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은 교회음악·예배학 전공자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가 교회력 '공동 성서 정과(RCL)'에 맞춰 신자들의 묵상과 영성 생활을 돕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연재는 매주 금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2023년 6월 11일, 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 공동 성서 정과 본문(클릭)
시편 33:1-12 / 창세기 12:1-9 / 로마서 4:13-25 / 마태복음 9:9-13, 18-26

심상과 재현의 사이

제가 늘상 보는 악보1)에 대한 이야기예요. 오선지에 그려진 음표와 쉼표는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어요. 저는 그 지시를 따르는 사람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그 너머의 것을 읽어 내기도 한답니다. 오르간 앞에 앉은 저는 이 악보가 표방하고 있는 음악을 상상해 봅니다. '작곡가는 이 소리들의 나열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걸까?', '제시된 주제 선율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전개돼 갈까?' 생각하며 작곡가의 마음을 탐험해 보는 것은 악보를 읽어 가는 것과 같은 과정이지요.

이를테면, 악보를 사이에 두고 200년 전에 살았던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와 마주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내 궁금해집니다. "태초에 당신 마음에 있었던 음악과, 지금 내가 연주하는 이 곡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이 악보는 과연 당신이 떠올린 심상의 표상이자 반영일 뿐이겠지요?" 악보 너머에 계신 그분은 미소 짓습니다. "당신은 제가 그려 놓은 음악의 지도를 걷지요. 당신에 의해 음악이 완성되는 것이고요. 그것은 재현을 넘어서는 '새로운 창조'일 거예요."

새 창조의 찰나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일곱 살 딸아이 재의는, 네 살 차이 나는 오빠 무의의 진도를 따라잡기 위해서 열성적으로 연습합니다. 재의가 악보를 더듬더듬 읽으며 한 음 한 음 치는 것을 보더니, 무의가 의젓하게 조언을 건넵니다(무의는 무려 '체르니'를 치고 있거든요). "재의야, 눈은 손보다 빨리 가야 하는 거야. 그래야 음악이 안 끊기지. 끊기지 않아야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거야."

연주자의 눈과 손은 다른 시간 차원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재 울리고 있는 제 연주 소리는 조금 전에 제 눈이 읽었던 그것이고, 달리 말하면 지금 제 눈에 읽히고 있는 악보는 장차 (찰나의 시간이 흐른 뒤) 들리게 될 소리의 기표인 것입니다. 어긋난 시간은 일정한 평행을 유지하기도 하지만, 비스듬히 각을 만들며 흘러가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어서, 마치 동시간인 것처럼 납작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도 많은 일이 일어난답니다. 이 짧은 찰나가 바로 연주자의 고유한 의도가 생성되는 공간인 것이지요. 어찌 보면 넓고도 깊은 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숙고의 순간으로부터 '새 창조'가 발생되기 때문이지요. 새 창조는 연주자가 악보로부터 길어 올린 표현과 심상이 더해지며 기이한 것이 빚어지고 있는 틈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고, 서사의 시간이 존재하는 공간이지요. 이렇게 말하니 무언가가 끊임없이 생산되고 움직이는 역동의 공간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찰나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즉흥의 한때를 간절히 환대하는 일종의 멈춤의 틈일 수도 있지요.

아브람과 아브라함 사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 12:1)

여호와가 아브람에게 보여 줄 새로운 언약의 땅, 찬란한 경이의 '소리'는 아브람에게 아직 들리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다만 계시된 여호와의 말씀, '악보'를 읽어 내는 중이지요. 눈과 손의 시간차 사이에서 이동과 멈춤을 반복하며, 음표와 쉼표의 길이와 표현을 숙고합니다. 셈여림의 상대적 구현은 앞서 나온 소리를 기준으로 음의 양을 형성시켜 나갑니다. 펼쳐지는 길목에 때로는 표지판과 같은 친절한 지시표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하나의 거대한 음악이 완성되기까지의 길은 무궁무진하고 아득하지만, '활기를 가지고 움직이며'라든지 '점점 느려지며 소리를 줄여서' 같은 지시표는, 연주자인 아브람이 작곡가 여호와의 심상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게 만드는 힌트이자 장치가 됩니다.

진실하고 인자하신 여호와를 신뢰하며(시 33:4~5) 아브람은 하란으로부터 가나안까지 옮겨 갑니다. 활기를 가졌다가, 때로는 머물렀다가, 물어 가며, 들리지 않는 소리를 미리 상상해 가며, 아브람은 여정을 떠나지요. 여호와는 아브람에게 비로소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요. 아브람의 여정은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만드는 하나님의 창조, 새로운 존재로서 아브라함이 빚어지는 창조의 틈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길 위에서 형성된 아브라함은 새로운 존재가 되어, 새 노래로 그에게 허락된 언약의 곡을 연주합니다.(시 33:3)

From This Place

하란으로부터 가나안까지의 여정은 여호와의 언약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그간 이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는 아브람의 첫 발걸음은 가장 어두운 곳,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 막연한 곳으로부터 시작됐을 것입니다. 위험하고 확실하지 않은 길을 걸었던 그의 마음을 입어 보고 싶어 선곡한 오늘의 경건한 청음은, 팻 메시니(Pat Metheny)의 'From This Place'입니다.

이 곡은 "내가 볼 수 없는 곳으로부터(From this place I cannot see)" 시작해, "마음이 진정으로 자유를 얻을 때까지(Until hearts are truly free)"의 여정이 담긴 노래입니다. 연주자의 눈과 손이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새 창조의 찰나는 이 곡이 이야기하고 있는 과정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언약이 아직(not yet) 이뤄지지 않아 희미하고 모호하지만 이미(already) 그 길을 걷는 아브라함, 예수의 옷자락을 만진 찰나의 순간을 믿은 여인(마 9:21),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바울(롬 4:18), 제자로 부르심을 들은 첫 순간의 마태(마 9:9)와 나란히 함께 앉아 이 곡을 경청해 보겠습니다. 'From This Place'의 가사와 번역도 함께 드려요.

From this place I cannot see
Heart is dark, beneath rising seas

 

From this place, I don't believe
All my hopes,
my sweet relief

 

From here, I say I cannot breathe
Fear and hurt
again we bleed

 

Unsafe, unsound, unclear to me
don’t know how to be

 

From this place, I must proceed
Trust in love,
truth be my lead

From here I will stand with thee
Until hearts are truly free

 

이곳에서 나는 해수면 아래 가장 어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나의 모든 희망을
그저 나의 달콤한 안도감으로 믿지 않고요.
여기에서부터 나는 숨 쉴 수 없다고 말해요.
두려움과 상처로 우리는 다시 피를 흘리네요.
안전하지 않고, 안정치 못하고, 분명하지 않음은
내가 어떤 것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합니다.
이곳으로부터 사랑 안에서 믿음을 이어 나가야 합니다.
진실만이 나를 인도합니다.
여기로부터 나는 당신과 함께 섭니다.
진실로 자유로워질 때까지 말이에요.(번역:김현지)

1)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악보'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음악의 곡조를 일정한 기호를 써서 기록한 것. 표음表音 보표식과 주법奏法 보표식이 있는데, 주로 오선식五線式 보표가 사용된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