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우리는 '최고선'을 추구하려 할 때 '이율배반'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최고선은 결국 '도덕성(덕)'과 그에 상응하는 '행복'의 필연적인 결합이지요. 도덕법칙은 우리에게 "너는 최고선을 실현해야만 한다"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라는 칸트의 원칙에 따라, 우리는 최고선을 실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감성계)에서는 이러한 최고선이 결코 실현될 수 없습니다. 최고선은 이중으로 배반적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요. 한편으로 유한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우리 의지를 도덕법칙에 완전히 합치할 수 없다는 문제, 즉 최상선으로서 덕을 결코 실현할 수 없다는 문제가 나타납니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으로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감성계에서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을 필연적으로 보장해 주는 것이 단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문제가 나타나지요.

바로 여기에서 "최고선은 실현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최고선을 결코 실현할 수 없다"는 이율배반 문제가 출현합니다. 이러한 문제 상황은 일견 우리를 깊은 허무와 절망에 빠지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가야 할 바를 알지 못하도록 우리 눈을 가리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이율배반은, 최소한 칸트에게서는, 우리를 허무주의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칸트 비판철학을 시작할 수 있게 하는 근본적인 동기가 되지요.1) 바로 이 이율배반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칸트는 '희망'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1. 영혼 불멸의 요청

최고선의 이율배반은 '덕의 실현 가능성 문제' 그리고 '덕에 상응하는 행복의 보장 가능성 문제'라는 이중의 배반적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최고선의 이율배반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최상선으로서 덕이 어떻게 실현 가능한지의 문제를 해결하고, 덕에 상응하는 행복이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지 제시해야 합니다.

먼저 최상선으로서 덕의 문제를 살펴봅시다. 최상선인 덕이 온전히 실현될 수 있으려면 우리의 심정이 도덕법칙에 완전히 부합해야만 합니다(KpV, Ⅴ122). 그러나 이는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고한 경지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우리의 심정과 도덕법칙이 완전히 일치하는 이 단계를 "의지의 신성함(KpV, Ⅴ32-33)"이라고 부르지요. 이 단계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자는 아마 하나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전능하고 전적으로 선한 하나님만이, 자신이 욕구하는 것과 도덕법칙이 완전히 합치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한한 인간은 자신의 삶 전체 어느 시점을 놓고 보더라도 '의지의 신성함'의 단계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칸트는 흥미로운 생각을 도입합니다. '만약 도덕성을 향한 무한한 전진(endless progress toward morality)이 가능하다면, 우리의 유한한 의지도 언젠가는 도덕법칙에 완전히 부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사유한 것입니다(KpV, Ⅴ122).

칸트는 아마도 수학의 극한 개념을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0.999…9'와 같이 소수점 아래로 9가 무한히 이어지는 수를 생각해 봅시다. 이 수의 극한값은 당연히 '1'이겠지요? 우리는 '0.999…9 = 1'이라는 결론을 알고 있습니다. 0.999…9라는 수는 한없이 1에 가까워지므로, 1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와 유사하게 우리 인간도 (유한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도덕성을 향해 무한히 전진하며 분투하다 보면, 언젠가는 도덕법칙과 우리 심정의 완전한 일치인 '의지의 신성함(완전한 도덕성)' 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적인 전망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무한한 도덕적 전진'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런데 이 무한한 전진은 동일한 이성적 존재자의 무한히 존속하는 실존과 인격성을 (우리는 이것을 영혼 불멸이라 일컫는다) 전제해야 가능하다. 그래서 최고선은 영혼 불멸을 전제해야만 실천적으로 가능하다. 따라서 영혼 불멸은 도덕법칙과 불가분적으로 결합한 것으로, 순수 실천이성의 요청(Postulat)이다." (KpV, Ⅴ122.)

