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김은석 간사] 음악은 힘이 세다. 내면을 편안하게 이완시키기도 하고, 옹그리고 있던 희로애락의 감정을 격동하기도 한다. 잊어버린 기억과 느낌을 소환해 내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를 전혀 다른 공간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다양한 상황 속에서 저마다의 사연을 등에 업고, 음악은 우리의 내면에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낸다.

지난 3월 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를 탐방하면서 음악의 힘이 세다는 것을 다시 경험했다. 교회력과 예배 순서, 성경 본문을 따라 선곡된 곡들은 절묘하게 그 의미를 확장해 주고, 각각의 메시지에 깊고 넓게 머물도록 이끌었다. 예배 시작 전, 작은 공간을 채운 오르간 전주 소리 사이를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비집고 나왔을 때의 느낌이 아직 생생하다. 음악에 깃든 교회의 오랜 전통이 그 공간 안에서 아이들을 따뜻하게 보듬고 있는 듯했다. 온라인으로 중계한 사순절 아침 기도의 오프닝 곡으로 제이콥 컬리어의 'fix you'가 흘러나왔을 때는 묵상의 신비가 너울대는 기도의 자리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 교역자들과 대화하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김현지 교회음악가가 매주 금요일 교회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 '경건한 청음'이라는 이름으로 편지를 띄운다는 것이었다. '공동 성서 정과(Revised Common Lectionary)'를 따라 주어진 성서 본문과 설교 말씀에서 연상해 낸 곡을 소개하고 묵상의 편린을 공유하는 것이다. 김현지 교회음악가는 그렇게 소개된 음악을 같이 들으며 형성되는 공동체성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구독 욕구가 솟아올랐다. 부탁해서 몇 편을 받아 읽었고 소개해 준 곡들을 들었다. 음악이 묵상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특별한 경험을 이 교회 교우들만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현지 교회음악가에게 연재 요청을 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 특히 음악 애호가들의 묵상과 영성 생활에 유익한 콘텐츠가 될 것이라고 호소했다. 그는 숙고 끝에 연재를 수락했다.

<뉴스앤조이>는 6월 9일부터 매주 금요일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을 연재한다. 필자가 '공동 성서 정과'를 따라 길어 올린 묵상의 조각들과 그에 어울리는 음악을 짧은 에세이 형식으로 소개한다. 독자들이 음악을 청취하며 성경을 묵상할 수 있도록 음원 링크와 공동 성서 정과에 따른 본문을 함께 안내할 예정이다. 연재에 앞서 독자들에게 필자인 김현지 교회음악가에 대한 정보를 안내하고자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교회음악과 예배학을 함께 전공한 독특한 이력을 지닌 그가 어떤 사람인지, 교회와 음악, 예배에 대해 어떤 생각을 지녔는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경건한 청음'이란 이름으로 말씀 묵상과 음악 소개가 어우러진 에세이를 연재할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를 서면 인터뷰했다. 사진 제공 김현지
'경건한 청음'이란 이름으로 말씀 묵상과 음악 소개가 어우러진 에세이를 연재할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를 서면 인터뷰했다. 사진 제공 김현지

- 자기소개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김현지입니다. 교회음악과 예배학을 전공한 교회음악가이고, 현재 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에서 예배와 음악 노동자로 살고 있으며, 무의와 재의의 엄마이기도 합니다. 저는 경계에 살고 있고 경계에 놓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함부로 노크하고 자유롭게 넘나들지요. 누구에게는 명확한 존재이지만, 어느 누구에게는 없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말로 형용하는 데 한계를 느끼는 것을 환영합니다. 교회에서는 목사님·교육전도사님과 예배를 함께 기획하고, 교회력과 성서 정과에 맞게 찬송가와 묵상 음악을 선곡하고 연주합니다. 때에 따라 교우들과 함께 부를 노래를 짓기도 하고요. 절기별로 오르간 플레이리스트를 녹음하고 제작하는 일도 해요. 교회음악이 전통과 역사 속에서 어떻게 존재해 왔는지 탐구하고, 현대의 우리를 포용하는 교회음악이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고민합니다. 제가 속한 공동체가 음악과 함께 어떻게 공명하며 영성을 형성해 나가는지 새로이 모색해 나가는 중입니다.

