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과 피해자 섹슈얼리티'는 대한성공회 양성평등위원회 전문위원이자 안양나눔여성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는 강은정 활동가의 연재입니다. 한국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의 전개 과정과 맥락을 살피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안합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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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는 한국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이 세계, 특히 아시아 여성운동의 맥락 속에서 싹을 틔웠다는 점, 기독교 역사의 뿌리 깊은 여성 혐오와 한국 사회의 성차별을 자각한 여성 신학자·목회자, 교회 여성 연대들을 토양으로 시작됐다는 점을 다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기독교 성평등 운동의 맥락에서 촉발한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이 본격적으로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목회자 성폭력)'을 중심으로 투쟁하게 된 이유와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응답 없는 자들

한국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은 목회자 성폭력 사건을 '반복적으로' 마주하면서 오늘날까지 심화해 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문제를 해결할 책임과 권한을 가졌음에도 그 힘을 문제 해결에 쓰지 않고 오히려 문제를 은폐·회피하는 데 사용해 왔던 기독교의 고질적 문제가 반복돼 왔다는 뜻이기도 하겠고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 놓쳐 온 기독교의 조직적·구조적 현실에 대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일부의 문제다' 또는 '피해자가 문제다'라는 식 프레임으로 문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기독교 조직들에 대항해,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은 '여기 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성폭력 인정 투쟁'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90년대 중후반, 몇몇 대형 교회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 사회적 논란과 지탄의 대상이 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 사건들의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가해자들에게 적절한 책임을 묻기 위한 운동 주체들의 노력은, 한국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의 본격적 출발을 기독교 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됐지요. 그중에서도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목사 사건'은 당시 교계뿐만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수년간 여성 평신도 여러 명을 수차례 성추행·성폭행한 혐의로 2018년 구속까지 됐던 이재록 목사 사건은 당시 사회적으로 '어떻게 목사가 저럴 수가 있느냐'는 파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해당 사건의 피해자들은 오랜 침묵을 뚫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목사의 성폭력 사건은 교계뿐만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줬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목사의 성폭력 사건은 교계뿐만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줬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한국여신학자협의회(여신협) 부설 기독교여성상담소에서 작성한 자료에 의하면, 1998년 7월부터 2000년 10월까지 약 2년 4개월간 진행된 기독교여성상담소의 전체 성폭력 상담 77건 중 교회 내에서 발생한 성폭력은 51건(66%)이었습니다. 이 중 5건을 제외한 90%는 모두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강간 24건, 성추행 20건, 성희롱 포함 기타 2건)이었지요. 또한 상담소의 2006년 자료에 따르면, 1998년 7월부터 2005년 10월까지 진행된 성폭력 상담 건수 중 목회자가 가해자인 성폭력은 총 108건으로, 목회자가 여성 평신도·청소년·어린이를 상대로 한 강간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피해는 대부분 한 목회자에 의해 장기간 지속적으로 발생했고, 피해자의 수는 보통 2명에서 많게는 40에서 50명에 이르렀지요.

2018년 발간해 비교적 최근 국가 범죄 통계를 인용하고 있는 기독교여성상담소의 <교회 성폭력 예방 지침서>는 "2010년에서 2016년 11월까지 '전문 직군별 성폭력 범죄 검거 인원수'에 대한 경찰청 범죄 통계에 의하면 전문직 5261명 중 종교인이 681명으로 1위 (중략) 성범죄를 가장 많이 저지른 전문직 직업군 1위는 목회자"라고 교회 성폭력 실태를 밝히고 있습니다. 또 교회개혁실천연대가 2015년 개최한 '교회 성폭력의 현실과 과제' 포럼에서 한국성폭력위기센터 조중신 센터장이 제시한 검찰청 통계에 따르면, 1993년부터 2012년까지 약 20년간 종교별 성범죄는 개신교 신자가 2170건, 불교 신자가 1405건, 가톨릭 신자가 522건으로 나타났으며, 성범죄를 가장 많이 저지른 전문직 직업군 1위는 '목사'였습니다.

이외에도 △2010년 성폭행·성추행 혐의로 재판받은 기독교대한감리회(감리회) 전준구 목사의 2018년 감독 당선 사건 △청소년 대상 성범죄로 2017년 감리회에서 면직된 문대식 목사 사건 △2010년부터 2016년까지 교인 5명을 성추행해 대법원으로부터 총 1억 원 배상 판결을 받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전병욱 목사 사건 △'이주 노동자의 아버지'로 불리던 한국기독교장로회 김해성 목사의 여성 집사 성추행 사건 △대형 청소년 사역 단체 대표였던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이동현 목사의 청소년 성폭력 사건 등 목회자가 가진 막대한 권력과 신앙 행위를 빌미로 발생한 성폭력 사건들이 한국 기독교 '정통 교단'에서 계속해서 터져 나왔습니다.