이 인용문에서 칸트는 '영혼 불멸'을 요청하기 시작합니다. 무한한 도덕적 전진은 "동일한 이성적 존재자의 무한히 존속하는 실존과 인격성"을 전제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나'라는 존재자의 인격이 동일하게 또 무한히 지속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영혼이 불멸하여 영원히 존재한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칸트는 이 영혼 불멸의 '믿음'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요청(Postulat)은 객관적-이론적 영역에서 결코 증명이 불가능한 것을 주관적-실천적 영역에서 필연적으로 전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첫 번째 글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증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명도 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을 지식의 측면에서는 논의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관적이고 실천적인 영역에서 필연적으로 전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매 순간 도덕법칙의 명령에 따라 도덕적으로 행동하고자 결단하는 나는 (비록 이론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요청 명제는 '믿음'입니다. 즉 객관적으로는 필연적이지 않지만, 주관적으로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견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청적 사유를 통해 이론적으로는 결코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자유'나 '영혼 불멸', '하나님의 현존'에 대해 실천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나는 도덕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전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나는 내 영혼이 불멸하여 최상선을 실현하기 위해 무한히 도덕적으로 전진할 수 있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전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최상선에 상응하는 행복을 보장해 주는 신이 존재할 것이라고 필연적으로 전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필연적 전제에 대한 사유는 'Als-ob' 형식으로 나타나는데요. 독일어 'Als-ob'은 영어의 'As-if(마치 ~인 것처럼)'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도덕적 인간의 자유가 정말로 실재하는지 증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우리가 도덕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며 믿을 수는 있습니다. 또한 우리 영혼이 정말로 불멸하는지 객관적-이론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마치 내 영혼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여길 수 있는 도덕적 믿음과 확신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이를 통해 나는 현세의 삶을 넘어서 죽은 이후에서라도 덕을 실현하기 위해 무한히 전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영혼 불멸'이라는 요청 명제의 핵심입니다.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도덕적으로 무한히 전진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즉 최상선이 현세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도덕신학', '희망의 신학'이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희망의 사유는 최상선으로서 덕을 이 지상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지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코 실현 불가능한 무한한 도덕성의 이념 앞에서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죄인 된 본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라 살 수 없듯이, 도덕적 인간인 우리는 결코 도덕적으로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한계 앞에서도 도덕적으로 분투하고자 결단하는 인간은, 영혼 불멸을 요청하면서 마치 우리의 영혼이 불멸하는 것처럼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은 이 영혼 불멸의 요청을 통해, 마치 언젠가는 우리가 의지의 신성함의 경지에 온전히 도달할 수 있을 것처럼 여기며 희망하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칸트는 이 희망을 "위안적인 희망(tröstende Hoffnung)"이라고 설명합니다(KpV, Ⅴ123 Anm.). 도덕적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희망이 위안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유한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너는 계속해서 얼마든지 도덕적으로 더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위로, 더 나아가 '너는 도덕적으로 분투하는 가운데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위안. 이것이 영혼 불멸의 요청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희망의 정체입니다.2)

2. 하나님 현존의 요청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이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지 살펴보는 일입니다. 여기서 칸트가 시도하는 전략은 신의 현존, 즉 '하나님의 현존'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자유 인과성의 법칙인 도덕법칙이 지배하는 지성계에서는 도덕성을 원인으로 하여 행복을 결과로 도출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2) 그러나 자연 인과성이 지배하는 감성계에서는 도덕성을 원인으로 하여 행복을 결과로 도출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3) 그러나 하나님은 감성계와 지성계 모두를 다스리고 통치하는 제일원인입니다. (4) 따라서 하나님의 현존을 요청하면, 자연 인과성과 자유 인과성의 제일원인이자 감성계와 지성계 모두를 통치하는 하나님에 의해 자연과 자유의 통일, 즉 마치 감성계에서도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을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 불멸의 요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요청적 사유는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을 보장해 주는 일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아무리 도덕적으로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행복은커녕 더 불행해지기 십상이라는 사실을 자주 경험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불행한 현세에서 최고선을 추구하는 인간은 하나님을 '요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결코 이론적으로는 증명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마치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처럼 여기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저 무한한 도덕적 전진의 끝에서 하나님께서 언젠가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을 보장해 주실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도덕적 신앙'의 사유가 출현하게 됩니다. 최고선을 실현하는 것은 의무입니다. 따라서 최고선은 마치 실현 가능한 것처럼 여겨져야만 합니다. 따라서 마치 최고선이 이 지상에서 실현 가능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으려면, 마치 감성계에서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처럼 여기며 믿는 믿음이 필연적으로 요구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도덕적 신에 대한 신앙을 가지는 일은 주관적인 요구일 뿐이지 의무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특정 존재자의 실존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의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KpV, Ⅴ125). 그러나 최고선의 실현을 위해 분투하는 도덕적 인간으로서는 필연적으로 도덕적 신에 대한 신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한 도덕성인 최고선의 실현과 관련하여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도덕적 신에 대한 신앙,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도덕적 이성 신앙'의 정체입니다.

