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과 다음 글에서 우리는 '악'의 문제를 다뤄 보려고 합니다. 악의 문제는 칸트 윤리학·종교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난제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악의 문제는 '무한한 도덕적 전진(endless progress toward morality)'의 가능성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입니다.

직전 글에서 우리는 최고선의 실현 가능성을 위해 '영혼 불멸'과 '하나님의 현존'을 요청하는 칸트의 논의를 살펴봤습니다. 칸트가 영혼 불멸을 요청하는 것은, 결국 도덕적 개인이 도덕적으로 무한히 전진할 수 있다는, 더 나아가 인류가 도덕적으로 진보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당대 계몽주의자들의 낙관론적 태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실천이성비판>을 저술할 때까지만 해도, 칸트는 다른 계몽주의자들처럼 '인간은 도덕적으로 진보할 수 있다'고 강하게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칸트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종교론)>를 저술하면서, 기존의 낙관론적 입장을 전면 폐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종교론>에서 제시된 '근본악(das radikale Böse)'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악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국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도덕법칙에 따라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칸트의 <종교론>은 인간의 악한 유한성에 집중하며, 우리가 근본적으로 악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 자체가 전면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절망적 문제 상황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지요.

만약 칸트의 말처럼 인간이 근본적으로 악하다면, 우리가 아무리 영혼 불멸을 요청하며 도덕적으로 전진할 것을 결단한다고 한들, 이는 선을 향한 무한한 전진이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선이 아닌 악을 향해 무한히 전진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며, 혹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간 단계에 머무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793년 출간된 칸트의 저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ßen Vernunft>.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공용
1793년 출간된 칸트의 저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ßen Vernunft>.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공용

이 때문에 칸트는 당대 계몽주의자들이나 후대 칸트 연구자들에게 "칸트의 종교철학 이론은 그 자신의 비판철학, 특히 윤리학과는 양립할 수 없다"는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먼저 인간 이성과 자유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었던 계몽주의자들의 경우, 인간은 얼마든지 악을 극복하고 선을 향해 진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들의 눈에 칸트의 근본악 이론은 교회 당국에 아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파우스트> 같은 작품으로 잘 알려진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칸트는 자신의 철학적 외투를 사악하게 근본악이라는 오점으로 더럽혔다"라고 비판했다는 사실은 유명합니다. 당대 계몽주의 철학자이자 문학가였던 프리드리히 실러도 "근본악이라는 칸트의 가정은 화가 치밀게 한다"고 분개했지요.

또한 후대 칸트학자들 중에는 칸트철학에서 종교적·신학적 요소를 철저히 배제해야 칸트철학의 본래 의도가 잘 살아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음악가이자 의사였으며, 무엇보다 '역사적 예수 연구'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칸트의 종교철학: <순수이성비판>에서부터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 이르기까지 Die Religionsphilosophie Kants von der Kritik der reinen Vernunft bis zur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ßen Vernunft'라는 제목으로 종교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그는 이 논문에서 칸트 종교철학이 칸트철학 체계에 혼란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비판철학이 지닌 체계의 통일성과 완결성을 무너뜨린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이 칸트의 아부 대상으로 여겼던 당대 교회 당국조차도 칸트의 종교철학 이론을 경계했다는 것입니다. 칸트가 주로 활동하던 시기는 프로이센왕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통치하던 시기였는데요. 당시 그리스정교 신학자이자 법무부장관이었던 요한 크리스토프 폰 뵐너는 계몽주의자들이 기독교 교리에 반하는 이론을 주장하는 것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뵐너는 "성서와 기독교의 주된 교리를 왜곡하고 폄하하는 데 오용함으로써 청년들의 교사로서의 의무를 저버렸다"는 이유로 칸트의 종교철학 논문들이 출간되지 못하도록 검열하기에 이르렀습니다.1) 그래서 칸트의 종교철학 저술들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사망하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즉위했을 때 비로소 출간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칸트의 종교철학, 특히 근본악 이론은 철학자들과 신학자들 모두에게 비판받았던 이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 오히려 칸트의 '철학적 신학'이 철학 혹은 신학으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독특한 '제3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칸트의 철학적 신학은 신학과 철학이 서로 대화하고 만날 수 있는 장을 모색할 수 있는 주요한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논의의 쟁점

