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 우리는 '근본악'이라는 악의 문제를 다뤘습니다. 핵심은 결국 인간이 본성적으로 악하다는 것이었지요. 우리 마음 속에서는 도덕적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준칙과, 자기 사랑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준칙이 자주 상충하는데, 이때 도덕적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준칙을 완전히 전도시키려는 '악의 성향(Hang zum Bösen)'이 인간에게 내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아무리 도덕적으로 행동하고자 하더라도, 종국에는 악을 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절망적인 문제 상황을 우리는 근본악의 '이율배반'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냈습니다. 이는 "인간이 보다 선하게 돼야만 한다는 것은 의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보다 선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라는 정립 명제와, "그러나 인간은 선의 소질에 따라 도덕법칙을 자신의 준칙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으며, 오히려 이를 전도시키려는 악의 성향으로 인해 근본적으로 부패돼 있다"라는 반정립 명제의 상충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율배반의 문제, 더 나아가 악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이번 글에서는 이를 위해 총 세 단계의 '희망'을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칸트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종교론)> '1논고'에서 '희망(Hoffnung)' 혹은 '희망하다(hoffen)'라는 단어를 단 세 차례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희망의 의미들을 분석해 볼 때, 우리는 '근본악을 극복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대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1)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첫째 희망:
선의 소질이 지닌 근원성

칸트가 <종교론>에서 처음으로 희망을 언급하는 대목은 다음 구절입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통해서 성서는 악 일반의 최초의 시작은 우리에게는 파악 불가능한 것으로 [그렇다면 그 영(Geist)에서는 악이 어디에서부터 왔는가?] 표상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그의 근거에서부터 (선의 최초의 소질에서까지) 타락한 것은 아니고 유혹하는 영과는 달리, 즉 육의 유혹이 그의 죄과를 감면시킨다고는 볼 수 없는 그런 존재자와는 달리 아직도 개선의 능력이 있는 존재자로서 묘사되어 있다. 심정은 비록 타락해 있지만, 아직도 선한 의지를 소유한 인간에게는 악으로부터 벗어나 또다시 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Hoffnung einer Wiederkehr zu dem Guten)이 남겨져 있는 것이다." (Rel., Ⅵ44. 강조는 필자에 의함.)

이 구절에서 칸트는 창세기 이야기(Geschichte)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악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창세기 이야기를 모르는 분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여섯째 날에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그 인간이 뱀의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하게 됐다는 이야기는 '원죄 교리'를 형성했을 만큼 유명한 이야기지요.

칸트는 창세기 이야기가 뱀, 즉 악의 기원이 어디에서 비롯했는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창세기 이야기가 악한 뱀의 영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가르쳐 주지 않듯이, 인간 안에 내재해 있는 근본악 역시도 그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했지 우리로서는 파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악의 기원이 어디에서 비롯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타락하기 이전에는 '무죄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인간이 그 자체로 부패해서 악을 저지른 게 아니라, 오히려 이미 부패해 버린 "유혹하는 영" 즉 뱀의 영에 의해 악을 저지르게 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칸트는 이러한 창세기의 이야기가, 인간에게 내재한 '선의 소질(Anlage zum Guten)'은 아직 부패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비록 타락해 버렸지만, 선한 소질이 여전히 남아 있으므로 아직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지요.

칸트가 해석하기에, 유혹하는 뱀의 영은 그 존재의 근원부터 타락해 버린 악한 존재자입니다. 선하게 될 수 있는 여지나 가능성이 전혀 없지요. 그러나 그에 비해 인간은 비록 타락하기는 했지만, 존재의 근원까지 타락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선하게 창조됐다는 것, 즉 타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의 소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 글에서 살펴봤듯이, 여기서 말하는 선의 소질은 '인격성의 소질', 즉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심을 통해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본성적 가능성을 말합니다.

이는 비록 악의 성향이 우리에게 근본적이고 문제적인 것으로 닥쳐오기는 하지만, 이러한 악의 성향보다 선의 소질을 더 근본적인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칸트는 선의 소질을 ('근본적'보다 더 강한 의미에서) "근원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어떤 칸트학자는 "악은 근본적이지만, 그러나 선은 훨씬 더 근본적"2)이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인간은 악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어떠한 악의 성향으로도 타락시킬 수 없는 선의 소질이 있습니다. 도덕법칙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마음, 즉 선한 의지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심정은 비록 타락해 있지만, 아직도 선한 의지를 소유한 인간에게는 악으로부터 벗어나 또다시 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이 남겨져 있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는 여전히 개선의 여지가 있으며, 따라서 다시금 선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희망:
도덕적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

그렇다면 우리가 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칸트는 "사고방식에서는 인간 안에 있는 심정의 혁명(Revolution in der Gesinnung im Menschen)이, 감각 양식에서는 점진적 개혁(allmählige Reform)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고 말합니다(Rel., Ⅵ47.).

