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를 시작한 여자들,
그들은 먼저 자신이 누군지 알아야 했다

지난 직장을 퇴사할 때 하나의 정리된 '퇴사 이유서'를 쓰고 떠나고 싶었다. 실제로 쓴 건 실무자의 근무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과 권력자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몇 가지 고발이 전부였지만. 퇴사 이유서를 정리하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다음 일을 시작했지만, 내가 퇴사 이유서에 쓰고 싶었던 내용은 여전히 내 안에 선명하다. 가부장적 권력이 조직 내에서 어떤 문제로 드러나고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분명한 '젠더' 문제인지.

그런 때 <위민 토킹>(은행나무)을 읽어서일까. 외딴 메노파 신자 공동체 '몰로치나'의 여성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기, 남아서 싸우기, 떠나기'라는 선택지로 토론할 때, 이 고민이 바로 지난 몇 개월간 내가 씨름했던 주제와 정확히 똑같아 독서 도중 종종 생각에 잠겼다. 비록 이 소설의 토대가 되는 실제 사건, 2005~2009년 볼리비아의 메노파 신자 공동체에서 300명 넘는 여자들이 의식을 잃고 자기 침대에서 강간당한 일처럼 엄중한 이슈는 아니더라도, 나는(여성은) 공동체/조직에서 이 세 가지 선택지 앞에 서야만 하는 때가 꼭 오고야 마는 것이다.

사실 이 선택지를 두고 가장 처음 진지하게 고민했던 곳은 어릴 때부터 다니던 '교회'였다. 가부장주의만 했어도 그럭저럭 견뎌 냈을지 모르겠으나, 희미하게나마 극우 정치의 냄새를 풍겼을 때 내 선택지는 두 개로 줄어들었다. 싸우거나, 떠나거나. 티센의 건초 다락에 모여 회의를 시작한 몰로치나 공동체의 여자들 또한 '남아서 싸우기'와 '떠나기'를 두고 박 터지게 신학적·윤리적 토론을 이어 간다. 공동체/조직에서 흑해 심층 화석의 경조직을 보호하는 연조직(62쪽)을 맡은 존재들은 모두 이 토론에 몰입했으리라. '응? 이들이 던지는 질문과 고민은 정확히 내 것이잖아!' 

나 또한 여자 동료들 혹은 교회 자매들과 가끔 싸우고 자주 화해하며 토론했던 이슈들이 낱낱이 기록된 이들의 대화를 읽으며, 얼마나 자주 내적으로 토론에 참여했던지. 특히 늘 핵심 질문을 던진 프리센가 최고 연장자 아가타의 장녀 오나의 발언에서 그랬다.

"우리가 속박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이 누구인지 질문을 던져야 해." (52쪽)

<위민 토킹> / 미리엄 테이브스 지음 / 박산호 옮김 / 은행나무 펴냄 / 328쪽 / 1만 7000원
<위민 토킹> / 미리엄 테이브스 지음 / 박산호 옮김 / 은행나무 펴냄 / 328쪽 / 1만 7000원

성폭행을 당한 당사자이자 성폭행을 당한 딸을 둔 엄마이거나 할머니인 여성들은 그들이 "동물처럼 사냥감으로 지내 왔"(41쪽)으니 동물처럼 대응해야 할 것인지를 먼저 고민한다. 두 가문의 최고 연장자 여성들이 이 사건에 대한 대응의 선례를 그들이 키우는 '동물'이나 전도서에 나오는 '바람', '바다'에서 찾자, 다음 세대인 딸 살로메가 "우리의 모습을 비춰 볼 수 있는 인간의 선례는 없는 거냐"(43쪽)고 묻는 장면부터 불꽃이 튄다. 공동체의 강간 사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논의하고자 모인 자리에서, 그들은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했다.

