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여운송 기자] 내비게이션의 존재가 공기처럼 당연한 요즘 같은 시대에 태어난 누군들 믿겠는가. 그때 그 시절에는 자가용마다 '전국 교통 도로 지도'라는 책자가 있었다는 것을. 타지 초행길이라도 가는 날에는 오로지 '종이 지도'와 간헐적으로 마주치는 '지역 주민'의 친절함에 의존해 그야말로 '모험'을 떠나야 했다는 것을.

오늘날 한국교회가 바른 방향으로 가려면 몇 번 국도를 타야 할지는 어디에 물어봐야 할까. 대다수는 당연히 '성경'이라고 답할 것이다. 특히 '전통'이라는 구닥다리 지도를 결연히 찢고 '오직 성경으로'라는 멋들어진 내비게이션을 탑재했다고 믿는 개신교회 신자들이라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톨릭의 잔재로 여겨지는 '수도회 전통'은 개신교인들에게 영 낯설고 인기 없는 주제다. <수도회 길을 묻다>라는 제목을 가진 책이 여타 인터넷 서점 종교 분야 상위권에서 약진하고 있음에도, 보수 개신교 독자들의 지표를 알 수 있는 '갓피플몰'에서는 순위권에조차 들지 못한 현실이 이를 보여 준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지도가 없이는 내비게이션도 없었을 것이며, 내비게이션도 결국엔 본질상 지도라는 것을. 개신교회와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수도회 전통'이 그 형태를 달리할 뿐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사실을 말이다. 더욱이 한국교회가 '모험'에 가까운 개혁을 이뤄 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내비게이션보다 종이 지도 같은 '수도회 전통'이나 '세속 사회의 조언'이라는 낯설고 불편한 도구가 더 적합할지 모른다.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 최종원 교수가 월간 <복음과상황>에 연재한 글을 엮어 <수도회 길을 묻다 - 제국의 가치에 저항하는 삶의 방식>(비아토르)을 펴냈다. 전작 <공의회 역사를 걷다 - 사회사로 읽는 공의회>에 이은 '그리스도교 낯선 전통'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그는 수도회 전통을 통해 제국의 가치를 거부하고 하늘나라의 가치를 이 땅에서 살아 내는 방식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코로나19를 거치며 제도 교회가 크게 주춤하는 시기를 보냈던 우리에게, 수도회 전통은 "멈추어 서서 되돌아보는"(76쪽) 시간을 준다.

총 14챕터로 구성된 최 교수의 책은 잘 차려진 한 학기 교양 수업 같다. 게다가 중간고사도 기말고사도 없다. 다만 과제가 있다면 여기서 얻은 교훈을 토대로 일상을 실제로 살아 내는 일일 것이다. 책 출간 직후부터 북 토크, 콜로키움, 저자와의 만남 등으로 전국을 바삐 누비고 있는 최종원 교수를 6월 12일 서울 중구 필동 카페바인에서 만났다. 수도회의 탄생과, 기나긴 역사, 그것이 남긴 유산이 오늘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에 대해 들어 봤다.

6월 12일 최종원 교수를 만났다. 그가 낯선 '수도회 전통'을 들여다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뉴스앤조이 여운송
6월 12일 최종원 교수를 만났다. 그가 낯선 '수도회 전통'을 들여다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뉴스앤조이 여운송

- 출간 이후 굉장히 바쁜 일정을 보내고 계십니다. 책에 대한 호응도 좋은 것 같은데요. 소감이 어떠신가요.

책 반응은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이번에는 좀 특이한 경험들을 하고 있어요. 사실 그동안 제 책의 독자층이 개신교 복음주의권에 한정돼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제 책으로 스터디하는 가톨릭 신자분들도 계시고, 성공회 신자분들도 계시고, 개신교 수도 공동체를 하는 분들 사이에서도 이 책이 회자되고 있는 걸 전해 들었어요.

얼마 전 진행한 북 토크에도 예수회 사제분과 신학생, 성공회 사제분이 오셨는데요. 의외로 되게 좋아해 주시고 책 내용에도 공감해 주셨어요. 부산에서도 젊은 분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에도 가톨릭 신자 두 분과 성공회 신자분이 있었고요. 독자군이 에큐메니컬하게 늘어났습니다.(웃음) 아무래도 '수도회'라는 주제 자체가 주는 영향이었던 것 같아요.