- 교회음악(오르간)을 전공으로 택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음악을 사랑하게 된 이야기부터 시작해 주셔도 좋겠네요.

7살에 피아노를 배우면서 음악을 접하기 시작했어요. 새로 이사 간 동네에서 개척교회를 다니게 됐는데, 교회 사모님이 교회학교 예배 때 찬송가 반주를 해 달라고 권유했어요. 저는 8살이었고 겨우 다장조인 찬송가만 쳤던 기억이 나요. 그 후 어린이 성가대와 어른 성가대가 함께 연습하면서 주일예배 반주도 하게 됐어요. 부흥회 때 목사님께서 무반주로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하면 듣고 반주를 이어 나가야 하거나, 반주보가 없는 악보여서 화성을 만들어 쳐야 하는 경우를 만나기도 하고, 처음 접한 곡인데 특송을 준비하는 여선교회 집사님들의 노래에 맞춰 반주를 하는 등 흔한 동네 교회 반주자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어요.

고등학교 때 수학 좋아하는 이과생으로 살다가 공대에 입학했는데, 어떤 수업도 재밌지 않더라고요. 학교를 자퇴하고 부모님께 음악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뭐를 전공해야 음대에 갈 수 있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 당시 교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하고 있었는데, 대학에서 오르간을 더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뒤늦게 음대 입시 준비를 시작했어요. 그다음 해에 오르간 전공생이 됐는데, 입시 준비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대학에서 만난 제 동기들의 기량과 레파투아(repertoire)는 제가 따라갈 수 있는 것들이 아니더라고요.

저는 동기들보다 두 살이 많았는데, 돌아온 시간들을 되돌릴 순 없었지만 방향이 조준되었으니 주어진 시간을 양적으로 확보하고 질적으로 몰입하는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연습실에 가장 일찍 들어가 연습을 시작하고, 마지막 문 닫을 시간에 모든 오르간의 뚜껑을 닫은 후 불을 끄고 연습실을 나오는 나만의 '리추얼(ritual)'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게시판에 붙은 대부분의 오르간·합창 연주회는 혼자서라도 꼭 참석하려고 했어요. 개인 연습 시간과 연주회의 경험이 쌓이니 어느 순간부터 음악의 표현으로 드러나는 연주자의 성격이나 취향이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한 번도 대화한 적 없는 사람인데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보이기도 하고, 초견初見이 좋은 연주자인지 완성도에 집중하는 연주자인지 구별이 되기도 하고요. 그 연주자가 사랑하는 시대의 곡이 유별나게 돋보이거나, 활기에 가득 찬 노래를 그만의 방식으로 표현해 오히려 아픔이 역동적으로 배어 나오는 역설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제가 지금 음악을 '목격'했다고 표현하네요!).

음악을 통해 타인을 인식하고 느끼는 시간과 더불어, 음악이 제 자신을 다르게 비추고 있는 것 또한 알게 됐어요. 악기라는 물성을 지닌 것이 연주자의 영혼을 만나 해석과 표현을 거쳐 시간을 타고 제게 도착하는 과정에서 만난 저는, 이전의 제 정체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인 것 같았습니다. 성별과 성격마저도요. 때로는 음악이 시간과 공간을 굴절시켜 나를 다른 존재이게 했다가 다시 나로 돌아오게 하기도 했고, 나의 모든 것을 데리고 없어지기도 했습니다. 소리의 경험은 질감과 색감을 띠기도 했는데, 가령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프랑스 성당의 나무 의자 냄새가 난다거나,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머릿속을 가득 비추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 거죠. 순간의 느낌이지만 음악이 가져다주는 생생함은 저를 확장시켰어요. 전에 없던 자유가 느껴지고, 삶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해 줬던 것 같았습니다.

- 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에서 만났을 때 그런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나요. 교회음악을 전공하면서 교회의 전통과 역사, 예배학에 대한 공부를 자연스럽게 하게 됐고, 그게 참 재미있었다고 하셨거든요. 유학을 가서 예배학까지 공부하게 된 이유도 궁금합니다.

