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까지 칸트 비판철학을 살펴보며,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에서 최고선 개념이 어떻게 다뤄지는지,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종교론)>에서 악의 문제가 어떻게 다뤄지는지 간략하게나마 정리해 봤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의 과정에는 항상 '희망(Hoffnung)'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최고선은 도덕성과 행복의 결합이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 지상에서 최고선을 온전히 실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최고선을 실현해야만 한다는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칸트는 결코 실현 불가능한 최고선을 '마치 실현 가능한 것처럼' 여기기 위해 하나님의 현존을 요청합니다. 비록 객관적·이론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주관적·실천적 영역에서 도덕적으로 선하고 전능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필연적인 믿음을 지닐 수는 있으며, 이를 통해 마치 언젠가는 최고선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한한 우리로서는 결코 악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악을 극복하고 보다 선한 인간이 되기 위해 도덕적으로 전진해야만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의무로 주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이율배반적인 상황 속에 놓여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선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그래서 악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도덕적 노력과 분투의 끝, 우리 능력이 닿지 못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상위의 협력(höhere Mitwirkung)'인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습니다.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예수, 선의 원리의 인격화된 이념

칸트는 <종교론> '2논고'에서 이성 신앙의 길로 한 발짝 더 나아갑니다. 신의 아들에 대한 실천적 신앙,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성도인 우리가 아무리 선을 행하려고 노력해도 죄인 된 본성 때문에 온전한 선에 이를 수 없듯이,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인 도덕적 인간으로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악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습니다. 또한 자신의 의지가 도덕법칙에 완전히 합치하는 단계, 즉 '의지의 신성함' 단계에 도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유일하게 악을 온전히 극복한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의지의 신성함이라는 경지에 도달한 유일한 인간이 있다면, 그는 과연 누구일까요? 이는 "영원 전부터 신 안에 있"었으며, 또 "신의 본질로부터 나온", 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칸트는 예수를 '선의 원리의 인격화된 이념(personificirte Idee des guten Princips)'이라고 부릅니다(Rel., Ⅵ60.). 다시 말해, 완전한 도덕적 선의 이념이 인격화해 나타난다면, 그것은 인간의 몸으로 완전한 도덕성을 이뤄 낸 '예수'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칸트는 예수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는 우리 인간이 창조한 것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를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에 대해서도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한한 우리로서는 도덕적 완전함의 이념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우리는 그저 완전한 도덕적 선의 원형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는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육신을 입었기 때문에, 욕구와 경향성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유한성을 지니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미 도덕적으로 완전한 분이시고, 의지의 신성함을 갖추신 분이시며, 아주 조금도 악하지 않으십니다. 칸트는 이렇게 선의 원리가 인격화된 이념인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내려오셨으므로, 우리는 예수를 '실천적으로' 신앙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도덕적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도덕적 완전성의 이념은 여전히 도달 불가능한 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계를 지닌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자신의 욕구와 경향성을 완전히 극복하고, 자신의 의지를 도덕법칙에 완전히 합치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의지의 신성함을 획득하고 근본악을 완전히 극복한 유일한 인간으로 여겨집니다. 뭇사람들이 '악을 극복하고 의무를 온전히 다함으로써 도덕적 완전성에 도달하는 일이 도대체 가능하기는 한가' 하고 절망할 때, 인간으로 오신 예수는 스스로 고난을 받으면서 악을 극복하고 도덕적 이상을 완전히 이룬 단 하나의 '예시'이자 '모범'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칸트는 우리가 예수를 실천적으로 신앙할 때, 아래와 같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신의 아들에 대한 실천적 신앙에서 (그가 인간의 본성을 취했다고 생각되는 한에서) 인간은 신의 마음에 합하게 되기를 (그를 통해서 또한 축복받기를) 희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유사한 유혹과 고통 하에서 (이들이 저 이념의 시금석이 되는 한에서) 인간성의 원형에 불변하게 의존하는 것과 비슷하게 머무를 것이라고, 그리고 그러한 예시를 충실하게 뒤따르는 것과 비슷하게 머무를 것이라고 그가 믿을 수 있으며, 또 확고하게 신뢰할 수 있는, 그러한 도덕적 마음씨를 의식하는 인간, 그러한 인간, 그리고 오직 그 인간만이 신의 마음에 합할 자격이 없지 않은 대상으로 여길 권한이 있다." (Rel., Ⅵ62. 강조는 필자에 의함.)

위 인용문에 따르면, 예수를 실천적으로 신앙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 마음이 신의 마음에 합하게 될 것을 희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덕적 이상을 추구하는 일에 늘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먼저 앞서 그 어려운 길을 걸어간 사람, 즉 예수에게서 예시와 모범을 볼 수 있습니다.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인 우리는 경향성의 유혹과 고통에 빠져 있습니다. 신의 아들인 예수 역시도 인간의 몸을 입었으므로, 우리가 겪는 것과 동일한 욕구·고통·경향성을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악의 성향으로 인해 도덕법칙을 위반하고 싶은 강한 유혹과 충동을 느끼는 것처럼, 예수 역시도 강력한 위반의 충동을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유혹과 충동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도덕적 완전성의 이념을 실현한 유일한 존재자라는 것을 믿으며 신앙하는 일. 이것이 바로 신의 아들에 대한 실천적 신앙입니다(Rel., Ⅵ63.). 예수를 실천적으로 신앙할 때, 우리는 유한성·불완전성 속에서도 다시금 도덕적으로 전진하며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보여 주신 모습을 모범으로 삼으면서 말이지요.