- 이 책은 '그리스도교 낯선 전통' 시리즈 3부작의 두 번째 책이죠. 첫 번째 주제는 '공의회의 역사'였습니다. 두 번째 주제로 '수도회 운동'에 주목하게 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에른스트 트뢸치는 교회의 역사에 '주류 기독교'와 '수도회의 신비주의 운동'과 '이단 운동'이라는 세 가지 흐름이 항상 상호작용하며 존재해 왔다고 했어요. 우리는 주로 제도 교회의 역사만 교회사로 보고, 수도회나 이단은 기껏해야 한 챕터 정도 주변적으로 다루죠. 하지만 실제로는 초대교회 시작부터 이 세 가지 흐름은 공존했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예요. 이것들을 모두 들여다볼 때 교회 역사를 좀 더 폭넓게 볼 수 있죠. 그런 차원에서 '공의회'에 이어 '수도회'와 '이단'의 역사를 다루는 게 전통적인 교회사가들에게는 낯설 수 있지만, 제게는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어요(최종원 교수의 '그리스도교 낯선 전통' 시리즈 세 번째 책은 '이단'을 주제로 집필될 예정이다 - 기자 주).

사실 애초에 수도회 역사를 이런 식으로 접근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출판사와 처음 얘기할 때는 유럽의 수도회들을 방문해서 기행문을 쓰는 식으로 가볍게 가려고 했죠. 그런데 코로나19가 모든 걸 느닷없이 멈춰 버리는 바람에 다 어그러졌어요.

한스 부어스마라는 신학자가 코로나19 확산 한두 달 전에 "마르다가 돌아왔다(Martha has made a comeback)"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을 개인 블로그에 올렸는데요. 그걸 코로나19 이후에 우연히 보게 됐어요. 교회 전통에는 '마르다의 전통'과 '마리아의 전통'이 있고, 수도회 전통도 '활동 수도회'와 '관상 수도회'로 나뉘는데요. 부어스마가 지적한 건 현대사회가 마르다처럼 '활동'하는 걸 중요시하다 보니 '관상'을 중시하는 마리아의 전통을 상실했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교회에 크게 득이 되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팬데믹이 터지면서 마르다가 가고 느닷없이 마리아가 다시 돌아온 거죠.

한국교회도 어쩌면 '활동'을 통해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를 찾았잖아요. 다른 종교는 코로나19로 모든 게 멈췄을 때 개신교만큼 부담을 느끼거나 저항하지는 않았죠. 그런데 개신교는 주일 오전 11시 예배라는 활동과 신앙 정체성이 너무 깊게 연동돼 있다 보니 멈춘 상태를 못 견디더라고요. 그런 차원에서 '멈춤'과 '돌아봄'을 중시하는 수도회 전통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하게 됐죠. 한국교회가 오직 믿음, 오직 은총을 말하면서도, 어쩌면 활동과 행위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갈망이 훨씬 더 강하지 않나, 마르다에 지나치게 경도돼 있지 않나, 그러면 마리아를 한번 생각해 보자 하는 마음으로 수도회를 들여다보게 된 것 같아요.

'멈춤'과 '돌아봄'을 중시하는 수도회 전통은 코로나19로 제도 교회가 주춤하는 시기를 지나온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까.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멈춤'과 '돌아봄'을 중시하는 수도회 전통은 코로나19로 제도 교회가 주춤하는 시기를 지나온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까.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탄생: 제국과의 긴장 속에서 등장한
아래로부터의 교회 개혁 운동

- 그런 배경에서 탄생한 책이군요. 이 책은 수도회의 '탄생', '역사', '유산' 3부로 구성돼 있습니다. 인터뷰도 그렇게 나눠서 진행해 볼까 하는데요. 책에서 수도회는 제국과의 긴장 속에서 형성됐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수도회 탄생 시점이 4세기를 전후로 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아요.

기독교 초기부터 금욕주의 전통은 있었지만, 수도회가 하나의 집단적인 정체성으로 등장한 건 A. D. 300년 어간이에요. 그 시기가 정확하게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시점과 맞아떨어지죠. 제국과 수도회 등장을 연관짓는 것은 저만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수도회 전통에서 이미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관점이에요. 제국의 기독교 공인은 한편으로 보면 분명한 승리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전반적인 수준이나 윤리 저하, 상대화의 위기라고 직감한 사람들이 등장한 거죠.