성범죄를 가장 많이 저지른 전문직 직업군 1위가 '목사'라는 사실은 공공연하다. 소위 '정통 교단'도 예외는 아니다. 사진은 이동현 목사.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성범죄를 가장 많이 저지른 전문직 직업군 1위가 '목사'라는 사실은 공공연하다. 소위 '정통 교단'도 예외는 아니다. 사진은 이동현 목사.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교회 성폭력'은 언제부터 '목회자 성폭력'이었을까

기본적으로 목회자가 갖는 권위는 교단이 안수를 통해 공식적으로 부여한 종교적 성격을 지닙니다. 이 종교적 권위를 바탕으로 사회적 신임의 대상이 된 목회자들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받는 일이 각 교단에서 반복됐지만, 정작 해당 목회자들을 치리·관리해야 할 교단과 책임자들은 오히려 피해자들의 입을 막거나 조력자들을 고소하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해 문제를 회피·은폐하기 급급했습니다.

기독교 내 성폭력 문제에 관한 공론화는 1990년대부터 대형 목회자에 의한 매우 심각하고 반복적인 성폭력 사건을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당시 운동 주체들이 해당 목회자들이 소속된 각 교단에 목회자 치리와 피해자 지원에 관한 여러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여성위원회나 여신협 외에도 시민단체 성격을 띤 교회개혁실천연대·기독교윤리실천운동 등이 종교인 또는 목회자에 의해 발생하는 성범죄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모니터링하면서, 문제 해결을 위한 성명서 발표, 토론회, 세미나 등을 진행해 왔습니다.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이 가시화한 상황에서도 책임 있는 응답을 거부하는 각 교단의 조직적 문제의 심각성을 반영해, 여신협을 비롯한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 진영은 가해자가 '목회자'인 성폭력 사건을 중심으로 기독교 성폭력 문제를 다루게 됐습니다. 이제는 모두가 알게 된 문제를 그야말로 '문제'로 인정하지 않았던 교단들을 대상으로 인정 투쟁을 이어 가면서, '교회 성폭력은 목회자 성폭력'이라는 개념이 담론화되고 연구돼 왔던 것이지요. 연구 자료들 또한 '교회 내 성폭력 가해자는 대부분 목회자다'라는 형태로 가해자 유형을 특정하고 분석한 것들이 주를 이루게 됐습니다.

교회 성폭력의 '특수성'과 '법적 사각지대'

여신협이 1987년부터 창립 회원 단체로 활동해 왔던 한국여성단체연합은 1992년 '성폭력특별법제정추진특별위원회'를 정식으로 발족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피해자와 전국 각지 여성 단체의 연대 투쟁을 통해 1994년 1월, 드디어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사회 법)1)'이 제정됐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 활동가들은 교회 밖 반성폭력 운동과 함께 공명하고 투쟁했음에도, 그 투쟁의 열매를 함께 누릴 수 없었습니다. 폭행・협박을 필수로 하는 사회 법의 성폭력 성립 단서 조항 때문에 '폭행이나 강제력이 부족해 보이는' 교회 성폭력은 사회 법으로 다룰 수 없는 경우가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친밀하고도 권위적인 '관계'를 기반으로 한 교회 내 성폭력의 특성상,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목회자 성폭력 사건을 인지한 이후에도 해당 교단(법)이나 사회(법)에서 가해자인 목회자를 처벌하거나 피해자를 지원하기 어려웠지요. 이렇게 '특수성'을 지닌 교회 성폭력이 '법적 사각지대'에서 놓이게 되자,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은 또 다른 전략을 고민해야 했습니다. 기독교 교단들이 목회자 성폭력을 치리할 수 있는 별도의 기준을 세울 필요성이 운동 진영에서 대두된 것이지요. 운동 주체들은 이외에도 교회법과 사회 법 사이 어딘가에 놓인 산적한 교회 성폭력 문제들의 '특수성'을 반영한, 기독교 현실에 맞는 '교단 내 성폭력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자각을 갖게 됐고 이를 위한 연구와 실천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제가 쓴 논문에 참여한 한 활동가에 따르면, 당시 교회 밖 여성 단체들도 교회 여성들을 지원하는 것에 대한 고충을 호소했다고 합니다. "교회 여성들은 지원이 정말 힘들다. 조금 상담해서 한 발짝 떼어 놓으면 '교회 가서 목사님한테 물어보고 오겠다', '기도해 보고 결정하겠다' 하는 식으로 두 발 뒤로 가기를 반복한다"는 맥락이었지요. 상담을 위해서는 종교 집단과 신앙생활, 목회자와 평신도 관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아무래도 교회 경험이 없는 활동가들이 이를 적절히 분석하고 개입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교회의 '특수성'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다루려고 하는 이 '특수성'이 긍정적인 측면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 참 씁쓸합니다. 교회 성폭력이 지닌 특수성, 교회 밖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의 특수성, '그들만의 리그'라는 말이 떠오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말하는 주체'의 등장, 최초의 공청회