여기서 말하는 '심정의 혁명'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인간이 이전의 악했던 마음에서 선한 마음으로 혁명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칸트는 이러한 심정의 혁명을 "심정의 신성함의 준칙으로 이행"하는 것이며, "새로운 창조(요 3:5, 창 1:2)와도 같은 일종의 재생을 통해"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Rel., Ⅵ47.).

즉, 심정의 혁명이란 결국 교리문답에서 말하는 '중생(거듭남)'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심정의 혁명을 통해 우리의 사고방식이 한 번에, 그것도 매우 급격하게 바뀌게 되면, 그에 따라 우리의 행동은 점진적으로 개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어떤 칸트학자는 심정의 혁명과 행위의 점진적 개혁이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점수頓悟漸修' 개념과 비슷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3) 칸트는 이러한 심정의 혁명과 행위의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우리가 근본악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설명 방식이 매우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있는, 그래서 거듭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우리의 죄악 된 본성 때문에 매 순간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해도 악을 완전히 벗어던질 수 없는 것입니다. 집회나 수련회를 다녀와서 은혜받고 마음을 새롭게 고쳐먹어도, 우리 본성에 깊게 내재해 있는 이 악을 뿌리 뽑는 일은 정말로 요원합니다.

이미 거듭났다고 말하는 우리 신자들의 경우에도 사정이 이러한데, 과연 '심정의 혁명'과 '행위의 점진적 개혁'이라는, 결국 우리 마음과 행동을 고쳐야 한다는 순진무구한 설명을 듣고 만족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미 근본악의 문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가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연약하고도 악한 존재자라면, 우리는 어떻게 심정의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일까요? 칸트는 아래와 같은 답을 내놓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의 준칙의 근거에서 타락해 있다면 과연 어떻게 자신의 힘으로 이 혁명을 수행해 스스로 선한 인간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무는 그렇게 되기를 명령한다. 그러나 의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명령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혁명이 필연적이며, 감각 양식에 대해서는 점진적인 개혁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따라서 인간에게 그것이 가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조화시킨다는 의미인 것이다." (Rel., Ⅵ47.)

여기에서 칸트는 다시금 '너는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라는 명제를 끌어옵니다(이 명제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넷째 글에서 이미 살펴본 바가 있으니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유한하기 때문에 결코 악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도덕법칙은 여전히 "너는 악을 극복하고, 보다 선한 인간이 돼야만 한다"고 명령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악을 극복해야만 하기 때문에 악을 극복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칸트의 설명은 계속해서 의문을 남깁니다. 단순히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면, 애시당초 악의 문제는 별문제가 아니었던 걸까요?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설명은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악의 극복 가능성을 단순히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악의 문제를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말해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칸트는 바로 이 지점에서 희망을 제시합니다. 다음 인용문을 살펴봅시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적인 방식으로는 직접적인 의식을 통해서도, 그가 수행한 지금까지의 행위들의 증거를 통해서도 이 같은 변화에 대한 확신에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심정의 깊이(그의 준칙들의 최고의 주관적 근거)는 그 자신에게서조차도 규명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을 변화로 이끌어 가며 스스로 힘씀으로써 근본적으로 개선된 심정에 의해서 그에게 제시된 길에 도달할 것을 희망할 수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그에게 책임이 돌려지는 것에 의해서만 선한 인간이 될 수 있고, 도덕적으로 선한 것으로 판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Rel., Ⅵ51. 강조는 필자에 의함)

위 인용문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실 우리는 악을 극복하기 위해 수행해야만 하는 '심정의 혁명'이 정말로 성공했는지 혹은 실패했는지를 절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도 심정의 혁명과 같은 변화가 실제로 이루어졌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유한한 우리로서는 어떻게 심정의 혁명을 수행할 수 있을까요? 바로 마치 언젠가는 심정의 혁명을 통해 '무한한 도덕적 전진(endless progress toward morality)'이 가능할 것이며, 그 전진의 끝에 근본악이 완전히 절멸될 것이라는, 그래서 악의 성향을 온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통찰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칸트는 우리가 근본악을 실제로 극복할 수 있는지 증명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전 글에서 우리가 살펴봤듯이, <순수이성비판>이나 <실천이성비판>에서 제시된 '최고선'도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에서 가능한 것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단지 주관적이고 실천적인 영역에서, 마치 언젠가는 우리가 최고선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희망'하는 태도를 강조할 뿐입니다.