에드워드 기번 같은 경우는 수도회를 '삶의 끔찍한 낭비(awful waste of life)'라고 아주 평가절하했지만,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수도회를 '세속화를 막아선 사막의 영웅들'로 표현했어요. 교회와 제국의 긴장이 옅어진 시점에서 그 긴장을 제고하는 하나의 흐름으로 등장해, 제국의 가치를 부정하고 하늘나라 식민지를 이 땅에 퍼뜨리는 '대조 공동체'로 자리매김한 게 수도회였죠. 순교가 사라진 시기에 수도사들이 스스로를 '백색 순교자'라고 부른 이유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제국과의 긴장 속에서 이해했기 때문이었고요.

- 수도회 하면, 세속과의 동화를 피하기 위해 고립을 선택하고 개인 경건에만 몰두하는 이미지가 그려지는데요. 이 책에서 강조하시는 건 수도회가 꼭 그런 모습만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보통 수도회를 수식하는 단어는 '영성'이죠. 하지만 이런 단어와 더불어 수도회 '운동'도 굉장히 일반적으로 통용되거든요. 수도회의 삶은 분명 정적이고 일면 폐쇄적이기도 하지만, 교회와 사회가 개혁되는 역사의 변곡점마다 늘 새로운 수도회가 등장했어요. 새로운 수도회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정신에 대한 역동적인 반응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수도회를 하나의 '운동' 혹은 '역동'이라는 차원에서 들여다보는 게 크게 어긋나는 건 아닙니다. 그런 동적인 의미를 부각하기 위해 '수도원'이 아니라 '수도회'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이기도 하고요.

- 수도회의 일상은 기도·노동·학습으로 축약할 수 있겠는데요. 보통 생각하기에는 이게 다 '수도원'이라는 회랑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잖아요. 누군가는 그런 폐쇄적 공간 안에서 이뤄지는 기도·노동·학습이 어떻게 세상을 유익하게 할 수 있느냐고 질문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 흔히 '사막 교부들'이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주로 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사하라 같은 모래사막을 떠올리고요. 그런데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어요. 수도사들이 사막에서 어떻게 홀로 생활하며 생명을 이어 갈 수 있었겠어요? 수도회는 가장 독립적인 것 같지만 어떤 면에서는 가장 기생적인 조직이기도 했어요. 실제로 튀르키예 같은 곳을 가 보면, 사막 지대는 광야·황야 같은 곳이지 사람이 아주 없는 모래사막은 아니에요. 사람들이 사는 마을과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이고요.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이 수도사들에게 음식을 조달해 주기도 하고, 수도사들에게 배우기도 하면서 상호작용을 할 수 있었죠.

중세 수도회도 이렇게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서울에 많은 대학이 있잖아요. 대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공간이지만 도시 속에 존재하죠. 수도회도 세상과 완벽하게 분리돼 있었던 게 아니라 도시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존재했던 거예요. 대중들에게 교육을 베풀기도 하고, 수도회의 자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우며 사회 안전망 역할도 했죠. 수도회 혹은 기독교가 주류가 아닌 오늘날 우리가 수도회에 대해서 갖고 있는 이미지는 박물관에 갇혀 있는 유물 같은 것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겁니다.

- 수도회 탄생이 대개 '아래로부터의' 교회 개혁 운동이라는 점도 굉장히 주목할 만한 것 같아요.

다시 트뢸치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도 교회는 '전통'과 '교리'가 근간이라는 점에서 보수적일 수밖에 없어요. 저는 여기에 120% 공감하고요. 우리는 왜 교회가 그렇게 탄력적이지 않고 보수적이냐고 말하지만, 실제로 전통과 교리가 무너지면 존재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 제도 교회가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수적인 교회의 모습이 항상 똑같았느냐 하면 또 그렇진 않아요. 트뢸치는 '교회는 역사적 구성물'이라고 했어요. 역사 속에서 비록 느리지만 늘 새롭게 탈바꿈해 왔던 게 교회고요. 이때 수도회는 제국 친화적이고 보수적인 제도 교회에 긴장을 주면서 아래로부터 개혁을 추동한 중요한 흐름이었죠. 수도회에 대한 대중들의 열렬한 지지와 변화하는 시대정신도 제도 교회가 무시할 수 없는 흐름이었고요.

