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정제기의 칸트와 희망의 신학 - 우리가 희망해도 좋을 것들에 관하여' 연재를 종료합니다. 성원해 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주

 

우리는 이번 연재를 통해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종교론)>에서 칸트의 희망철학이 어떻게 등장하는지 살펴봤습니다. 칸트의 희망철학은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Was darf ich hoffen)"라는 물음을 중심으로, 칸트가 자신의 주요 저서에서 이 문제에 어떻게 답변하는지 각기 다른 문맥에서 추적함으로써 드러납니다.

사실, 희망철학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판단력비판>에 등장하는 도덕적 목적론의 문맥들과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과 같은 역사철학적 저술들까지 함께 다뤄야 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칸트 희망철학의 논의가 도덕적 개인의 차원에서 윤리적 공동체의 차원으로 어떻게 이행되는지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논의는 지면의 한계와, 어려운 논의를 더 이상 쉽게 풀어내지 못하는 제 능력의 한계로 인해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합니다.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지금까지 살펴본 칸트 희망철학의 얼개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통찰은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칸트의 희망철학은 항상 '최고선(das höchste Gut)'과 관련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즉, 칸트의 주요 저서에서는 논의의 맥락을 조금씩 달리하더라도 항상 '최고선 - 이율배반 - 희망'이라는 도식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칸트에게 최고선은 항상 '도덕성'과 '행복'의 결합으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도덕적 인과성에 의해 지배되는 지성적이며 내세적인 도덕 세계를 '최고선'이라고 불렀습니다.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도덕적 개인의 차원, 즉 한 인격 내에서 도덕성과 행복의 결합으로서 최고선을 논의했지요. <종교론>에서는 인류에게 결코 절멸할 수 없는 것으로 주어진 '근본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윤리적 공동체로서 '교회'를 최고선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최고선 개념은 문맥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제시될 뿐 '도덕성과 행복의 결합'이라는 점에서는 늘 동일한 형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최고선과 희망의 사유
독단적 주장과 거짓말을 넘어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칸트는 결코 최고선이 실제로 실현 가능하다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지상에서 최고선을 실제로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칸트는 그것이 인간 이성의 인식론적 한계를 아득히 넘어서는 독단적인(dogmatisch) 주장이거나, 일종의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고 일갈할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결코 최고선을 온전히 실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최고선에 대하여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마치 언젠가는 그것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희망'하는 것뿐입니다.

지난 다섯 번째 글에서 우리는 스토아와 에피쿠로스의 입장을 아주 간략하게 살펴봤습니다. 이들의 입장을 다시금 환기해 볼까요? 스토아철학자들은 우리가 외부의 어떠한 무차별한(indifferent) 것들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고 평정심을 이룰 수 있는 부동심, 즉 '아파테이아(apatheia)'의 경지를 최고선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지극한 도덕적 선, 즉 '덕'을 온전히 갖출 때 이를 수 있는 경지입니다. 스토아철학자들은 사람들이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덕을 갖출 때, 비로소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에피쿠로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에피쿠로스는 매우 금욕적인 태도를 강조한 쾌락주의자였습니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육체의 정욕을 쫓아서 생기는 쾌락은 저급한 쾌락이며, 우리 몸에 고통을 주는 쾌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에피쿠로스는 어떤 쾌락이 상위의 쾌락이라고 말할까요?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 즉 '무고통'의 상태에 이르게 될 때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아타락시아(ataraxia)'의 정체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아타락시아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도덕적 선, 즉 '덕'을 갖추고 금욕적으로 살아가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서 스토아와 에피쿠로스는 둘 다 덕과 행복을 분리할 수 없는 '분석적인' 관계로 보고, 서로가 서로를 필연적으로 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칸트는 덕과 행복이 결코 분석적인 관계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도덕적으로 행동한다고 한들, 그에 상응하는 행복을 필연적으로 보장해 줄 수 없는 한계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칸트는 경험적인 것에 불과한 행복은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아프리오리(a priori)'한 도덕성의 원칙을 정초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칸트의 입장에서는, "네가 만약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행복이 필연적으로 보장될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스토아적 입장도, "네가 만약 진정으로 지고한 행복을 추구한다면 자연히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에피쿠로스적 입장도, 모두 인간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독단적인 주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다시금 '희망(Hoffnung)'을 이야기합니다. 칸트가 말하는 희망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칸트가 말하는 '희망'은 단순히 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말하는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불가능한 것을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허무주의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칸트는 한계를 지닌 우리가 결코 최고선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마치 언젠가는 그 최고선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희망을 강조합니다.