오르간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것이 방대했습니다. 먼저 그 음악이 놓인 시간과 공간의 함수관계를 그래프로 그려 놓고 다른 차원을 하나 더 그려 넣었습니다. 가령 바흐의 음악이 통과해 온 시간의 경로를 가로축에 놓고, 그가 살았던 독일의 특정한 지역들을 세로축에 놓는 거죠. 그리고 독일 루터교회의 신학이나 바로크 시대의 영향을 주고받은 음악의 경향들, 바흐 개인의 역사, 전례의 구성 등을 3차원으로 채워 넣었죠. 평면의 악보로부터 펼쳐지는 다차원의 공간과 시간은 과거의 것이었지만 실제적이고, 계속적이며, 개방적으로 다가왔어요. 이런 것들은 당장 연주를 위한 테크닉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적으로 연주에 기여할 정보이자 근원에 가까운 것이지요. 음악이 맞닿은 것을 캐내는 일은 어떤 탐험과도 같은 경험인데, 특히 오르간과 합창 음악은 절대적으로 '교회'라는 공간과 '예배'라는 목적 안에서 기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물론 시대를 타고 오르간과 합창 음악이 교회 밖을 넘실대기도 하고, 먼 항해를 떠나기도 합니다. 저는 그 항해 또한 매우 사랑해요!).

다시 돌아가서, 교회음악의 생태계는 철저히 전례의 구조 안팎에서 존재하는데, 이건 연습실이나 연주회장에서만 알 수 있는 게 아니었죠. 음악 도서관이 아닌 중앙 도서관으로 가는 날이 늘어나고, 예배학과 예배음악 수업이 흥미로워졌습니다. 그때부터 제게 흥분과 고독이 함께 찾아왔던 것 같습니다. 경로 이탈자인 저는 신학과 수업이나 예배학 수업을 듣기 위해 학부 졸업을 앞두고 채워야 할 학점을 넘치게 수강 신청을 하거나 청강을 하기도 했죠. 유학을 가려고 했을 때에도 교회음악과가 음대 소속이 아닌 신학대 안에 있는 학교를 선택하려고 했어요. 그러던 중 교회음악가이면서 예배학자인 교수님들이 실제로 미국에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희귀한 정체성을 가진 분들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제 고민의 경로가 틀리지 않았구나 위로를 얻게 됐죠.

1년 뒤 교회음악을 공부할 수 있는 신학대학교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았습니다. 2년의 석사과정은 제 전 존재가 해체돼 다시 조립되는 시간이었어요. 신학대 수업과 음대 수업을 동시에 소화해야 했는데, 특히 교회음악을 '성음악(Sacred Music)'이라는 더 넓은 개념 안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 예배학이 성서학·역사신학·조직신학·실천신학·미학 등과 긴밀한, 엄청나게 복잡한 학문인 것을 알고 처참하게 좌절했던 기억이 납니다. 무식했으니 용감했는데, 돌이키기에는 아득했죠.

학문으로 접한 예배학은 제게 치열함을 요구하는 동시에 감격을 선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두려운 것을 선택하는 제 성향이 교회음악에 이어 두번째 석사과정을 예배학으로 선택하게 했지요. 이 시점에서 음악을 계속하는 제 오래된 동료들과의 길은 더 벌어진 것 같았습니다. 한편 신학을 공부해 온 새로운 동무들에게 저는 낯선 존재였겠고요. 경계를 위태롭게 걷는 듯한 제 인생은 계속된 긴장에 놓였어요. 어딜가든 이방인인 것 같은 정체성이 심화되는 나날이 계속됐지만, 음악하는 사람의 눈으로 예배를 바라보는 것은 마치 다른 눈을 갖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신학 안에 언어가 포집할 수 없는 규모와 영역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연주자로서 혹은 교회음악 전공자로서 향유할 수 있는 어떤 부분이 풍요를 가져다줬거든요.