인간이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본성적으로(von Natur)' 악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점에서 칸트의 근본악 이론은 창세기의 원죄 이론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했다고 평가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무작정 인간이 본성적으로 악하다고 말하게 될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악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한 강도가 어떤 사람에게 총을 겨누면서, 특정 가게 금고 안에 들어 있는 돈을 꺼내라고 요구합니다. 다른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의 금고를 터는 행위는 도둑질이며, 비도덕적인 행동이지요. 그런데 이 경우는 총을 들고 협박하는 강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행동이므로, 그를 따른 사람에게 도둑질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묻기가 어렵습니다. 도둑질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자유롭게 도둑질하기로 결단하고, 또 그에 따라 실제로 도둑질을 수행했어야 합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도덕적 행동이든 비도덕적 행동이든 그에 대한 책임과 귀책사유를 물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본성이 악하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는 본성상 어쩔 수 없이 악을 저지를 수밖에 없도록 창조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악 된 본성에 따라 악을 저지르곤 합니다. 그렇다면 이 악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우리는 갓난아기가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해 옷에 배변을 하는 것을 보고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도덕을 알지 못하는 고양이가 종종 흥분해서 주인의 손을 무는 것을 보고 고양이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아기와 고양이가 본성에 따라 행동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성상 악할 경우, 그에 따라 악을 행하는 것 역시도 우리의 잘못이 아니지 않을까요? 오히려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창조하신 창조주께 책임이 있지 않을까요?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이 점에서 악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자유의지' 개념을 먼저 정립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인간이 자유롭게 악을 선택해 행동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에게 악의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자유롭지 않고 악을 행할 수밖에 없게 창조됐다면, 하나님은 악한 분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선하게 창조됐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한 행동을 하도록 창조된 인간은 자유롭게 선을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을 행하더라도 진정한 선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예정과 자유의지 문제를 논의의 장으로 함께 끌어옵니다. 인간은 선하게 창조됐고, 어쩔 수 없이 타락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께서 예정하셨지만, 그것은 철저히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의 결과라는 것이 신학자들의 전통적인 답변이었습니다. 칸트 역시도 악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윤리학적 입장을 종교철학적인 방식으로 재-주장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칸트는 악을 어떻게 설명하며, 또 어떻게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할까요?

인간이 지닌 '선의 소질'과 '악의 성향'

먼저, 칸트는 <종교론> '1논고'에서 인간이 지닌 본성을 철저히 분석합니다. 인간에게는 '선의 소질(Anlage zum Guten)'이 있으며, '악의 성향(Hang zum Bösen)'도 함께 지닌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선의 소질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칸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소질(Anlage)을 그의 목적과 관련해서, 인간을 규정하는 요소들로서 세 가지 부류로 적절히 분류할 수 있다.
 

1. 생물로서 인간의 동물성의 소질(Die Anlage für die Tierheit)

2. 생물이면서 동시에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의 인간성(Menschheit)의 소질

3. 이성적이며 동시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로서 인간의 인격성(Persönlichkeit)의 소질" (Rel., Ⅵ26.)

먼저, '동물성의 소질'은 말 그대로 동물적 욕구를 지니고 있는 인간의 본성을 의미합니다. 동물성의 소질은 다시 셋으로 구분되는데, 첫째는 '자기 보존의 소질(Erhaltung seiner selbst)', 둘째는 '성 충동' 및 성적 교섭에서 태어나는 것을 보존하려는 '종족 번식의 소질(Fortpflanzung seiner Art)', 셋째는 다른 인간들과 공동생활을 하는 소질, 즉 '사회에 대한 충동(der Trieb zur Gesellschaft)'입니다(Rel., Ⅵ26.).