도덕에서 종교로
희망의 철학이자 희망의 신학

바로 이 지점에서 칸트의 최고선 이론은 필연적으로 '종교'로 이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종교가 제시된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첫 번째 글에서 살펴봤듯이, 칸트는 기존에 전개된 모든 종류의 '신 존재 증명'이 전면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며 그것을 폐기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특수한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경험적 대상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입니다. 시공간을 넘어서는 초월적 존재자인 하나님에 대해서는 존재한다는 증명도,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증명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유한한 인간이 지닌 유한한 이성으로서는 절대자·초월자 하나님을 결코 인식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칸트는 결코 실현할 수 없는 완전한 도덕적 이상을 추구하며 희망하는 일을 멈추지 않기 위해, 결코 증명이 불가능하다던 '하나님의 현존'을 다시금 '요청(Postulat)'하기 시작합니다.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최고선을 실현할 능력이 없고, 악이 창궐하는 이 세상에서 최고선이 실현되는 것은 정말 요원하기만 하지만, 도덕법칙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너는 최고선을 실현해야만 한다"고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도덕법칙의 명령에 직면할 때, 우리는 최고선을 실현하는 것이 무척 힘들고 고되지만 그럼에도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인식합니다.

우리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최고선의 실현을 위해 분투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도덕법칙의 명령 앞에서 이러한 최고선이 언젠가 반드시 실현돼야만 한다는 당위를 인식합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최고선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즉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전능한 도덕적 신인 하나님이 현존하셔야만 한다는 당위를 인식합니다.

객관적·이론적 차원에서는 결코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지만, 주관적·실천적 영역에서는 마치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처럼 여기는 믿음을 요청하는 것. 이것이 바로 유한한 도덕적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이성 신앙'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유한성을 그대로 긍정하면서도, 무한한 도덕성의 이상을 향해 무한히 도덕적으로 전진하며 기투할 것을 결단하는 도덕적 인간의 태도가 칸트 희망철학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의미들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칸트의 희망철학은 완전히 철학으로도, 또 완전히 신학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독특한 지점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저는 칸트의 희망철학을 '희망의 신학(Theologie der Hoffnung)'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존 학계는 칸트의 희망철학이 지닌 이러한 독특한 특성에 충분히 주목하지 않는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철학자들은 보통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신에 대한 담론을 끌어오느냐. 그것은 중세적 담론으로 되돌아가는 행태 아니냐. 오히려 칸트철학에서 종교적 요소를 모조리 제거하고 배제해야만, 비로소 더욱 현대적인 의미에서 엄밀한 '비판철학(kritische Philosophie)'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실제 영미권 칸트 연구에서는 최고선과 도덕신학이라는 칸트의 종교적 사유를 배제하려는 연구사적 흐름이 존재해 왔습니다.

한편으로는 신학자들 역시 칸트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철학자" 혹은 "성경의 가르침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철학자"라고 비판해 오곤 했습니다.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신학자일수록 그 경향은 더 강해졌지요. 국내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최근에는 감리교신학대학교1)나 장로회신학대학교2), 서울신학대학교3) 등 복음주의권 신학자들이 칸트신학 연구를 어느 정도 긍정적인 측면에서 개진해 주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권 신학자들은 여전히 칸트철학을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4) 아마 칸트가 19세기 자유주의신학자였던 슐라이어마허나 리츨에게 영항을 끼쳤다는 점에서, 또 개혁주의신학자들이 자유주의신학에 무척이나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유한과 무한 사이에 선 칸트적 인간
이미와 아직 사이에 선 그리스도인

그러나 제 생각에 칸트의 희망철학 혹은 희망의 신학은 '유한'과 '무한'이 어떻게 관계 맺는지 분명하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분명합니다.