그리고 보스톤 지역 내에 있는 교회들을 탐방하며 다양한 교단의 다채로운 스타일의 예배를 통해 책에서 쓰인 것들이 실제로 구현되는 현장을 만나고, 신학이 예술을 통해 역동하는 순간이나 예술이 말씀으로 회귀하는 진동을 온몸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음악가는 예배 현장 안에 철저히 머물며 공동체와 함께 살아갈 때 완성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 생각은 학교 채플과 지역 교회에서 교회음악가로 활동한 경험을 거치며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김현지 교회음악가는 "언어가 포집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염두에 두고 연재를 진행할 거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김현지 교회음악가는 "언어가 포집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염두에 두고 연재를 진행할 거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 교회 홈페이지에 소개된 프로필 내용 중에 "공동체가 일궈 나가는 예배는 무엇이며 예배의 법칙이 일상의 법칙을 어떻게 만드는가에 대한 오래된 질문을 품고 교회음악가로 살아간다"는 부분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찾으셨는지요?

과거를 돌아볼 때마다 자연스럽게 저를 둘러싼 공동체를 떠올리게 됩니다. 제가 입어 왔던 성가대의 가운 색깔들이 바뀔 때마다 제가 머물렀던 공동체들도 바뀌었네요. 함께 노래하는 공동체는 동시에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였고, 함께 밥을 먹는 공동체였어요. 그건 제가 피아노 반주자였던 시절부터, 오르간 반주자, 지휘자, 음악감독의 시절 모두를 회상해 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지요. 교회음악가란 단순히 기능적으로 예배를 기획하며 음악을 선곡하여 연주하는 역할을 넘어, 그를 둘러싼 사람들과 공동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측면으로 봤을 때, 예배는 단지 교회음악가의 특정한 역할이 재생되는 고립된 시간이 아니지요. 한국의 많은 교회가 지휘자와 반주자를 청빙하는 광고를 낼 때 이 지점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음악가들은 성가대 연습 시간과 예배 시간에 퍼포먼스를 해내면 그만인 존재가 아닙니다. 같은 시대를 통과하며 특정한 시공간에서 만난 나그네 같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예배하는 공동체가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며 삶을 살아갈 때, 그 마음들을 담을 장소를 마련해 주는 공간 예술가들이지요. 노래의 공간, 기도의 공간은 음악가들의 조형으로 창조된 장소가 아니었던가요? 그리고 그 공간은 공동체가 함께 향유하는 곳이고 신의 터전이기도 하지요. 예배 안에서 마련된 이 무형의 공간은 예배가 끝났다고 해서 닫히거나 소멸되지 않습니다. 소리가 물체를 반영하는 진동이듯 말씀의 소리가 마음을 만나 진동하는 작용이 힘겨운 월요일에도, 고단한 목요일 오후에도 여전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돼요.

함께 부른 시편의 찬트가 입에서 흘러나오거나, 따라할 수는 없지만 성가대가 불렀던 송영의 기억을 품고 그 공간으로 진입하는 경험을 부엌 한편에서 혹은 사무실 복도에서 하게 되잖아요. 그런 식으로 일상 속에서 문득 만나는 예배의 진동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학교 채플과 지역 교회의 예배기획자·음악감독으로 보낸 시간은 이 진동하는 작용이 일시적이지 않고 지속된다는 것을 거듭 상기시켜 줬습니다.

공동체의 숨이 담긴 노래가 때로는 아이들의 노래로, 때로는 가사 없는 기악 음악의 형태로 한 주 동안 우리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부단히 탐구하고 모색합니다. 기억의 재생은 결국 우리가 감각한 경로를 통해 이루어지니까요. 한 주 동안 주어진 말씀과 교회력의 흐름을 따라 목회자와 교회음악가는 치밀한 기획과 토의를 거쳐 예배의 형태와 내용을 설정하고 공동체는 그 안에 운행하시는 성령을 함께 경험합니다. 그러니 교회음악가는 목회자와 긴밀한 협력 관계에 있고, 교회 공동체와는 삶의 시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동반자이자 돌봄의 영역에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찬송가를 고르는 행위 하나에도 고려해야 할 수십 가지의 이유가 존재하니까요. 