이는 근본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칸트는 결코 이론적·객관적 방식으로 근본악의 극복을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단지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결코 악의 문제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한계상황을 긍정하면서도, 도덕적 인간이 취해야만 할 종교적 태도를 강변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근본악을 실제로 극복할 수 있는지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언젠가는 악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처럼 여기는 '희망', 결코 근절될 수 없는 악을 근절하기 위해 분투하기로 결단하는 삶의 '태도'가 가능할 뿐입니다. 비록 유한성으로 인해 결코 근본악을 완전히 근절할 수 없다 하더라도, 마치 그것이 가능하여 언젠가는 이전보다 더욱 선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희망하면서, 다시금 도덕적 전진을 결단하는 태도. 이것이 바로 <종교론>이 제시하는 '희망의 태도'입니다.

셋째 희망:
상위의 협력, 하나님의 은혜

지금까지 우리는 (1) 선한 의지를 지닌 인간은 또다시 선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2) 도덕적 인간은 악을 극복해야만 하기 때문에 악을 극복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희망을 살펴봤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합니다. 이러한 악의 극복 가능성에 대한 희망만으로는 무한한 도덕적 전진의 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악을 온전히 극복하는 '무한한 도덕적 전진'과 그에 상응하는 '행복의 보장 가능성', 즉 '최고선'의 가능성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유한한 도덕적 인간의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칸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도덕 종교에 따르면 (중략) 다음의 것이 근본 원칙이다. 즉 보다 선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각자는 자신의 힘이 미치는 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오직 인간은 그의 타고난 재능을 묻어 두지 않을 때(눅 19:12-16)에만, 즉 그가 보다 선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선의 근원적 소질을 이용했을 때에만, 그의 능력에는 없는 것이 보다 상위의 협력(höhere Mitwirkung)으로 보완될 것이라 희망할 수 있다." (Rel., Ⅵ52. 강조는 필자에 의함)

위 인용문에서 말하는 "보다 상위의 협력"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Gnade Gottes)'를 말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 우리가 악을 극복하기 위해 분투하고 노력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 너머에서 하나님의 협력과 도우심이 은혜로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희망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과도 비슷한 사유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충실하게 다하고 나면, 그 뒤는 하늘의 뜻에 달렸다는 뜻이지요.

이러한 사유는 또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기독교 신앙에서도 어느 정도 발견됩니다. 물론 강조점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칼뱅주의자들의 경우, 이를 죄악 된 본성을 지닌 인간으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오로지 하나님이 전적인 주권을 가지고 일하실 것만을 믿고 기대해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반-칼뱅주의자들의 경우, 인간의 행위와 노력을 강조하면서 우리의 선한 도덕적 분투와 노력의 끝에 미처 다 행하지 못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칸트의 경우, 후자에 조금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결국 칸트는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기 시작합니다.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결코 악을 극복할 수 없다는 절망적인 문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마치 언젠가는 악을 극복하고 선을 이룰 것이라는 희망, 그리고 우리의 도덕적 노력의 끝에 미처 우리의 능력으로 다 이루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은혜로 협력해 주실 것이라는 희망. 이것이 바로 칸트가 말하는 희망철학의 원리입니다.

인간은 결코 근본악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에게 가능한 것은 근본악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 희망하는 일뿐입니다. 인간으로서는 근본악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는 자신의 유한성과 본성적 결함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에 함몰되어 근본악의 완전한 극복 가능성과 선의 소질을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마저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희망을 가진 인간은 자신의 유한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탈-한계를 지향하며, 스스로를 무한히 도덕적으로 기투할 수 있는 존재자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끊임없이 탈-한계를 향해 기투하는 인간. 바로 이 지점에 유한한 도덕적 인간의 숭고함이 놓여 있습니다. 이는 순전히 욕구와 경향성의 지배를 받는 동물적 존재자에게서도, 자신의 모든 욕구가 도덕성과 일치하는 신적 존재자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는, 한계와 탈-한계 사이의 인간만이 가지는 도덕적 숭고함일 것입니다.4)

1) 이번 글에서 논의하는 희망의 세 단계는 제 박사 논문인 '칸트의 최고선 개념과 희망철학 연구'(2022)의 일부분을 대중적으로 풀어서 쓴 것입니다.
2) G. Fittbogen, "Kants Lehre vom radikal Bösen", Kant-Studien, vol. 12, 1907, S. 346.
3) 김진, <칸트ㆍ순수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울산대학교출판부, 1999, 40쪽.
4) 해당 문단은 최소인·정제기, '근본악과 희망의 문제', <철학연구>, 제 149집, 2019의 마지막 결론부를 편집·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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