동물성의 소질 중 첫째 소질인 '자기 보존의 소질'은 자기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입니다. 밥을 굶지 않고 잘 먹어서 건강하게 오래 살고자 하는 본능, 다른 누군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보존하고자 하는 본능 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 충동이나 종족 번식'의 소질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매우 분명하겠고요. 또 사회와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본능도 인간에게 있습니다. 이러한 동물성의 소질들은 욕구와 경향성을 충족하고자 하는 '기계적인 자기 사랑의 원리(mechanische Selbstliebe)'에 해당합니다.

둘째 소질인 '인간성의 소질'은 '비교하는 자기 사랑'의 원리에 해당합니다. 즉,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이 행복한지 불행한지를 판정하는 본능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소질인 '인격성의 소질'이 바로 '도덕성의 소질'입니다. 즉 우리 인간은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칸트에 따르면, 이러한 소질들은 인간에게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선의 소질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해 있어서, 인간을 가능하게 만드는 필연적인 요소라는 것입니다(Rel., Ⅵ28.). 그러나 이 근원적인 소질들 중, 첫째 소질(동물성의 소질)과 둘째 소질(인간성의 소질)은 모두 '자기 사랑의 원리'에 해당합니다. 칸트에 따르면, 행복은 결코 도덕성을 정초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로서는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 고대 철학자들이 이러한 욕구나 경향성을 그 자체로 악한 것으로 간주했던 것에 비해, 칸트는 이러한 욕구나 경향성을 '선의 소질', 즉 그 자체로는 선한 것으로 간주하는 독특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자기 사랑의 원리에 해당하는 선의 소질들은 자칫 잘못하면 '악덕'으로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동물성의 소질은 잘못 사용하면 폭식과 방탕 등으로, 인간성의 소질은 시기나 배은망덕,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는 일과 같은 악마적 악덕으로 발전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첫째 소질과 둘째 소질은 도덕법칙과 합치하는 한에서만 '조건적으로' 선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이 근원적인 선의 소질들 중 '무조건적으로' 선한 것은 셋째 소질인 '인격성의 소질', 즉 '도덕성의 소질'뿐입니다.

그러나 칸트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이러한 선의 소질뿐만 아니라 '악의 성향'도 함께 있습니다. 칸트는 다음 세 가지로 악의 성향을 분류합니다.

"우리는 이 [악한] 심정(Herz)의 세 단계들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단계는 채택된 준칙 일반을 따를 때 인간적 심성의 연약함 또는 인간 본성의 허약성(Gebrechlichkeit)이며, 둘째는 비도덕적 동기들과 도덕적 동기들을 혼합시키려는 성향(비록 선의에서, 그리고 준칙에 따라 행해진다 하더라도), 즉 불순성(Unlauterkeit)이며, 셋째는 악한 준칙을 취하려는 성향, 즉 인간 본성 또는 인간적 심성의 사악성(Bösartigkeit)이다." (Rel., Ⅵ29.)

악의 성향들 중 첫째 단계는 '허약성'입니다. <종교론>에서 칸트는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롬 7:18b, 공동번역)라고 말하는 사도 바울의 탄식을 인용하면서 인간의 허약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도덕적으로 행동해야만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육신의 한계, 즉 욕구와 경향성을 지닌 유한한 존재자라는 한계 때문에 온전히 도덕적으로 행동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단계는 인간적 심성의 '불순성'입니다. 이 불순성은 허약성보다 더 악한 단계로, 도덕법칙을 의도적으로 준수하기는 하지만, 순수하게 도덕적으로 행동하지는 않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도덕법칙만을 순수하게 행위의 동기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의도가 행위의 동기에 함께 섞여 있는 것이지요.