교회, 악에 대항하는 윤리적 공동체

사실 지금까지 우리가 다룬 논의들은 '도덕적 개인'의 차원에서 이뤄진 최고선의 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어떻게 도덕적 개인이 도덕성과 행복의 결합으로서 최고선을 실현하는 것이 가능한지 살펴본 것이지요. 따라서 이러한 논의는 철저히 윤리학적 측면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칸트는 한발 더 나아가 '윤리적 공동체' 차원에서 최고선을 제시하며 논의를 확장하기 시작합니다. 다음 인용문을 살펴봅시다.

"그러나 인간이 이처럼 위태로운 상황 안에 놓여 있는 것은 그 자신의 죄책(Schuld)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능력이 미치는 한, 이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어도 최선을 다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그것이 가능한가?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인간을 이러한 위험에 빠지게 하고 또 그러한 위험 속에 가두어 두는 원인이나 형편들을 살펴볼 때, 그 위험은 홀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때의 인간 자신의 자연적인 본성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관계를 맺고 교제하는 다른 인간들로부터 초래되는 것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Rel., Ⅵ93.)

칸트는 <종교론> '3논고'에 이르러 문제의식을 조금 확장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근본악의 문제는 우리에게 심각한 문젯거리입니다. 그러나 이 악의 문제는 도덕적 개인의 차원에서만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회적·정치적 차원에서 보다 강력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을 위험에 빠뜨리는 원인은 인간이 홀로 떨어져 존재할 때 발생하는 자연적 본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과 관계 맺고 교제할 때 그들로부터 위험이 초래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실은 결국 도덕적 개인의 차원에서는 악의 문제를 온전히 극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아무리 영혼 불멸을 요청하고, 또 아무리 근본악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 전반에 자리하고 있는 이 거대한 악의 문제를 완전히 절멸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칸트는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진실로 인간에게 악의 방지와 선의 촉진을 목적으로 하는 결합을, 즉 힘을 합쳐 악에 대항하는 공동체, 즉 지속적이며 항상 확대되며, 단순히 도덕성의 유지에 관심을 두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어떤 수단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개인이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리 힘쓴다고 해도 끊임없이 인간을 자기의 지배하에 두려고 하는 악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의 지배는 인간이 그를 위해 애쓰는 한에서, 다시 말해 덕 법칙(Tugendgesetz)에 따르고, 또 그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의 건설과 확장을 통해서 밖에는 가능할 수 없는 것이다." (Rel., Ⅵ94.)

여기서 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진정으로 악을 절멸하고, 더 이상의 악이 창궐하지 않도록 방지하며, 선을 촉진하기로 결단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악에 대항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인간의 개인적 노력만으로는 사회적·공동체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악을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악에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뤄야만 합니다. 이처럼 악을 근절하기 위해 싸우는 공동체, 선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악의 원리와 싸워 이기고, 선의 원리가 승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 Ⅵ94.).

그렇다면 이러한 공동체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칸트는 이를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하나는, 법률적-시민적 사회 혹은 '정치적 공동체'이며, 다른 하나는 윤리적-시민적 사회 혹은 '윤리적 공동체'입니다. 정치적 공동체가 외적 자유의 원리인 법의 원리에 따라 세워진 공동체라면, 윤리적 공동체는 정치적 공동체가 먼저 설립된 이후 그 법의 원리에 기반해 세워질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칸트가 윤리적 공동체를 "신의 명령 아래에 있는 백성, 즉 신의 백성(Rel., Ⅵ99)"으로 제시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신의 나라가 임하며, 신의 뜻이 이 땅에서 이뤄지는 것"을 바라고 소망하는 이들이 모여 만든 공동체, 즉 '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Rel., Ⅵ101). 칸트는 지금 마태복음 6장 10절을 염두에 두고 '윤리적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칸트는 이러한 윤리적 공동체로서 교회를 "공동체적 선으로서 최고선(Rel., Ⅵ97)"이자 "최고의 윤리적 선(Rel., Ⅵ97)"으로 설명합니다.

윤리적 공동체이자 최고선인 교회가 실현될 것을 바라고 소망하는 일은, 결국 하나님의 통치에 따라 덕과 그에 상응하는 행복의 일치가 다름 아닌 '이 지상에서' 성취될 것을 희망하는 종교적 태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의 아들에 대한 실천적 신앙을 지닌 도덕적 개인들이 악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분투하고자 노력하는 공동체, 함께 악을 절멸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공동체, 이 분투의 끝에 신의 은총이라는 상위의 협력이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결코 보완할 수 없는 행복을 보완해 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 '지상의 윤리적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종교론>의 종교적 희망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최고선의 참된 모습이지요.

이러한 <종교론>의 사유는 기존 칸트철학에서 제시된 개인적·내세적 차원의 최고선 사유에서 벗어나, 윤리적 공동체의 지상 건설이 현세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도덕적 인간의 희망이 '내세적 희망에서 현세적 희망으로', 또 '종교적 희망에서 세속적(säkular)이고 구체적인 희망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드러내는 <종교론>만의 독특한 사유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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