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은 교회음악·예배학 전공자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가 교회력 '공동 성서 정과(RCL)'에 맞춰 신자들의 묵상과 영성 생활을 돕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연재는 매주 금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2023년 6월 18일, 성령강림 후 셋째 주일 공동 성서 정과 본문(클릭)
시편 116:1-2, 12-19 / 창세기 18:1-15, (21:1-7) / 로마서 5:1-8 / 마태복음 9:35-10:8, (10:9-23)
익숙한 것을 대하는 태도

이제는 새로울 것도 없는 노래들 있잖아요. 지하철 환승역을 알리는 노래라든지, 트럭이 후진할 때 들리는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같은 노래 말입니다(심지어 요즘 트럭에서는 그 노래를 듣기가 어려운데도, 후진하는 트럭만 보면 마음속에서는 이미 연주되고 있지요). 우리 아이들도 자주 애용하는 소리, 절망 혹은 좌절의 순간마다 울리는 그 음악, 바흐의 '토카타'도 있네요. "엄마, '띠로리' 오르간으로 칠 수 있어?" 어엿한 작품 번호를 지닌 '토카타와 푸가 BWV565'는 숱한 예능과 애니메이션에서 '띠로리'로 전락시켰기 때문에, 오르간으로 연주되는 그 곡은 이제 더 이상 그 노래가 아닌 것이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활 속 배경음악으로 반복·강제 청취하다 보니, 이제는 그 낡은 음악으로부터 새로운 감흥이나 해석을 이끌어 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 음악들도 작곡가들의 산고를 통해 태어난 엄연히 훌륭한 작품인데 말이에요. 사실 우리는 이 곡들의 초입만 들은 거라, 전체를 들으면 마음이 처음보다는 꿈틀할 때도 있습니다. '아하, 이런 곡이었어? 뒤에는 이렇게나 바뀌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예요. '엘리제를 위하여'를 우연히 클래식 FM에서 듣는다 해도, 우리는 모두 일제히 같은 장면을 상상할 겁니다. "조심하세요! 트럭이 후진하고 있어요."

사라의 1년, 되살아나는 생명의 기운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를 듣고 엎드려 웃었고(창 17:17), 사라는 장막 뒤에서 듣다가 속으로 웃습니다.(창 18:12) 아브라함은 이미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고, 사라 자신도 누구보다 생명이 저무는 속도를 체감하고 있었을 터입니다. 여호와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방식은 참 기이하지요. 낡고 마른 사라의 완전한 체념 위에서 언약의 성취가 돋아납니다. 그리고 다시 그분은 말씀하세요.

"내년 봄 새싹이 돋아날 무렵에 내가 다시 찾아오리라. 그때 사라는 이미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 (창 18:14, 공동번역)

"봄 새싹이 돋아날 무렵"이라는 시적 표현은 공동번역에만 창세기 18장 10절, 14절에 두 번 등장하는데요. 이 번역본만의 특별한 문학적 장치인 듯합니다. 그러나 마음과 몸뿐만 아니라 희망과 언약도 낡고 노쇠해진 사라에게서 역설적이게도 싱그러운 봄 새싹이 등장하니, 그야말로 새로운 장면의 전환을 순간 꿈꾸게 되지요. 그렇게 오래된 의심의 눈길이 거둬지는 신비의 순간이 잠깐 고개를 들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99세의 아브라함, 13살 소년이 된 이스마엘, 그 옆에서 불안한 눈빛을 한 하갈, 여지없이 소망을 잃은 늙은 사라가 보입니다.

그렇게 네 번의 계절이 지나가고 봄 새싹이 다시 돋아날 무렵, 사라는 본인 자신이 가장 놀랄 만한 사건을 맞이하죠. 드디어 아들 이삭을 품에 안게 됩니다. 계절이 바뀌며 땅은 숱한 비와 바람을 맞았고, 풀과 나비를 가득히 품었으며, 과실의 즙은 융숭한 식탁 위에 흘러넘쳤을 겁니다. 계절의 은총을 그득 입은 대지와 마찬가지로, 사라 역시 생명의 기운이 되살아납니다. 이미 생리가 끊어졌던 사라의 몸에는 새 창조로 인한 어떤 질서들이 빼곡히 들어섭니다. 시간이 역행하는 순간일까요, 아니면 보이지 않던 시간의 뒷모습이었을까요?