그들이 키우는 동물만큼의 안전도 확보할 수 없고, 동등한 인간으로서 합리적 소통과 절차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었던 게 그들이 처한 상황이었다. "두 손목은 끈으로 묶여 살갗이 벗겨졌고, 몸은 피와 똥과 정액으로 더렵혀져" 있던 딸 나이체를 발견한 후 이 사건을 따지고 든 엄마 미나에게, 주교 피터스는 신이 죄를 저지른 여자들에게 벌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가 그다음엔 미나가 그 폭행 사건을 지어냈다고 몰아가기까지 했으니까.

피터스가 그저 "여자의 터무니없는 상상"(93쪽)이라며 사건을 은폐하자, 미나는 끝까지 따지며 자기 몸에 상처를 내면서까지 항의했지만 끝내 목을 매게 된다. 성폭행 가해자들은 무려 신변 보호를 받기 위해 도시로 이송됐는데. 이 모든 상황 판단과 결정에는 공동체 원로들과 주교 피터스의 '남성 권력'이 있다. 여덟 여성의 '말하기'는 이런 바탕에서 시작된다. 어느 공동체에서든 여성들이 모여 말하기를 시작했다면, 그 일은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난 후에 비로소 시작된 것인지 먼저 헤아려 봐야 함을 작가는 적실히 보여 준다.

새로운 용서 방식 찾아내고
권위의 의미를 재정의하다 

이 소설은 실제 일어난 강간 사건을 기반으로 하지만, 소설에 나온 여성들의 문제 해결 방식은 실제 행동이 아니라 작가의 "소설적 대응이자 여성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행동"이란 것을 아시는지. 작가는 실제로 그런 해결 방식을 채택한 메노파 여성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게 아니라, '이렇게 대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일종의 상상도를 건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대화가 마치 진짜 있었던 회의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소설 속 여성들이 자신들의 메노파 신앙을 지키려고 분투하며 그 안에서 해결책을 모색한다는 데 있다.

메노파 신자 여성들이 '평화주의'를 따르는 선택지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토론하듯, 나 또한 조직에서 겪는 부당한 처사나 폭력적 구조 속에서 권력을 남용하는 개인의 행동에 어떻게 대응할지 개신교 신앙의 자장 안에서 치열하게 답을 모색했고 지금도 모색하고 있으므로, 작가의 이 상상력은 더없이 온당하다. '믿음'을 가진 이들이 "세속적 사람들"과 똑같이 가부장적 권력의 문제에 처했을 때, 신의 세계 안에서 답을 찾고자 몸부림치는 것이야말로 더없이 핍진한 현실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역자가 '옮긴이의 말'에서 말했듯, 이들의 회의는 "세속적 사람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324쪽)된다. 이는 독자의 답답함 혹은 의구심을 일으킬지도 모르겠다. 이들은 왜 '비폭력 평화주의'를 지향할까? 왜 그들은 신앙을 버리지 못할까? 그냥 복수하면 될 일을. 그러나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설령 조국은 없을지라도 '믿음'은 언제까지나 남을 터.

"우리가 남아서 싸우는 선택을 배제한 이유는 우리의 믿음을 이루는 핵심 가치 중 하나가 평화주의이기 때문이야. 우리는 조국은 없지만 믿음이 있고, 그 믿음에 봉사하니까 분명 천국에서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될 거야." (226쪽)

그 분투 안에서 '용서'와 '권위' 이슈는 늘 핵심이다. 오나의 발언을 중심으로 "새로운 용서 방식"을 찾아내고 "권위"의 의미를 재정의하는 장면은, 용서와 권위에 대해 질문 던지는 누구에게나 작은 힌트를 건넬 것이다.

"오나는 멀리 떨어져 있으면 용서, 연민, 사랑 같은 일들이 가능하다고 말했지. 그리고 우리가 메노파 신앙을 따르려면 앞서 말한 일을 할 수 있어야 해. 그러니까 우리는 정말 거리를 두기 위해서라도 이곳을 떠나야만 해. 어쩌면 그걸 관점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새로운 관점, 합리적이고, 사려 깊으며, 애정이 깃들어 있고 순종적이면서 우리 신앙과도 일치하는 관점 말이야. 우리의 의무는 여기를 떠나는 거야. 모두 동의해? 우리가 집중해야 할 말은 '관점'이고, 이 공동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게 되면 그 관점을 지닐 수 있게 된다는 내 말에 동의하느냐는 거야." (166쪽)