이러한 이성 신앙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속성을 새롭게 재발견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전지'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삶 전체에 걸쳐 내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행동하고자 분투했는지 나의 내면을 온전히 꿰뚫어 보기 위해서는 전지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은 '전능'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도덕성에 상응하는 결과인 행복을 정확하게 보장해 줄 수 있기 위해서는 전능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은 '무소부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나라와 지역의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을 보장해 주실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은 '영원히 존재'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도덕적 인간에게 상을 내려 줄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KpV, 140).

흥미로운 점은 칸트가 이러한 최고선 논의의 끝에 '하나님나라(Reich Gottes)' 개념을 도입한다는 것입니다. 칸트는 "그 가르침에 함의된 종교적 의미를 모두 배제한다고 하더라도, 실천이성의 가장 엄격한 요구를 충족하는 최고선 개념"은 하나님나라 개념이라고 말합니다(KpV, Ⅴ127-128). 하나님의 통치하에서 최상선과 그에 상응하는 행복이 충분히 보장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세계가 바로 하나님나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통상 하나님나라를 '하나님의 뜻이 선포되고 이루어지는 곳'으로 이해합니다. 즉, 단지 우리가 죽고 난 이후 가게 되는 내세적인 의미의 천국만이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바로 이 지상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나라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나라는 '이미 임했지만 아직은 완성되지는 않은(Already but not yet)' 것으로 이해돼 왔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칸트가 최고선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위와 같은 하나님나라 개념을 끌어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덕적 신의 통치하에서 최상선, 즉 우리의 심정이 도덕법칙에 완전히 합치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곳, 그리고 그러한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이 전능한 하나님의 은총 판단으로 말미암아 충분히 보장될 것으로 여겨지는 곳이 바로 신의 나라, 하나님나라라는 것입니다.

신의 통치하에서 자연과 도덕이 온전히 일치하며, 이 세계에서도 최상선에 상응하는 행복이 신에 의해 충분히 보장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희망, 바로 이 '희망'이야말로 '도덕'과 '종교'가 함께 자리하는 장입니다. 최고선을 실현하라는 의무는 지극히 도덕철학적 영역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도덕철학은 이 최고선의 실현 가능성 문제와 관련해서는 필연적으로 종교로 이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결코 실현 불가능한 최고선을 영혼 불멸과 신의 현존을 요청하면서까지 마치 가능한 것으로 희망하기 시작할 때, 도덕법칙은 신의 명령으로 인식될 수 있다고 칸트는 말합니다(KpV, Ⅴ129). 또한 이 신의 명령으로서 도덕법칙이 최고선을 추구하라고 명령하는 단계에 이르게 될 때, 즉 도덕이 종교로 이행하며 도덕에 종교가 더해지는 그때, 비로소 "어떻게 행복해도 좋을 자격을 갖춰야만 하는지에 관한 가르침"에서 "행복해도 좋을 자격이 없지 않도록 유념하는 정도만큼 언젠가 행복을 나눠 가질 것이라는 희망"이 등장할 수 있게 됩니다(KpV, Ⅴ129-130).3)

바로 여기에서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라는 물음에 대한 <실천이성비판>의 고유한 답변이 드러나게 됩니다. 나는 끊임없이 도덕적으로 분투하면서 내가 죽은 이후에도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도덕적으로 무한히 전진하여 의지의 신성함, 즉 최상선에 도달할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나는 이러한 도덕적 분투의 끝에서 자연과 도덕을 통일하는 신에 의해 최상선에 상응하는 행복이 보장될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습니다. 이는 더 나아가, 신의 통치에 의해 세계 내에서 자연과 도덕이 완전히 일치되는, 따라서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이 충분히 보장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신의 나라가, 비록 아직은 아니지만 마치 언젠가 온전히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이르게 합니다.4)

1) 이엽, '이율배반: 칸트 비판철학의 근본 동기', <칸트연구>, 제 26집, 2010.
2) 정제기, '칸트의 최고선 개념과 희망철학 연구',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2, 98쪽.
3) '칸트의 최고선 개념과 희망철학 연구', 101~102쪽.
4) '칸트의 최고선 개념과 희망철학 연구',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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