재작곡된 사계절 Recomposed Four Seasons
'사계'를 작곡한 안토니오 비발디(사진 왼쪽)과, 2012년 이를 재작곡한 막스 리히터(사진 오른쪽). 
'사계'를 작곡한 안토니오 비발디(사진 왼쪽)과, 2012년 이를 재작곡한 막스 리히터(사진 오른쪽). 

후기 미니멀리즘의 대표적 작곡가인 막스 리히터(Max Richter)는 2012년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를 그만의 방식으로 '재작곡'해 발표합니다.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이탈리아 작곡가인 비발디의 사계는 우리 귀에도 매우 익숙한 곡이지요. 막스 리히터는 작곡된 지 300년 가까이 흐른 이 곡을 75%가량 해체하고 재조립했다고 말합니다. 시대에 따른 음악적 스타일에 변화를 주어 '재해석'하는 연주는, 과거의 것을 현재의 것으로 창조하기 위해 클래식 연주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이와 반대로 작곡된 시대를 구현하기 위해서 원전 악기를 복원해 연주하기도 하는데요. 이 경우는 현대의 시간 위에 놓인 오리지널리티를 구현하고픈 노력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리히터는 '재해석'이 아닌 '재작곡'이라는 다소 위험한 선택을 합니다. 그 또한 비발디의 사계는 지루하고 지겨울 정도로 많이 들었다고 고백해요. 어릴 때부터, 쇼핑센터나 광고, 휴대폰 연결음을 통해 숱하게 들어 온 사계는, 정말 짜증이 날 정도였다고도 말하죠. 그는 새로운 방법으로 다시 사계와 사랑에 빠지고 싶었다고 인터뷰 중에 밝힙니다.

그는 사계에 새로운 숨을 넣기 위해, 곡의 75%를 버리고 새로 작곡했지만, 이러한 재작곡의 핵심은 비발디의 DNA가 작품에 살아 숨쉬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비발디의 언어를 유지하되, 현대적 인상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을 통해, 우리는 그가 비발디의 '가장 비발디스러운' 것을 집요하게 탐구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고, 그러기 위해 끝까지 남겨야 할 음악적 고유함이 무엇인지 고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리히터의 손에 의해 재탄생된 '비발디의 사계'는, 매일 지나 가지만 미처 보지 못하는 장소들을 골목마다 마주치게 해 주고, 돌아가다 보면 처음 온 것 같은 길에 들어선 기분이 들게 만드는 매력을 지닌 작품입니다. 마치 300년 전의 비발디가 상암동 DMC 지하철역 출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나오는 장면과도 같고, 바로크 시대의 과장된 붉은 곱슬머리 가발을 걸쳐도 파타고니아 티셔츠와 찰떡으로 잘 어울리는 것 같은 조화를 만나는 거죠.

비발디의 사계와 리히터의 사계

아이를 낳고 나서야 비로소 어머니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얻은 사라는, 막스 리히터가 기존의 사계를 해체하고 재조립했듯이, 이전 사래와는 다른 '재작곡된(recomposed)' 사라로 남은 평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다시 구성된 사라에게는 무엇이 덜어지고, 무엇이 남았을까요? 리히터의 사계는 비발디의 사계로부터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오늘은 섬세하고 깊은 감성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의 연주로 이 곡을 들어 보려 해요. 무대에서 한수진은 마치 연극배우와 같이 몰입하며 감정을 풍성히 전달합니다. 그의 눈썹 움직임, 자신감 있게 긋는 활의 기운, 풍부한 표정 등과 함께 음악을 들어 보면, 재작곡된 사계를 보다 더 잘 느낄 수 있을 거예요.

한수진이 연주하는 막스 리히터의 '재작곡된 비발디의 바이올린 콘체르토 사계', 올해 2월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실황 연주를 성령강림 후 셋째 주 '경건한 청음'으로 나눕니다. 생명이 움트며 생동하는 봄으로부터 시작되는 사계를 들으며,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 21:6)라고 했던 사라의 고백을 함께 떠올려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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