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은 교회음악·예배학 전공자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가 교회력 '공동 성서 정과(RCL)'에 맞춰 신자들의 묵상과 영성 생활을 돕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연재는 매주 금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2023년 6월 4일, 삼위일체주일 공동 성서 정과 본문(클릭)
시편 8 / 창세기 1:1-2:4a / 고린도후서 13:11-13 / 마태복음 28:16-20

 

주일 아침, 예배당 앞자리는 제게 그날의 풍경이 열리는 자리입니다. 오랜 시간 교회에서 피아노·오르간 반주자 혹은 지휘자를 맡아 늘 앞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생성된 기억인데요. 주일의 풍경을 귀를 통해 기억하는 습관 같은 것이지요. 공간의 풍경은 시선의 흐름에 따라 눈길이 머무는 시간 순서대로 보이지만, 공간을 귀로 들을 때 오히려 수많은 풍경을 동시에 만날 수 있습니다. 예배당 앞자리에 앉아 눈을 감을 때 펼쳐지는 풍경에는 고요와 분주함이 함께 존재하지요.

아이들의 설렘 가득한 소리가 누군가의 읊조리는 기도 소리와 평행합니다. 일주일 만에 만난 반가움의 인사들 사이로 비탈 높은 계단을 올라온 가쁜 숨소리도 섞여 있고요. 한 주간의 고단함에 간신히 끌고 온 육체만 덩그러니 놓인 소리가 간절한 한숨과 나란히 존재합니다. 공간 안에서 우리의 소리는 동시에 존재하며 서로를 향해 회전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소리의 세계는 시각적인 세계와 같지 않아서, 내가 감각적으로 닫을 수 없는, 내 주변 전체를 통행하는 세계이며, 그 자체의 생명과 함께 동시에 지속하는 세계입니다. 나아가, 음향의 공간은 '계시'의 세계이기도 하지요.1)

푸가, 귀로 듣는 삼위일체

성부·성자·성령의 신비를 눈으로 보려는 노력을 뒤로하고, 귀로 들어 보려 한다면 어떨까요? 동시에 존재하며 서로의 위격을 해치지 않는, 영원하신 삼위일체의 존재를 '들음'으로 인식해 볼 수 있을까요? 가령, 세 가지 음이 화음으로 동시에 공명한다고 상상해 보는 겁니다. 세 음은 동일한 장소 안에서 함께 머물며, 어떤 음도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어디서나 들립니다. 하나의 소리가 다른 소리를 분열시키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향해 공헌하며, 서로의 관계를 통해 삼화음이 됩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3성부 인벤션, 신포니아'를 예로 들자면, 세 가지 독립된 주제가 시간차를 두고 등장해 서로 다른 높이에서 활력 있게 주제를 풀어 나갑니다. 밀도 있는 평행적 전개가 청자의 귀를 사로잡아 어디론가 이끌어 가며 엇갈리는 듯하지만, 또 다른 파트로 인해 수직적으로는 유기적인 직조를 만들어 냅니다. 3개의 다른 성부(parts)의 관계를 통해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음악을 듣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로버트 잰슨(Robert Jenson) 같은 학자는 하나님의 생명을 '푸가(Fugue, 모방 대위법적인 악곡 형식의 일종 또는 그 작법)'에 비유하기도 한답니다.

창조, 귀로 듣는 질서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은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라고 말한 '시인과촌장'의 노래 '풍경'은 아마도 창세기와 시편 8편을 염두하고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펼쳐지는 창조주인 삼위 하나님의 일하심은 혼돈에서 질서를 향해 나아갑니다. 성령을 통해 아들과 아버지와 함께 즐거워하는 공명의 세계는 서로 다른 우리를 포근히도 품으며 환대하는 공간입니다.

우리가 다양하지만 서로를 압도하지 않는 일체감으로 하나의 공동체가 되길 고대하고, 온전히 나로 존재하되 서로에게 공헌하면서 '화음'이 되어 '우리'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성령이 우리를 묶어 주시는 신비 덕분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태초부터 시작된 창조는 여전히 진행 중이어서 지금도 진동 중이며, 우리는 지극한 성령의 은총으로 서로를 향해 공명합니다.

절기, 귀로 듣는 계절

지난 주일은 삼위일체주일이자, '일반 절기(ordinary season)'가 시작되는 주일이었습니다. 교회력의 색깔은 앞으로 6개월 동안 '초록색'을 유지하고요. 거룩한 영을 통해 아름다운 성도의 연합을 꿈꾸며 '경건한 청음'도 꾸준히 자리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으셨던 풍경을, 이제는 우리도 귀로 들어 볼 차례입니다.

삼위일체주일을 보낸 금요일에 만나는 오늘의 곡은, 바흐의 '3성부 인벤션, 신포니아'입니다. 이 곡은 15개의 짧은 곡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바흐가 맏아들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의 피아노 손가락 연습을 위해 작곡한 곡으로 알려져 있어요. 당시 아들은 10살이었지요. 이 곡에는 아래와 같은 지침이 적혀 있어요.

"이 곡에 대한 충실한 지침: 아마추어 건반 연주자들과 열성적 교육을 원하는 자들에게 다음의 것을 보여 줄 것임.
 

두 선율로 깔끔하게 연주하는 법, 그리고 세 개의 선율을 정확하고도 만족스럽게 다루는 방법. 연주하는 동안 노래하는 방식에 도달할 것이며, 이것을 통해 작곡법을 익히게 될 것임."

10대로 진입하는 어린 아들의 음악교육을 위해 작곡한 이 곡은 아버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작품입니다. 이 곡을 통해 빌헬름은 훌륭한 연주자로 창조되어 갔을 거에요. 피아노 앞에 앉은 어린 소년의 모습이 상상이 되시나요? 우리도 한번 들어 봐야겠지요.

15세였던 임윤찬의 연주로, 바흐의 '3성부 인벤션, 신포니아' 15곡 전곡을 함께 들어 보시겠습니다. 임윤찬은 연주자로서 "즐거우나 흘러넘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게"라는 신라 시대 음악가 우륵의 말에서 가장 큰 영감을 얻는다고 하지요. 6월의 초여름, 싱그러운 것들이 만발하는 오늘, 푸가 기법으로 작곡된 이 곡을 소년의 소리로 들어 보시지요.

1) John Hull, Touching the Rock: An Experience of Blindness (London: SPCK, 1990),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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