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 자기가 받은 지혜를 따라서 여러분에게 편지한 바 (중략) 그 가운데는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어서 (하략)" (벧후 3:15b~16a, 새번역)

바울서신은 익숙합니다. 종교개혁 신학의 근간이지요. 신약성경 27권 중 13권이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됐습니다. 우리가 즐겨 읽고, 암송할 수 있으며, 설교 때마다 자주 듣는 본문 대다수가 바울서신에 속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쉬운 것은 아닙니다.

바울서신은 어렵습니다(오죽하면 베드로마저 바울의 편지가 어렵다고 했을까요?). 바울의 편지에는 무척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기록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신학에 근거해 ('행함'이 아닌) '믿음'을 읽고자 할 때마다, 우리는 행함(순종)을 권면하는 단락 또한 발견합니다. 학자들도 바울서신을 두고 오랫동안 논쟁해 왔습니다. 바울서신이 유대적인지 헬라적인지, 바울신학의 핵심이 '칭의'인지 '참여'인지, 바울의 구원론이 구약부터 진행된 (연속적인) '구원사'에 기반하고 있는지 (비연속적인) '급진적 묵시'에 기반하고 있는지 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바울서신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오컴의 면도날을 들이대고서 핵심 메시지만 도려내 보면 어떨까요? 한때 "바울이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내용"(89쪽)을 중심으로 바울서신을 재구성해서 읽으려는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핵심 내용(Sache)만 추출하려 했던 '내용 비평(Sachkritik)'이 꼭 그러했지요. 그들은 핵심 내용을 제외한 나머지는 시대적·문화적 환경에 묶여 있는 저자의 표현 방식을 독자들이 오해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논쟁적인 신약학자 N. T. 라이트(톰 라이트)는 전혀 다른 방법을 시도합니다. 바울서신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기록을 고스란히 존중하며 통합적으로 읽는 방법을 궁구하기 위해, 바울서신을 둘러싼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요. <바울과 그 해석자들>(IVP)은 그러한 고민의 흔적을 담은 결과물입니다. 이 책에는 그가 다양한 (최근) 해석자들의 연구 결과물을 읽고 비평한 내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바울과 그 해석자들 - 현대 바울 연구의 주요 논의> / N. T. 라이트 지음 / 최현만 옮김 / IVP 펴냄 / 702쪽 / 4만 2000원 
<바울과 그 해석자들 - 현대 바울 연구의 주요 논의> / N. T. 라이트 지음 / 최현만 옮김 / IVP 펴냄 / 702쪽 / 4만 2000원 
통찰은 뛰어납니다만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바울과 그 해석자들>은 루터와 칼뱅의 간극을 다루고, 슈바이처와 샌더스를 인용하고, 베커와 마틴과 논쟁하며, 믹스와 호렐을 넘어서, 현대 철학 혹은 정치신학 분야에 바울을 해석한 학자들을 차례대로 소개하고 비평합니다. 톰 라이트가 대화를 나눈 학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당대 신학적 문제를 바탕으로 바울서신을 읽어 내려간 연구자들입니다. 이들의 통찰은 반짝반짝 빛나지만, 정작 1세기 당시 바울서신의 본문이 그렇게 말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책의 부제인) '현대 바울 연구'에 해당하는 인물은 아니지만, 마르틴 루터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그는 갈라디아서를 종교개혁 당시 "중세 후기의 가톨릭주의에 만연했던 율법주의에 대항한 루터 자신의 투쟁"(80쪽)으로 읽었습니다.

루터는 갈라디아서 본문을 꼼꼼하게 석의하지도 않았고, 갈라디아서가 기록된 당시 역사적 정황을 면밀하게 재구성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서 행한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81쪽)이라는 신학적 주장에 근거해 읽었지요. 저명한 루터파 신약학자 루돌프 불트만 또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울서신에 나타난 '믿음'과 '행함'의 간극을 (믿음으로 표현된)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는 '순종'"(107쪽)과 (행함으로 표현된) "이기적인 의지를 내세우는 '공로'"(107쪽)로 해석하며, 바울을 실존주의 신앙을 설파한 사도로 여겼습니다.

로마서를 두 부분(1~4장, 5~8장)으로 분류해 '묵시적 구원'의 메시지로 읽어 내는 더글러스 캠벨도, 바울서신을 정치신학적으로 읽는 존 밀뱅크도 마찬가지입니다. 톰 라이트는 더글러스 캠벨이 제시한 묵시의 아이디어와 존 밀뱅크가 읽은 정치신학적 아이디어가 주는 통찰을 인정하면서도, 1세기 당시 본문이 의미하던 구체적 맥락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매섭게 비판합니다.

마르틴 루터에서부터 존 밀뱅크까지 다양한 학자가 남긴 메시지는, 무척 날카롭고 인상적이지만 지나치게 현대적입니다. 톰 라이트는 이들의 신학(메시지)이 본문 및 역사적 정황과 동떨어져 있다고 한결같이 지적합니다. 이들은 본인이 속한 시대적 맥락 속에서 신학(메시지)을 뽑아내는 데 급급합니다. 따라서 바울서신과 1세기 당시 바울의 본래 메시지는 이들의 인상적인 신학(메시지)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 연구와 성실한 주해가 곁들여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는 바울이 남긴 메시지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뉴스앤조이 여운송
우리는 바울이 남긴 메시지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뉴스앤조이 여운송
역사를 재구성해서 들여다보니
본문이 점점 더 명확해지는 것 같아요!