언어적 표상만으로는 예배의 감각을 다 설명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신비를 담기에도 부족하지요. 음악은 회중의 예배 행위와 기도 사이에 결합해 있고, 그 사이에서 하나님은 음악을 통해 선포되고 계시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어떻게 운행하실까요? 우리는 분명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주님이 계시되는 것을 느끼지 않나요? 그렇다면 예배 안의 예술들을 다만 '예배를 돕는 행위 정도'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면밀히 바라보면, 음악은 예배하는 이들이 경배하는 존재가 담기는 곳, 하나님이 계시되고 머무는 공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에는 창조적인 언어의 형태로서 고유한 음악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공동체의 다양한 맥락을 고려해 다각적으로 교회음악을 활용·발굴하고 실행해야 하고요. 그리고 교회음악가는 신학과 음악이 직조되는 예배의 시간과 신앙 공동체의 삶까지 흘러 들어가는 영성의 수로 안에서 기민한 태도로 그것들을 다루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그 답을 찾아가는 길을 여전히 걷고 있는 중입니다.

- '경건한 청음'은 원래 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 교우들에게 2년가량 진행해 오신 작업의 이름이잖아요. 처음 시작하게 된 배경도 궁금하고 어떤 피드백을 받으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는 '공동 성서 정과'를 따르며 매주 성찬이 있는 예배를 모든 세대가 함께 드리는 공동체인데요. 교회음악가라는 호칭이 한국에서는 낯선 말이잖아요. 교회 설립 초기에는 교회음악가가 어떤 존재인지 경험이 많지 않은 교우분들을 위해 여러 장치를 준비했어요. 예를 들어 오르간 전주와 후주가 주보의 예배 순서에 들어 있는데, 각각 예배에서 어떤 역할을 예배에서 담당하는지 설명하는 영상을 만들기도 했죠. 그러다 보니 교회음악에 대한 경험이 한국교회 회중들에게는 빈약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저희 교회의 유일한 악기는 오르간이고, 찬양팀이나 성가대가 없어요. 어느 날 목사님이 가사 없는 기악의 형태로 음악을 연주하는데 음악 제목만 알리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 같으니 선곡 배경이나 음악에 대한 설명을 알리면 좋겠다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매주 성서 정과에 따라 주어진 본문 4개를 보며, 말씀이 드러내지만 드러내지 못하는 정서나 교회력의 분위기를 포착하는 데 음악이 도울 수 있는 지점은 무엇일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최대한 일상적 언어와 누구도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해 글을 써 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한 페이지 반 정도의 글을 성서 말씀과 나란히 프린트 해서 추천하는 음악의 QR 코드와 함께 주보에 넣어 드렸던 게 글로 음악을 소개한 시작점이었어요.

그러다가 코로나를 맞이하게 됐고, 저희 교회는 온라인 예배 대신 '노마드 예배'라는 집에서 드리는 가정 예배 형태의 예배를 채택하게 됩니다. 예배당에서 드렸던 예배는 일상의 공간인 집으로 옮겨졌고, 교회에서 들었던 오르간 음악은 휴대폰으로 재생되고, 오롯이 가족들만의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게 됐지요. 말씀을 읽고 난 뒤 묵상의 공간이 음악을 통해 펼쳐지는 것을 염두에 두며, 그 음악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새롭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오르간 음악을 넘어서 VOCES8 합창단의 현대 합창 음악을 들을 수도 있고, 헤리티지나 먼쓸리쌈(Monthly Psalms)의 곡도 들을 수 있어 좋더라고요. 