1998년 7월 개소하자마자 이재록 목사의 성폭력 가해 사실에 대해 알게 된 기독교여성상담소는 피해자들을 만나 사건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발 빠르게 대책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상담소와 여신협은 1998년 12월 3일('여성 폭력 추방 주간'이었던 11월 25일~12월 10일 중 하루로 정했다고 합니다 - 필자 주) '한국기독교연합회관 3층 강당에서 최초의 교회 내 성폭력 추방을 위한 공청회를 '교회 내 성폭력의 실태와 과제'라는 주제로 개최했지요.

이후 이재록 목사의 성폭력 피해자들은 여성민우회의 '가족과성상담소'에 찾아가 사건을 의뢰했고, 가족과성상담소의 요청에 따라 6개 여성 단체(한국성폭력상담소, 서울여성의전화, 한국여성민우회 가족과성상담소, 한국교회여성연합회, 교회협 여성위원회, 여신협 기독교여성상담소)가 모여 1999년 6월에 2차 공청회 '교회 내 성폭력 무엇이 문제인가'를 진행했습니다.

여신협 자료에 의하면, 공청회는 경찰 5개 중대의 비호 아래 개최됐는데요. 여신협 간부들의 기록에 의하면 "사안이 얼마나 민감했는지 안기부 종교 담당 요원이 직접 전화를 해서 후유증을 염려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재록 목사 사건을 비롯한 목회자 성폭력은 교계 내외에 많은 충격을 준 사건이었고, 해당 교단 책임자들과 가해 목회자 편에 서 있던 많은 교인이 매우 당혹스러워하며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으며, 그들이 피해자와 피해자를 지원하는 운동 진영에게 매우 폭력적으로 대응했다는 사실을 방증합니다.

이렇게 1998년과 1999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공청회에서는 목회자 성폭력 피해를 경험한 여성들이 (비록 본명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직접 공청회 자리에 나와 본인의 성폭력 피해를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무려 25년 전, 일상 속 성폭력 문제에 관한 다양한 공론화와 인식 개선 교육이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았던 시기에, 목회자 성폭력 피해자들 스스로가 공론장에 '말하는 주체'로 등장했다는 사실은 가부장적 한국 사회와 여성의 성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방식으로 관리해 온 기독교 문화 안에서는 매우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함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겠지요.

여기서 우리는 2018년 서지현 검사가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매스컴에서 발화한 시점에서 시작된 한국 사회 전체의 '미투 운동'이 향후 여성운동과 수많은 여성의 자각을 견인한 결정적 사건이 됐다는 점을 상기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더욱 거세진 2018년 미투 운동의 맥락과 1998년 최초의 교회 성폭력 공청회의 사회적·환경적 조건은 매우 다르지만, 한국 기독교의 상황과 조건을 반추해 볼 때 당시 피해자들의 발화된 목소리가 얼마나 급진적이고 놀라운 행위였는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피해자들의 증언 외에도 각종 탄원서·성명서·건의문이 발표되는 등 운동은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추진 동력을 얻어 적극적으로 투쟁 전선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각 교단은 여전히 '교회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 '선교에 방해가 된다'는 등의 이유로 목회자 성폭력 사건을 은폐하고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왔는데도, 계속해서 문제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교단들은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가해자를 치리함으로써 책임을 다할 기회를 그렇게 놓치고 말았습니다.

교회법 토론회와 '교단 내 성폭력특별법'

운동 주체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2000년 '교회 내 성폭력 추방을 위한 교회법 토론회(교회법 토론회)'를 개최해 한국 기독교 실정에 맞는 '교단별 성폭력특별법'을 고민했습니다. 교회법으로도 사회 법으로 피해자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고 판단한 운동은, 이제 교단별 성폭력특별법 제정 운동을 전면에 내세우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활동가들은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전해 줬습니다.