<수도회 길을 묻다 - 제국의 가치에 저항하는 삶의 방식> / 최종원 지음 / 비아토르 펴냄 / 344쪽 / 2만 원
<수도회 길을 묻다 - 제국의 가치에 저항하는 삶의 방식> / 최종원 지음 / 비아토르 펴냄 / 344쪽 / 2만 원
역사: 변곡점마다 전위에 섰던
그리스도의 급진적 대조 공동체

- '교회 개혁 운동의 역사는 새로운 수도회 운동의 역사다'라고 할 정도로 굉장히 많은 수도회가 존재했습니다. 책에도 여러 수도회가 등장하는데, 그중 가장 흥미로웠던 수도회를 꼽아 주신다면요.

독자분들에게 가장 익숙할 법한 프란치스코 수도회 얘기를 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다른 수도회들과 달리 '탁발 수도회(Mendicant Order)'라고 불렸어요. 전통적인 수도사는 혼자 사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몽크(monk)'로 불렸는데, 이들은 도시 속에 함께 살아가며 서로를 '프라이어(friar·형제)'라고 불렀고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가장 큰 특징은 '가난'이었어요. 가난은 소유의 포기잖아요. 여기서 소유는 단지 재산뿐만이 아니라 '권력'도 의미해요. 이 수도회가 등장했던 13세기 초반은, 2000년 교회 역사에서 가톨릭교회가 가장 큰 힘을 구가하던 시기였는데요. 교황이 세속 군주들을 무릎 꿇게 하면서, 종교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엄청난 힘을 발휘했죠. 한마디로 교회가 제국이 된 시대였고, 교황의 힘이 커진 만큼 교회로 인한 그림자 역시도 짙게 드리워진 시점이기도 하죠.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교회의 성직주의, 막대한 부와 권력으로 제국화한 교회의 모습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의식 속에서 등장한 것이 프란치스코 수도회였어요. 여기서 '사도적 청빈'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교회는 베드로로부터 이어지는 교황의 권위를 사도적 계승으로 봤지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진정한 사도적 삶은 그런 식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며 사도적 청빈을 내세웠죠. 대중은 환호했지만, 교회로서는 당연히 불편해할 수밖에 없었고요.

'사도적 청빈'은 제국과 권력화한 교회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저항이라는 차원에서 아주 상징적이죠.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강조한 '청빈'을 단순히 개인적 경건 차원의 가난과 무소유로만 보면, 그 진면목을 놓치게 됩니다. <장미의 이름>에 나온 움베르토 에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땅에서 다스리는 권세를 포기할 수 있느냐"가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말하는 '청빈'의 궁극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어요.

- <장미의 이름>을 다시 읽어 봐야겠네요.(웃음) 프란치스코 수도회뿐만 아니라 굉장히 많은 수도회가 아래로부터, 제국과 권력에 대한 저항을 표방하며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역사가 보여 주듯이 계속 변질되고 퇴락하는 현상이 반복됐는데요. 이상이 클수록 현실과의 괴리도 점점 더 커지고, 결과도 참혹해지는 아이러니·딜레마에 빠졌고요. 현실의 교회 개혁 문제와도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가장 큰 변질의 이유는 뭐라고 보시나요?

어떻게 보면 변질이죠. 변질인데, 결국은 시대성의 한계라고 봐요. 한 시대 속에서 치열하게 불꽃을 태우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동력이 상실된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쇠락의 길을 걷는 것이죠. 변질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너무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생각해요. 급진성에 지속성까지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이게 참 쉽지 않은데요. 한국교회도 마찬가지로, 한창 활동하실 때 귀감이 되던 어른들이 말년에 아쉬운 모습을 보여 주실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끝이 좋아야 모든 게 좋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단지 거기에만 머무르는 건 자칫 우리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역할과 책임을 방기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그러니까 이전 세대에 대한 평가 못지않게, 우리는 과연 그런 역동을 현재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혹은 만들어 내고 있는가를 좀 더 반성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수도회들의 쇠락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읽어 주고 싶은 부분이 있어요.

모든 개혁 운동은 역사 속에서 발흥과 퇴락을 반복한다. 최종원 교수는 "우리는 과연 우리 시대의 역동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모든 개혁 운동은 역사 속에서 발흥과 퇴락을 반복한다. 최종원 교수는 "우리는 과연 우리 시대의 역동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 책에서 소개하신 '여성 수도회'의 역설이 인상 깊었는데요. 교회의 여성 혐오와 차별로 기획됐지만, 역설적으로 남성성이 갖지 못한 대안적·여성적 종교성을 충분히 발현해 낼 수 있었던 공간이기도 했죠.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이 글을 쓰려면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썼던 게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여성 수도회의 존재가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오늘날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점도 분명히 있을 것 같아요.