공동체의 어린이들을 보호하고, 치매에 걸린 노인과 거동이 불편한 사람을 책임지고, 공동체 남자아이들이 어떤 성인 남성으로 자랄지에 대해 고민하며, 그들을 교육하는 방식까지 토론하는 게 바로 이들, '떠나기'를 결정한 여덟 명의 여성들이다. 이들의 이런 모습은 그들이 처음 던졌던 정체성 질문에 대한 훌륭한 대답이 된다. 공동체에서 가부장적 권력을 휘두르는 남성들은 이들을 "동물처럼 사냥감으로" 대해 왔지만, 이들의 정체는 공동체의 신앙을 지켜 내고 약자를 지키며 그 미래까지 내다보는, 지적이고 책임감 넘치는 진짜 어른, 인간이라는 대답.

(그럴 줄 알았지만 그래도 혹시 남아 낫을 휘두를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이들이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브라바'를 외쳤다. 프리센가의 최고 연장자 아가타부터 어린 소녀 아우체와 나이체가 거짓과 계략(?!)으로 식량을 빼돌리고 두 마리 말을 지켰을 때는 말없이 기립 박수를 쳤다. 그들이 이미 그들의 토론장에서 대화 도중 발견했듯, 오로지 '떠남'만이 그들이 자기들의 신념인 평화주의를 따라 "싸우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라고 나 또한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떠남으로만 "용서, 연민, 사랑 같은 일들이 가능"(166쪽)해지는 역설.

말하고 또 말하며 치열하게 논쟁하고
생각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길

'옮긴이의 말'에서 역자는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준다. 플롯 없는 소설이라고 판권 구매를 거부한 외국 출판사가 있었다는 것. 그 외국 출판사 담당자는 여성들의 삶을 표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 '플롯 없음'에 있다는 걸 잘 모르셨던 것 같다. 강간 사건에서부터 일상적 폭력의 순간까지 여성들은 언제나 최소 세 가지의 선택지 앞에 놓일 때가 많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여성 삶의 플롯은 비선형적 궤도를 그리며 불길을 향해 흘러가기 마련이니까. 그런 여성적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본 게 미리엄 테이브스의 소설적 전략인 것을.

기록자 아우구스트의 비밀스러운 정체가 밝혀지고,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는 여성들이 왜 아우구스트를 기록자로 세웠는지에 관한 진실이 펼쳐지는 마지막 챕터는, 이 작은 여성 토론 공동체가 얼마나 사려 깊게 다른 이를 품는지 다시금 일깨워 준다. 온통 폭력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지만, 인간의 품위와 아량을 보여 준 이는 다름 아닌 이 여덟 명의 여성들이었다. 강간 피해자이거나 공동체의 가부장주의 문화가 저지른 온갖 폭력으로 딸과 자매를 잃은 그 여성들 말이다.

작가가 끝까지 '떠나는' 여성들을 향한 독자의 관심을 붙들어 매는 점은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이다. 그들이 방향을 잡은 몰로치나 북쪽에 불길이 퍼져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식을 슬며시 던지며, 과연 여자들이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돌진했을지 아니면 평탄하게 그 길을 걸어갔을지 알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의 다음을 상상하게 만드는 결말에, 마치 다음 시즌을 기다리는 OTT 구독자의 심정이 되어 버렸달까.

사실이야 어찌 되었든, 익숙한 곳을 떠난 여성들 앞에는 타오르는 불길이 펼쳐질 것이라 게 끝내 이 소설적 상상력이 다다른 지점인 것만 같다. 설혹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일일지라도, 이들처럼 말하고 또 말하며 치열하게 논쟁하고 생각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그것이야말로 "사랑과 평화를 위한 시간"(237쪽)을 획득하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이 내러티브의 다음 시즌은 (여성) 독자 여러분의 몫이라며.

박혜은 / 뉴스레터 '에밀앤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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