"교단은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진짜 벽에다 대고 소리치는 것과 다름없었지요. 할 수만 있다면 교회 성폭력을 사회 법으로 처리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몇 건 되지도 않는 사회 법으로 처벌받은 사례(가해 목회자)도 다시 돌아와서 그 교회에서 목회하고 재발하는데… 그럼 그건 교회법으로 해결해야지 어쩌겠어요."

교회법 토론회에서는 운동 주체들이 피해자를 지원하면서 경험한 실제 사례를 기반으로, 사회 법과 교회법을 망라한 성폭력 관련 법들의 한계가 다각도로 논의됐습니다. 우선 교회법에서는, 교회 재판을 열기 위해 신청자가 교단에 돈을 지불해야 하는 기탁금 제도의 문제, 피해자 보호 및 재발 방지 미비, 목회자 치리의 근거가 되는 교단법에 성폭력 관련 죄과(범과) 조항 부재, 왜곡된 성 인식과 낮은 성 인지 감수성을 가진 재판위원들을 비롯한 2차 가해 등에 관한 문제가 제기됐습니다.

사회 법에서는 성범죄 성립 기준과 공소시효에 대한 한계가 논의됐는데요. '강간죄에서 폭행·협박에 대한 최협의설(강간죄 성립 요건인 폭행·협박을 가장 협소한 의미로 해석하는 것 - 편집자 주)' 때문에, 기독교 조직에서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를 구제하거나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는 치명적 결함이 있다는 것을 직시하게 됐습니다. 교회 성폭력은 협박이나 강제성이 없는 형태로 신뢰 관계와 친밀함, 종교적 권위를 빌미로 발생한다는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요.

또한 1998년 공청회 당시의 성폭력에 관련된 사회 법은 형사소송법과 성폭력특별법으로 나눠 볼 수 있는데, 당시 형사소송법상 공소시효는 6개월, 성폭력특별법의 공소시효는 1년에 불과했습니다. 이러한 기준으로는 자신의 피해 경험을 성폭력으로 인지하고 고소·고발까지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리는 교회 성폭력 피해자들을 구제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교회법 토론회를 준비한 기독교여성상담소의 교회법 연구팀은 해당 분야 전문가들과 공동 워크숍 등을 진행하면서, 서구 기독교 교단의 관련 법과 국내외 법을 분석·검토했습니다. 목회자 성폭력 피해자들을 실질적으로 지원하고, 가해 목회자를 처벌할 수 있는 교회법 마련을 위해 '교단 내 성폭력특별법' 초안을 최초로 제시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연구팀이 각 교단 법제위원·장정위원 등을 초대한 자리에는 한 교단의 헌법위원과 신학대학원 교수 한 사람만이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이 초안에 대해 '시기상조', '당위성 부족', '피해자의 이상 성격 등으로 인한 무고 위험', '가해 목회자 권익과 돌봄'이라는 황당한 논평을 들어야 했지요.

이처럼 한국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 주체들은 굵직한 목회자 성폭력 사건에 대한 피해자 지원을 중심으로, '사각지대'에 놓인 목회자 성폭력 사건의 가해 목회자를 치리할 각 교단의 책임을 납득시키기 위한 공청회·토론회 등을 통해 운동 담론을 심화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남성 중심의 기독교 조직은 교단 내 성폭력특별법 제정 등 조직적 차원의 대처와 실천을 고민할 정도로 그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교회 내 성폭력 문제를 성적 일탈을 저지르거나 왜곡된 성 인식을 가진 몇몇 목회자 개인의 문제로 축소화하고 회피하는 일은 그 후로도 계속됐습니다.

한마디로 한국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의 역사는, 성폭력 담론에 대한 기독교 조직의 높은 저항과 낮은 인식 수준을 타개하고 목회자 성폭력 피해자의 피해를 '진짜 피해'로 인정받기 위해 전략적으로 전개해 온 인정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번 글은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다소 장황했습니다. 당시 운동 현장의 맥락을 알아야 운동 담론도 분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운동 주체들이 각 교단 내 성폭력특별법 제정을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포괄적이고 조직적인 기독교 성차별을 또다시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복합적인 맥락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첩첩산중이고,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사회의 성폭력특별법과 본 연재의 주제인 '각 교단 내 성폭력특별법'을 구별해 사용하기 위해 1994년 제정된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은 '사회 법'으로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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