여성 수도회의 등장은 기본적으로 종교성을 배경으로 하지만, 제도 교회의 여성 차별과 배제의 공간으로 기획된 부분이 분명히 있어요. 현실적으로도 남성 수도회 비해서 훨씬 더 많은 '봉쇄수도원'이 여성 수도회에 할당돼 있고요. 그렇지만 여성 수도회의 신비주의자들, '환시가(visionary)'라고 불리는 이들이 주목을 받은 것은 14세기 말 남성·성직주의·스콜라학 중심 세계관의 한계와 연동돼 있어요. 흑사병과 백년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성직자들은 세상과 유의미한 차별성을 만들어 내지 못했고, 그들이 말한 스콜라학은 12세기의 혁명성을 상실하고 사변적으로 빠졌죠.

남성·성직·스콜라학의 위계가 노정한 한계 속에서 '속어俗語를 사용하는 사제가 아닌 여성들'이 대두된 거죠. 이들은 남성 가부장적 교회 언어 대신 여성의 언어로 하나님의 신적 모성성을 강조했고, 당대에 유의미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여성 수도회의 구성원들이 형성한 속어 문화, 속어에 기반한 영성은 종교개혁기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에도 영향을 미쳤고, 자국어로 읽고 쓰는 독자적 영성을 형성하는 데도 기여했어요. 그런 면에서 종교개혁을 이루는 인문주의와 신비주의라는 틀을 만드는 데 기여한 수도회 여성들의 역할을 배제할 수 없는 거죠.

여성 수도회의 존재와 역할이 주는 함의는 분명해요. 한국교회야말로 남성·목회자·신학 중심 세계관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못했고, 교회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수많은 여성이 설 공간도 여전히 제한돼 있잖아요. 신학적인 이유를 대며 '여성 안수'나 '페미니즘 이슈'를 반대하는 데 몰두하는 것도, 결국은 남성·성직·신학 중심 세계관의 한계라고 보고요. 그럴수록 교회의 퇴행성을 일반 대중에게 더 각인시키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한국교회가 여성들의 목소리를 더 듣고, 여성들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을 더 적극적으로 고민하면 좋겠습니다.

- 개신교 독자들에게 가장 어필이 될 만한 부분은 아무래도 종교개혁 시기 수도회 해산의 신학적 의미와 역설일 것 같은데요. 수도회를 해산함으로써 제국에 저항하는 공동체의 전통을 상실했지만, 반대로 보면 만인사제직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의 보편적·일상적 수도사적 삶을 열어젖힌 측면도 있었다고요.

우리가 수도회와 개신교의 관계를 지나치게 평면적으로만 읽어 왔던 부분이 있어요. 루터 자신이 수도사였고, 그 부정적인 부분을 절감했기 때문에 개신교회의 수도회 해산은 당연한 결과인데요. 시대정신에 부응하지 못하고 권력화한 기존 교회 권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종교개혁이 의도했던 바가 수도회의 저항 정신과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디트리히 본회퍼는 "20세기에 지금 루터가 온다면 다시 수도회를 복원해야 된다고 주장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나치 치하에서 지나치게 제국과 연동돼 있었던 독일 교회 현실 속에서는, 루터도 제국에 저항하는 수도 공동체의 필요를 역설했을 거라는 말이죠.

그래서 종교개혁은 가톨릭 수도회주의의 한계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그것을 아주 없앴다기보다는 대중적으로 확장시킨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는 '만인사제'를 '만인수도사'라고 읽어도 무방해요. 중세의 소명은 수도사의 소명이었지만, 근대의 소명은 일상을 사는 모든 이의 소명이었으니까요. 수도회가 지향했던 청빈하고 기도하며 노동하는 삶은 종교개혁이 강조하는 있는 소명자로서의 근면함·검소함의 가치와도 이어질 수 있어요. 종교개혁 정신이 오히려 수도회의 의미를 확대했다고 읽어 나갈 때, 종교개혁 전통에 선 우리도 수도회 전통과 연결될 수 있다고 봐요.

- 근대의 혁명으로 수도회가 폐쇄되고, 자유·평등·박애라는 가치가 세계를 지배하게 됐습니다. 얼핏 들으면 굉장히 좋은 일인 것 같은데요. 교수님께서는 근대적 가치가 수도회적 가치를 압도하면서 외려 잃어버린 것들이 있다고 하셨어요.