철학사에서 유한과 무한이 어떻게 관계 맺는지 설명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무한을 '완전하고 우등한 것'으로, 유한을 '불완전하고 열등한 것'으로 상정하는 방식입니다. 이데아·일자·신 같은 완전한 무한자를 상정하고, 유한자는 무한자에 의해 부차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설명하지요. 오직 이데아만이 완전하며 현상계에 존재하는 사물들은 단지 이데아의 모방에 불과하다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이나 오직 무한한 하나님만이 완전하며 유한한 피조물은 단지 신에 의존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는 '중세철학'과 대부분의 '기독교신학'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무한자의 가치를 지나치게 절대화함으로써 유한자가 지닌 독특한 의미들을 무시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무한성을 완전히 거세하고, 유한성만을 절대화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니체 철학이나, 대부분의 물리주의(physicalism)가 여기에 해당하지요(물론 니체는 결코 물리주의자가 아닙니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선포하면서, 더 이상 초월적인 신이나 도덕 혹은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겨 온 모든 것을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니체에 따르면, 절대적인 가치는 어디에도 없으나, 우리는 지금껏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처럼 속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어떤 것에도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니체는 이러한 허무주의를 어떻게 극복할까요?

니체는 절대적인 가치란 존재하지 않으며, 또 어떠한 것에도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하면서,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긍정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니체는 이것을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것의 가치 없음을 긍정하면서,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각자가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단하는 것.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Übermensch)'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무한성을 성찰하지 못하고 단지 유한성에만 머물러 있을 뿐인 위버멘쉬적 인간은, 결국 형이상학적 반성을 수행하지 못하는 통속적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칸트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칸트는 이러한 철학사의 흐름과는 다른 방식으로 유한과 무한의 관계 맺음을 보여 줍니다. 칸트의 도덕적 인간은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희망합니다. 그 자신의 유한성 때문에 결코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희망하는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작업을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결코 도달할 수도, 실현할 수도 없는 것을 희망하는 주체는 어떠한 고통이 닥쳐와도 이 희망을 포기하려 하지 않겠지요. 희망에 불과한 도덕적 이상을 향해 오롯이 나아가는 인간이야말로, 칸트가 그린 유한한 도덕적 주체의 숭고한 모습입니다.

칸트적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그 자체로 인정하면서도, 그 유한성의 토대 위에서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최고선의 이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마치 언젠가는 완성에 도달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서, 최고선의 이상을 향해 유한한 자신을 끊임없이 내던집니다. 이처럼 도달할 수 없는 완전성을 스스로 희망의 대상으로 정립하는 인간, 무한성으로도 유한성으로도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무한성과 유한성 사이에 서 있는 인간이 칸트가 제시하는 인간상입니다. 스스로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탈한계를 지향하는 도덕적 인간은 자신이 희망하는 이상향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고독하지만 숭고한 인간입니다.

이러한 칸트적 인간의 모습은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임했지만, 결코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나라입니다. 죄인 된 본성을 가진 유한한 우리 노력으로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서 온전히 실현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리 세대를 거듭해 노력하고 분투하더라도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실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나라가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므로 이를 포기하고 세상의 원리에 따라 살아야 할까요? 이 역시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면서도 불가능성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 즉 하나님나라에 대한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절망적인 현실에도 다시금 하나님나라를 추구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내던지기로 결단합니다. 저는 이러한 성도의 모습이 칸트적 인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이해합니다.(끝)

1) 김정숙, '칸트의 도덕신학에서의 윤리적 구원론: 근본악과 회심 그리고 은총', <한국조직신학논총>, 제 37집, 2013.
2) 안윤기, '칸트철학은 반(反)종교적인가? – 최고선을 매개로 관계하는 윤리와 종교', <장신논단>, 제 49집, 2017; 안윤기, '칸트에게서 악의 문제와 기독교의 원죄론', <칸트연구>, 제 42집, 2018.
3) 박영식, '칸트의 신정론과 신학', <한국기독교신학논총>, 제 58집, 2008.
4) 이상원, '내재적 주관성에 함몰된 현대사조', <개혁주의 이론과 실천>, 제 23집, 2022.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