세 번째 글에서 상인의 예시를 통해 '의무에 합치하는(pflichtmäßig)' 행동과 '의무로부터 나온(aus Pflicht)' 행동을 구분했던 것을 다시금 기억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상인이 아무리 정직하게 장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너는 정직해야만 한다"라는 도덕적 의무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 자신이 정직하게 장사한다는 소문이 나면 장사가 더욱 잘될 것이라든지, 특정 몇몇 손님에게 잘 보이고자 한다든지 하는 의도가 섞여 있다면, 이는 결코 엄밀한 의미에서 도덕적 행동이 아니며 오히려 악의 성향인 '불순성'에 해당하는 악한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 단계는 '사악성', 혹은 '부패성(Verderbtheit)'입니다. 우리의 논의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 사악성의 성향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악성은 "도덕법칙에서 나오는 동기를 (도덕적이 아닌) 다른 동기들의 뒤에 놓는 방식으로 준칙들을 취하려는 선택의지의 성향", 즉 인간적 심성의 '전도성(Verkehrtheit)'이기 때문입니다(Rel., Ⅵ30.).

이를 보다 쉽게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주관적 행동 원리인 준칙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도덕적으로 행동하고자 할 때 도덕법칙을 행위의 준칙으로 삼으며, 욕구와 경향성에 따라 행동하고자 할 때는 그 욕망을 우리 행위의 준칙으로 삼습니다. 물론 욕구와 경향성의 충족이라는 자기 사랑의 원리는 그 자체로는 '선의 소질'입니다. 그러나 도덕법칙과 자기 사랑의 원리가 서로 충돌할 때, 도덕법칙에 따라야만 함에도 오히려 이를 뒤로하고 자기 사랑의 원리라는 준칙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전도성'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도덕법칙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덕법칙을 위반하고 자기 사랑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준칙의 전도성.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사악성'이라는 악의 성향입니다.

칸트에 따르면, 이러한 사악성의 성향은 가장 선한 인간에게서조차 발견됩니다. 악의 성향이 인간종 전체에게서 보편적으로 발견된다는 것이지요. 인간은 선한 소질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도덕법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선의 소질이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지닌 악의 성향은 우리의 모든 준칙들의 근거를 부패시킨다는 점에서 '근본적인(radikal)' 것이 됩니다(Rel., Ⅵ36.).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칸트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하다"고 말합니다(Rel., Ⅵ32.). 비록 인간에게는 선의 소질이 보다 근원적이지만, 그 선의 소질을 전도시켜 자유롭게 악을 추구하려는 성향이 근본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인간이 마치 본성적으로 악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아무리 도덕적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하더라도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매우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러한 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도덕적 행위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어렵습니다. 더 나아가 무한한 도덕적 전진의 가능성, 즉 최고선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도 아무런 장담을 할 수 없게 되지요. 이 점에서 악의 문제는 매우 심각한 문제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까지는 악했다 하더라도 "과거에 좀 더 선했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일 뿐 아니라, 미래에 더욱 선해져야 하는 것 또한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Rel., Ⅵ41.). 즉 우리 인간이 결코 근본악을 극복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도덕법칙은 여전히 "너는 보다 선한 인간이 돼야만 한다", "너는 그 근본악을 극복해야만 한다"라고 명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네 번째 글에서 살펴봤듯이, 우리는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근본악을 극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근본악의 문제도 최고선의 문제에서와 비슷한 '이율배반'을 초래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립: 인간이 보다 선하게 돼야만 한다는 것은 의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보다 선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반정립: 그러나 인간은 선의 소질에 따라 도덕법칙을 자신의 준칙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으며, 오히려 이를 전도시키려는 악의 성향으로 인해 근본적으로 부패돼 있다."2)

우리는 근본악을 극복하고 도덕적으로 선한 인간이 돼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유한한 한계 때문에 악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악의 성향을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하다"라는 이 명제는 우리로 하여금 매우 절망적인 이율배반의 문제 상황을 다시금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악의 문제, 즉 근본악의 이율배반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서는 지면상 다음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정성관, '칸트 종교철학의 초월철학적 성격', <종교와 문화>, 제15집, 2008, 121쪽 이하를 참조할 것.
2) 최소인, 정제기, '근본악과 희망의 문제 - 칸트의 <종교론>을 중심으로', <철학연구>, 제149집, 392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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