이 장이 가장 고민스러웠는데요.(웃음) 사실 혁명 당시 수도회는 폐쇄돼야 마땅했고, 교회도 비판받아 마땅했죠. 이 전제는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등장한 근대가 지나치게 유럽 중심적이었다는 거죠. '헬라인 아니면 다 야만인'이라고 봤던 고대 헬레니즘의 인종주의적 시각이 근대 유럽 중심주의 사상에도 그대로 담겨 있거든요. 보편적인 인류애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자유는 '백인 남성'의 자유죠. 평등도 서민들이 배제된 평등이었고요. 박애 역시 '형제애'였을 뿐 여성들의 자매애가 낄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죠.

결과적으로 유럽 중심주의를 표방하는 근대의 정신은 결코 보편적인 인류애를 추구하지 않았어요. 저는 고대 헬레니즘의 인종주의에 저항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보편적인 인간애, 헬라인을 넘어서 야만까지 포괄하는 그리스도교적 인간애의 싹 자체가 수도회의 폐쇄와 함께 사라졌다고 봅니다. 그 후로 견제되지 않은 유럽의 진보를 향한 과도한 자신감은 제국주의, 사회진화론, 양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죠. 그런 의미에서 수도회가 추구했던 환대의 정신이나 보편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 결국 유럽 중심주의를 어느 누구도 성찰하지 못한 비극적인 결과와 연결됐다고 봅니다.

프랑스 동부에 위치한 클뤼니 수도회. 10세기 중세 교회 개혁 운동의 전면에 나서며 한때 가장 영향력 있던 수도회로 발돋움했으나, 프랑스혁명 당시 파괴됐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프랑스 동부에 위치한 클뤼니 수도회. 10세기 중세 교회 개혁 운동의 전면에 나서며 한때 가장 영향력 있던 수도회로 발돋움했으나, 프랑스혁명 당시 파괴됐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유산: 제국의 주변부에서
나그네를 위한 호스트가 될 수 있는가

- '유산' 파트에서 가장 먼저 '베네딕토회 규칙'을 들고나오셨어요. 청빈·순결·복종·환대라는 가치로 요약되는 이 규칙을 소개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대표성 때문이에요. 베네딕토 수도회는 실제로 서구의 가장 표준적인 수도회였고, 지금도 거의 대부분의 수도회가 베네딕토 회칙에 기반해서 운영되고 있거든요. 단순히 여러 수도회 중 하나라기보다는 유럽을 만들었던 대표성이라는 측면에서 베네딕토 수도회를 하나의 사례로 든 거죠. 유럽의 수호성인이 베네딕토이기도 하고요.

<덕의 상실>을 쓴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양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이 무너진 이후 상황을 진단하면서 "우리는 또 다른 성 베네딕토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요. 그만큼 '청빈'과 '순결'과 '복종'과 '환대'라는 보편적인 수도 정신을 가장 잘 담아낸 수도회가 베네딕토회고요. 베네딕토회 규칙은 균형감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수도회가 채택할 만큼 개방적이고 유연성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수도회 운동에서 하나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에큐메니컬적'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 위로부터의 개혁이 크리스텐덤적인 유혹에 노출돼 있다면, 아래로부터의 개혁은 혁명과 같이 모든 것을 타파하고 과거로부터 단절·분리돼야 한다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것 같아요. 그래서 수도회주의가 '분리주의'라는 혐의를 받고 있는 것 같고요. 그래서인지 신수도회주의가 강조하는 것은 '대항 문화적이지만 반교회적이지는 않은', '파라처치(para-church)' 운동이라기보다는 '프로처치(pro-church)' 운동이라고 하셨는데요.

많은 사람이 이상적인 모습을 전제하고 교회를 바라보죠. '교회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하면서요. 하지만 2000년 역사를 보면 제도 교회가 소위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였던 적은 없었어요. 2000년 동안 그러지 않았더라면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죠. 그렇다고 마냥 교회를 부정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는 아니잖아요. 교회와 함께 가는 것, 교회가 좀 더 이 사회와 건전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죠.

