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은 교회음악·예배학 전공자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가 교회력 '공동 성서 정과(RCL)'에 맞춰 신자들의 묵상과 영성 생활을 돕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연재는 매주 금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2023년 6월 25일, 성령강림 후 넷째 주일 공동 성서 정과 본문(클릭)
시편 86:1-10, 16-17 / 창세기 21:8-21 / 로마서 6:1b-11 / 마태복음 10:24-39
딸의 딸, 엄마의 엄마

쇼윈도 안에는 은색·청색·회색 레이스 소재의 머메이드 드레스들이 그윽하게 가득 들어서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둘째 아이의 태몽이 무엇이었냐고 물으면 제가 떠올리는 장면이에요. 아이의 성별을 알려 주는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놀라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첫 노크'였던 이 꿈을 꾸었기 때문이었지요.

그 꿈으로부터 시작된 딸 '재의'와의 시간은 지금까지 7년 정도가 흘렀습니다. 그런데 우리 둘 사이에는 보다 넓은 폭으로 '여성의 시간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한 집에 사는 여성은 분명 딸과 저 둘뿐이지만, 사실은 저의 어머니, 외할머니, 어린 저, 엄마인 저 그리고 재의까지, 여러 여성이 한데 머물러 사는 듯한 다소 복잡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서운한 일이 생긴 날이면, 재의는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계속 제게 사과를 받아 내려 했습니다. 그럴 때면 자기 마음이 "검어졌다"고 표현하곤 했는데요. 검어진 마음으로 잠을 청할 수는 없던 딸은, 우리 사이에 있었던 말들을 기억하고 자기 감정을 여과 없이 표현했죠. 어스름한 방 안에서 아이와 저는 마음의 색이 옅어질 때까지 사과와 포옹을 반복했습니다. 구겨졌던 내면에서 바스락거리며 상처 입은 제가 드러나고, 제 엄마가 우두커니 나왔다가, 해결되지 않고 덮어 놓았던 과거의 아픔이 엄마의 엄마로부터 느닷없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감정이 우후죽순 돋아나며 저와 딸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는 날이면, 제가 있는 방은 여자들로 가득했지요. 그러니 아이의 눈을 바라보는 찰나의 시간, 제 자신이었다가 어린 저였다가 제 엄마였다가를 반복하니 시간은, 짧지만 검도록 깊숙했습니다. 분노와 원망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여자들의 말과 한숨이 뒤엉켜 눈물이 되고, 비수가 됐던 말들이 여전히 생생히 남아 뒤늦게 생채기를 내기도 하고, 혹은 떠다니다가 자취를 감추기도 했습니다.

틀어진 고통의 시간만이 제 방에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젖몸살이 너무 심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엉 울었던 어느 날, 아가 재의는 영문도 모른 채 엄마인 저를 따라 같이 울었습니다. 마치 인생 몇 회 차 살아 본 얼굴을 하고서 말이지요. 남편의 전화를 받고 달려온 제 엄마는, 신발을 아무렇게 벗으며 "아이고, 그게 얼마나 아픈데. 내가 그 고통을 잘 알지" 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같이 아파하셨어요.

그날은 엄마의 엄마가 해 주셨다던 삶은 양배추로 젖몸살을 달래며, 외할머니로부터 온 낫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수유의 시간은 고통과 평화가 공존했는데, 거기에는 외할머니와 엄마와 저와 딸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나란했죠. 미움과 서운함과 위로와 공감이 뒤섞여 있는, 뭐라 지칭할 수 없는 감정을 통과한 '나'라는 존재는, 단독자이지만 동시에 일종의 집합체인 것입니다.

하갈의 하나님
아벨 판(Abel Pann, 1883~1963), '하갈과 이스마엘(Hagar and Ishmael)'. 사진 출처 mutualart
아벨 판(Abel Pann, 1883~1963), '하갈과 이스마엘(Hagar and Ishmael)'. 사진 출처 mutualart

이방인 여성 하갈은 고단함과 차별로 그득한 외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고향인 이집트를 떠나 낯선 땅에서 사는 것만 해도 쉽지 않았을 텐데, 주인인 사라로부터 학대와 내침을 당했죠. 이스마엘을 임신했을 때는 가출을 감행했지만,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지긋지긋한 아브라함의 집으로 돌아갔고요.(창 16:9)

그에게는 보듬어 줄 가족 대신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만이 위로이며 구원이었습니다.(창 16:13) 하갈은 상처로 가득했던 자기 인생의 영원한 샘, 살피시는 신을 만났던 그곳을 영원히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브엘라해로이', 나를 살피시는 살아 계신 이의 우물이었지요.