다시 현장 예배로 돌아오게 된 후, 다양한 음악을 경청하면서 충분히 경건한 시간을 누렸던 경험을 계속하고 싶어 금요일마다 교우님들께 '경건한 청음'이라는 음악 묵상 편지를 카카오톡으로 보내 드렸어요. 성서 정과 본문과 주일에 들은 설교가 상기될 수 있는 음악, 혹은 조금은 거리가 있더라도 본문과 만날 수 있는 묵상의 공간을 마련해 드리고, 금요일 저녁에 각자 다른 장소에서 함께 머물러 보고 싶었습니다. 저만 알기 아까운 교회음악을 소개하며 링크를 전해 드리기도 하지만, 세속적인 장르의 음악도 충분히 경건함의 원점으로 우리를 데려갈 수 있다는 확신 아래 자유롭게 음악을 선곡하고 있습니다. 교우님들이 간혹 제게 메시지를 주시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억에 남네요.

"경건함의 경계를 질문하고 흐리고 새롭게 하는 선곡들입니다."

"제게 기악 음악은 공간입니다. 기도할 때 의자나 방석이 기도자를 골방으로 인도하듯이 가사를 담지 않았지만 그 안을 채우고 있는 무수한 울림들은 다채롭고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음악만으로 예배로 초대되고 기도의 공간을 느끼며 세상으로 돌아갈 때 갈채를 보내 주는 듯한 이 특별한 경험을 이제는 몸이 기억한 듯합니다."

- 추천 음악 선곡은 어떻게 하세요? 말씀하신 것처럼 추천 곡 중에는 교회 음악 말고도 일반 클래식과 대중음악 등이 다채롭게 등장하는데요. 교회음악가님의 음악 취향도 궁금해지네요. 평소에 어떤 음악 많이 들으세요?

'경로 이탈자'로서의 삶이 제 음악적 경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요. 클래식 장르 안에서 교회음악을 전문적으로 공부했지만, 저를 키운 것은 8할이 한국의 1990년대 대중음악이었어요. 저도 어쩔수 없는 시대의 자식인지라 10대 때 <수학의 정석>을 마구 풀며 켜 놓았던 'FM 음악 도시'나 '별이 빛나는 밤에' 등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들은 음악들이 제 정서를 형성했어요. 유희열을 듣다 보니 펫 메스니와 사카모토 류이치를 알게 됐고, 윤상을 듣다 보니 브라질 음악이나 아르헨티나 음악도 듣게 됐어요. 오르간 음악이 코랄과 챈트로부터 진화를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다채로운 장르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 만나는 즉흥 연주 속에는 마치 그림에서 추상화 같은 영역이 보인답니다. 그 지점에 있는 음악들도 꽤나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아르보 패르트 같은 미니멀리즘 음악도 좋아해요. 그런데 제 최근 플레이 리스트에는 황소윤과 에이피 알케미(AP Alchemy)가 들어 있네요!

경로 이탈자로서의 삶은 김현지 교회음악가의 음악적 경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교회음악 전공자라고 해서 클래식만 듣지는 않는다. 사진 제공 김현지
경로 이탈자로서의 삶은 김현지 교회음악가의 음악적 경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교회음악 전공자라고 해서 클래식만 듣지는 않는다. 사진 제공 김현지

- 앞으로 <뉴스앤조이> 독자들과 주 1회 만나는 아주 긴 여정이 시작될 텐데요. 연재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앞으로 연재할 '경건한 청음'은 성서 본문을 강화시킨다기보다는 전통적인 신학 탐구의 확실성을 때로는 리듬감 있게, 때로는 불안정하게 만들며 언어가 포집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염두에 두며 진행하려고 합니다. 음악은 언어가 드러내지 못하는 영역을 집요하게 조명하는 예술인데, 이 음악을 다시 언어의 형태로 재건하는 것에 저는 큰 부담을 느끼기도 한답니다. 그러나 독자 여러분이 제 글을 통해 말씀과 음악 사이에서 생성되는 자유로운 빛의 반영과 그림자를 만나기를 바라 봅니다. 빛의 굴절로 인해 예상치 못한 골목에서 무지개를 만나기도 하고, 끝나지 않을 거울의 반사 같은 영원을 경험할지도 모르지요. 사실 제가 명명하는 것들은 사소한 것일 테고, 경청하는 이들에게 찾아오는 신비하고 새로운 공명이 저마다 독특하게 일어나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다양한 음악 안에 숨어 존재하는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거룩한 형상이 우리를 형성하는' 아름다운 사건이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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