톰 라이트가 대화를 나누는 두 번째 부류는, 바울과 바울서신이 위치한 1세기 유대 사회의 맥락에 천착한 이들입니다. 이 중에서 톰 라이트가 손꼽는 선구자는 알베르트 슈바이처입니다. 슈바이처는 바울서신을 꼼꼼하게 분석하고서 바울이 '종말론에 기반한 유대인'이며, 바울서신의 핵심 사상은 ('칭의'가 아니라) '참여'라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샌더스, 브레데, 캠벨에 이르기까지 바울 해석사를 둘러싼 다양한 논쟁은 사실상 슈바이처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반향에 가깝습니다. 톰 라이트가 바울서신 연구를 하는 데 영향을 미친 중요한 학자 두 명이 있습니다.

첫 번째 학자는 E. P. 샌더스입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진영에서는 복음을 율법에 반대하는 주장으로 읽었고, 유대교는 공포와 교만을 야기하는 율법주의 종교라고 이해해 왔습니다. 하지만 샌더스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는 (기독교의 탄생 배경인)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오해를 교정해 줬습니다. 유대교는 (기독교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은혜의 종교이며, 율법 또한 단순히 유대인들이 지켜야 할 법률 혹은 규범이 아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구원하신 이야기'라는 사실을 밝혀 줬지요.

두 번째 학자는 웨인 믹스입니다. 톰 라이트는 웨인 믹스의 저서 <1세기 기독교와 도시 문화>를 두고 "지난 세대 영어권 바울학계에서 가장 희망적인 징조 가운데 하나"(495쪽)라고 평가합니다. 믹스는 실제 교회 공동체와 그리스도인의 사회경제적 정황을 면밀하게 연구했습니다. 특별히 믹스는 그의 저서 6장에서 로마 세계 안에 구체적으로 형성된 교회 공동체의 역사 기저에 있는 신념들을 재구성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교회 공동체가 로마 세계 속에서 독보적이고 유일한 집단이었고, 그 기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수정된 유일신론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바울의 복음이 1세기 로마제국 내 고대 도시 속에서 구체적·역사적 흔적으로 열매 맺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신학은 신학(메시지)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각각의 그리스도인 및 교회 공동체라는 역사적 실재로 존재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편지 또한 구체적인 사람들 및 공동체 속에서 구체적인 열매를 맺었던 (혹은 맺는 데 실패했던) 과정 속에서 남겨진 역사적 산물로 읽어야 마땅하겠습니다.

E. P. 샌더스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사진 왼쪽)와 웨인 믹스의 <1세기 기독교와 도시 문화>(사진 오른쪽).
E. P. 샌더스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사진 왼쪽)와 웨인 믹스의 <1세기 기독교와 도시 문화>(사진 오른쪽).
서두르지 않고 끈질기게
읽어 가는 것 외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계몽주의 이후로 현대 교회는 '역사를 선택할 것인가, 신학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역사와 신학은 서로 충돌한다고 믿어 왔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1세기 유대 사회 속에서 역사적 예수의 민낯을 발견하게 된다면, 신앙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신앙을 붙잡기 위해서는, 1세기 유대 사회를 접근 불가능한 구역으로 보호하고 역사적 탐구를 중단해야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반면 톰 라이트는 "화려하진 않지만 끈질기고 자세하며 허세를 부리지 않는 역사 작업"(541쪽)을 하다 보면, 신학이 구체적으로 열매 맺은 역사적 결과물을 만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가 첫 번째 부류의 학자들을 비판한 이유는, 아무리 뛰어나고 의미 있는 통찰을 제시하는 신학(메시지)을 내놓는다 한들 이는 1세기 역사적 정황과 동떨어져 있는 현대적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두 번째 부류 학자들의 작업을 (다소 부족할지라도) 환영하는 이유는, 차근차근 끈질기게 쌓아 온 역사적 연구의 결과물이 언젠가는 바울의 신학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그 해석자들>은 톰 라이트의 재치와 솔직함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가끔 그가 동료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비판할 때면, (나를 비판하는 것만 같아) 식은땀이 나기도 하고 (나의 정적을 비판하는 것만 같아) 웃음보가 터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빛을 발하는 것은 바울서신을 대하는 그의 진지한 태도입니다. 톰 라이트는 바울서신 내에서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만날 때 '단장취의斷章取義'하는 간편한 방법을 택하지 않습니다.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온 바울서신을 최대한 존중하며, 복합적이고도 다층적인 본문을 함께 읽는 방법을 궁구합니다.

동료 학자들의 견해를 최대한 정리하고 논평하는 것 또한 그의 진지한 태도에서 비롯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조차 어렵다고 말한 바울서신을 읽는 데 왕도가 있을까요? 아마도 톰 라이트는 최선을 다해 1세기 역사를 살피고 본문을 주해하며 서서히 바울의 메시지를 발굴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톰 라이트의 주관이 뚜렷하게 담긴 논평과 소개를 통해, 바울신학의 지형도와 함께 성경 본문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를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전략) 가치 있는 본문을 읽는 독자라면 모두 그 내용과 무관하게 사중의 작업, 즉 역사, 신학, 주해, 적용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이 네 개의 줄은 현악사중주의 네 파트처럼 서로 얽혀 있다. 각 부분을 따로 연구할 수 있고, 각 파트를 따로 작성할 수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음악을 들으려면 반드시 이 넷을 한꺼번에 연주해야 한다." (41쪽)

홍동우 / 설교도 잘하고 싶고 책도 잘 읽고 싶은 욕심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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