이후 광야로 다시 내동댕이쳐지는 기구한 운명에 처했을 때도, '살피시는 하나님'은 다시 하갈의 눈을 밝혀 샘물을 보게 하셨고(창 21:19), 목마른 모자를 해갈해 주셨습니다. 브엘세바 광야 한복판에서, 여호와는 어머니 하갈과 아이 이스마엘의 울음소리를 들으시는 분이셨습니다.(창 21:16~17)

과연 이스마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어떻게 불렀을까요? 하갈이 자신의 고향과 같은 이집트에서 이스마엘의 아내를 얻어 주었다는데(창 21:21), 이스마엘의 아내는 여호와를 하갈의 하나님, 즉 '살피시는 하나님'으로 불렀을까요? 광야에서 활을 쏘며 장성했다던 이스마엘은 아버지를 원망하며, 외로움을 달래려, 떠나온 그곳을 향해 눈물의 활시위를 당겼을 거예요. 이스마엘의 '검어진 마음' 속 깊이 계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셨을까요?

딸의 하나님

"엄마, 지난 주일 성찬을 받을 때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말씀하셨어. 재의야, 너는 어떤 어른이 되고 싶니? 나는 대답했지. 어떤 어른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엄마와 하나님의 친구가 되고 싶어요."

재의의 하나님은 아직 여섯 살 반만큼의 하나님입니다. 재의는 성장해 가면서 자신의 세계로 노크하며 들어오시는 신의 형상을 만나겠지요. 그리고 집합체인 존재로서 맞이하는 다각형의 신의 형상 또한 맞이할 거예요. '엄마의 하나님'을 목격하며, 새벽마다 기도했던 '할머니의 하나님' 이야기를 들으며, 재의는 신을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재의 자신의 우물 곁에서 고유하게 만나는 하나님의 칭호가 만들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갈의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처럼 말이에요.

오늘 우리가 경청할 경건한 청음은 러시아 현대 작곡가 블라디미르 마르티노프(Vladimir Martynov)의 'Come in'입니다. 바이올린과 스트링 오케스트라를 위한 편성으로 작곡된 이 곡은, 섬세한 현의 초대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곧이어 '첼레스타(celesta, 철제 울림판을 때려 연주하는 건반악기 - 편집자 주)'의 노크 소리가 들립니다. 물방울 같은 두드림의 소리는 마음을 한 방울 한 방울 적시며, 현이 이끄는 대로 데리고 가지요. 이는 우물 속에서 들리는 물방울 소리 같기도 하고, 살피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노크 소리 같기도 합니다. 앨범 내지에는 러시아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 현자 이오안(Ioann Lestvichnik)의 격언이 인용돼 있습니다.

"너의 내면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거기서 너는 하늘의 가장 신성한 장소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네 가슴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는 것과 하늘의 가장 신성한 그 곳을 보려는 것은 결국 하나이며, 같은 문인 셈이지. 천상의 나라로 이끄는 계단은 네 내면 안에 놓여 있고, 그것은 영혼 안에 비밀스럽게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인데, 우리의 온 생은 단지 이 놀라운 입구로 들어가는 것을 찾는 시도에 불과하지. 숨겨진 문을 겸허하게 두드리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이 없단다. 우리의 모든 소망은 이 시간에 놓여 있고, 두드림의 응답이 이루어지는 그날, 우리는 그 목소리를 듣게 될 거란다. '들어오렴(Come in)!' 왜냐하면 이는 오직 두드려야 너에게 열릴 것이니."

하갈의 두드림에 응답하신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브엘라해로이 우물 곁에 서서 이스마엘과 함께 들어 보겠습니다. 천상을 향해 나아가는 듯한 바이올린의 지속적인 진행이 하나님의 섬세하고도 끊임없는 시선처럼 느껴진답니다. 28분의 짧지 않은 시간 끝에 나지막이 러시아어로 들리는 음성도 꼭 들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들어오렴(Войдит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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