극곰의 멸종 현상을 보며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인간들, 특별히 우리 개신교인들은 "우리의 몸은 우리가 거주하는 환경과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고 환경과의 지속적인 대화 가운데 있다"(40쪽)는 진실을 이제라도 직시해야 합니다. 참 많이 늦었지만 말입니다.

"정원 지구의 위대한 꿈은 하나님의 꿈이다. 그 꿈을 따라 걸었던 지구 정원사 예수를 따라 걷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란다." (16쪽)

'지구 정원사 예수'라니, 한가하게 정원이나 돌보는 예수라니, 참 낯선 말입니다. "당당하고 위대하고 부요하신"(224쪽) 분일 것만 같은 기존의 수식어들과 결이 많이 달라 보입니다. "욕망의 극대화를 발전이라 칭하는 신화"(215쪽)에 그 이름을 동원하려는 이들에게는 참 불편한 표현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예수는 누구십니까? 그가 어려서 배운 전부는 "웅대한 이 자연"(225쪽)이었을 뿐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예수의 이름이 "자기 극대화라는 우상의 신전"(215쪽)에 수시로, 그리고 함부로 동원되기 일쑤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언젠가 남아공의 신학자 앨벗 놀런이 말한 것처럼, 우리 주님의 존귀하신 이름이 "결국 아무 뜻도 없는 이름"[<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분도출판사), 11쪽]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예수의 눈빛으로 북극곰과 펭귄을 보라. 그리고 사랑하라." (226쪽)

이 책을 놓고 며칠째 씨름하던 아침, 유치원에 가려고 신발을 신는 아들이 대뜸 물었습니다. "아빠, 오늘 미세 먼지 '나쁨'이던데?" 식탁 위에 켜져 있던 제 휴대폰을 봤던 모양입니다. 7살 어린이의 입에서 나온 것 같지 않은 어른스러운 단어들의 조합을 듣고, 저는 속상한 마음을 꾹 삼켰습니다. 그리고 표정 관리를 하려 애썼습니다.

다른 내용의 문장이었다면, "아이고, 우리 아들은 왜 이렇게 말도 잘해~" 하면서 '궁디팡팡'을 해 줬을 텐데, '미세 먼지'를 운운하는 마당에 차마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아들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이를 악물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들아, 너무 미안하지만 아빠가 세상을 구할 수는 없단다. 너의 의사도 묻지 않고 이 위태로운 지구로 불러낸 것이 때론 후회가 되기도 한단다. 하지만 적어도 이 현실과 전혀 상관없는 뜬구름을 잡는 목사로 살지는 않을게. 그것이 아빠로서는 너를 향한 최선이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표현이란다. 너의 가여운 인생을 우리 주님께 맡긴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글이 담긴 이 책의 출간이 고맙습니다. "왜 교회에서 기후 위기를 논합니까? 영적인 얘기를 하셔야죠!"라고 말하는 신자들 틈에서 '예수 믿는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늘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이 책은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낼 만한 책으로 보입니다.

이현우 / 자유인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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