그런 면에서 신수도회주의가 취하는 스탠스는 '대안' 공동체가 아니라 아닌 '대조' 혹은 '대항' 공동체인데요. 대안은 기존의 것을 대체한다는 의미가 있지만, 대조·대항은 기존의 것과 비교되게 존재하면서 재고와 회복을 촉구하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신수도회주의자들이 자신들을 '파라처치'가 아닌 '프로처치'로 정체화했던 이유는 분리주의적 혐의를 벗어나기 위함도 있지만, 그 이전의 운동들이 결국 제도 교회와 연동되지 않아 큰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사멸해 버렸다는 지점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죠.

제도 교회는 늘 그 방식 그대로 유지돼 왔지만, 외부의 대조·대항 공동체가 견인하는 힘·자극·긴장 속에서 조금씩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왔어요. 거기에 기여해 온 수도회를 '프로처치'라고 부르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죠. 저는 제도 교회가 이러한 변화의 끝자락이라도 붙잡고 쫓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해 왔으니까, 살아남을 거라고 봅니다.

최종원 교수는 제도 교회와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근본적인 가치에 대한 재고와 회복을 촉구하는 '대조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최종원 교수는 제도 교회와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근본적인 가치에 대한 재고와 회복을 촉구하는 '대조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 신수도회주의의 흐름에서 새롭게 생겨나는 공동체들의 가장 큰 표지라고 한다면 '주변성'일 텐데요. 오늘날 주변에 거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제가 생각하는 '주변'이 공간적인 의미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주변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주변인·경계인·소수자들에 대한 한국교회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절박한 문제의식의 표현인 거죠. 오늘날 한국교회와 등치되는 단어들이 배제·혐오·차별이잖아요. 저는 이것이 교회의 지표인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상실한 결과라고 봐요. 그러니까 제국의 중심을 떠나서 주변으로 가야 한다는 말은, 교회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타자에 대한 환대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해요.

제가 이 책에서 환대(hospitality)에 관한 대목 중에 '호스트(host)'라는 표현을 썼는데요. 호스트는 나그네를 맞이하는 '주인'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성찬에서 사용하는 '빵'을 의미하기도 해요. 자신의 몸과 피로 나그네를 먹여 주시고 수용해 주신 예수님의 '환대'야말로 교회의 표지인 것이죠. 오늘날 한국교회가 제국의 주변부에서 나그네를 기꺼이 환대하는 성찬의 호스트가 되고 있는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고 봐요.

일례로, 지금 한국교회는 차별금지법을 막아서고 있죠. 그게 제정되면 교회가 무너질 거라는 언설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맹목적으로 휘둘리고 있어요. 환대를 말하는 사람들의 입에는 재갈을 물리고, 자꾸만 위기의식을 조장하고 있죠. 저는 그 반대야말로 한국교회가 살길이라고 생각해요.

- 마지막 질문입니다. 기독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작게 실천할 수 있는 수도회적·저항적 실천 방안을 독자분들과 공유해 주신다면요.

청어람ARMC 오수경 대표가 최근에 쓴 글에서 "기독교는 활동의 종교가 아니라 수행의 종교가 돼야 하는 것 아닌가" 말씀하셨는데요. 굉장히 공감이 됐어요. 수행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낯설지만, 신수도회주의가 말하는 '관상 생활에 대한 헌신'과 연동될 텐데요. 멈춰 서는 것에 대해 불안감이나 조급함을 갖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코로나19가 지난 지금 어떤 활동을 재개하는 데 포커스를 두기보다는, 개인이든 교회든 조금 더 치밀하게 공부를 하면 좋겠어요. 그것이 수도회가 해 왔던 역할이기도 하고요.

루터가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만인사제직은 결국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의미일 텐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과 시대를 주체적으로 읽을 줄 아는 것이 선행돼야 해요.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읽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그냥 듣는 데 만족했던 종교였거든요.

이제는 교회의 선택보다 우리의 선택이 더 중요한 시기가 왔다고 생각해요. 교회라는 바운더리가 예전만큼 강력한 결속력으로 우리를 끌어당기지 못한다면, 이제는 우리가 조금 더 치열하게 그리스도인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주체적으로 읽어 나가는 수고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교회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냐' 하는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코로나 이전의 옛 관성을 회복하는 게 교회의 회복은 아니라는 점이죠.

우리가 일상 속 수도사와 같은 책임감을 갖고 주체적으로 읽으면서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설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럼에도 수도사가 홀로 살 수 없어 공동체를 만들었듯이, 우리도 그런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 나가면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데까지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것이 제가 이 책 <수도회 길을 묻다>를 쓴 이유로 충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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