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우리는 네 차례에 걸쳐 긴 여정을 달려왔습니다. 첫 번째 글에서는 칸트 비판철학에서 '비판(Kritik)'의 기획이 무엇인지 다뤘고, 두 번째 글에서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최고선의 원형적 의미를 다뤘지요. 세 번째 글에서는 <도덕형이상학 정초>를 중심으로, 네 번째 글에서는 <실천이성비판> 전반부에 해당하는 '순수 실천이성의 분석론'을 중심으로 칸트 윤리학이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방향들을 다뤘습니다.

어쩌면 몇몇 분께서는 연재 제목은 '칸트와 희망의 신학'인데, 어째 두 번째 글을 제외하고는 '희망신학'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고 불만을 표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논의를 수행하기 위한 기초 작업을 어느 정도 마친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희망신학에 대해 보다 본격적인 논의를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1. <실천이성비판>에서 최고선 개념

두 번째 글에서 우리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도덕과 행복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지, 그리고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라는 물음이 어떻게 등장하는지 간략하게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도덕성과 행복의 필연적 결합'이라는 '최고선(das höchste Gut)' 개념이 어떻게 등장하는지 개괄적으로 조망했지요.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가 최고선에 대한 논의를 어느 정도 수행하기는 하지만, 사실 <순수이성비판>의 주된 관심은 '인간이 어디까지 알 수 있고, 또 어디서부터는 알 수 없는가'를 규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최고선과 같은 도덕성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큰 그림만 개괄적으로 그려 낼 수밖에 없었지요. <순수이성비판>의 최고선 이론은 아주 원형적이고도 기본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아직 완전하게 구체화되지는 못한 상태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이러한 최고선 이론이 어떻게 확장·발전되는지 살펴봐야겠지요? 따라서 우리는 칸트의 윤리학 주요 저서인 <실천이성비판>의 후반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최고선 이론이 도덕철학적 문맥에서 보다 발전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먼저 <실천이성비판>에 등장하는 다음 인용문을 살펴봅시다.

"이미 최고(das Höchste)라는 개념이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하지 않으면 불필요한 논쟁이 생길 수 있다. 최고는 최상(das Oberste/supremum)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완전(das Vollendete/consummatum)을 의미할 수 있다. 최상은 그 자체로 무조건적인 조건, 다시 말해 어떤 다른 조건에도 종속하지 않는 조건이다. 완전은 다음과 같은 전체, 즉 같은 종류이면서 자신보다 더 큰 전체의 부분을 이루는 전체다." (KpV, Ⅴ110.)

칸트는 '최고'라는 개념에 오해의 여지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최고'라는 말은 '최상'을 의미하기도 하고, '완전'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인용문만으로는 너무 어려워서 '최상'과 '완전'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칸트는 바로 이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행복해도 좋을 자격으로서) 덕이 우리에게 오직 바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질 모든 것들의 최상 조건이라는 것, 따라서 행복에 대한 우리의 모든 추구의 최상 조건이라는 것, 따라서 최상선이라는 것은 분석론에서 증명되었다. 덕은 최상선에 불과하므로 아직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들의 욕구 능력의 대상인 전체적이고 완전한 선은 아니다. 전체적이고 완전한 선이려면 덕에 더하여 행복 또한 요구되기 때문이다." (KpV, Ⅴ110.)

여기에서 우리는 '최상' 개념에 해당하는 것이 '덕(Tugend)'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최고선의 구성 요소에 도덕성이 포함된다고 설명했던 것에서 매우 발전한 개념이지요. 칸트는 덕을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예컨대 <도덕형이상학 정초>에서는 덕을 도덕적으로 선한 마음의 태도(GMS, Ⅳ435)로 설명하고, <실천이성비판>에서는 경향성들을 지배하여 자신의 의지를 도덕법칙과 일치시키려고 하는 심정(KpV, V118)으로 설명합니다. 또 <도덕형이상학>에서는 덕의무를 이행할 때 결의의 강함(MS, Ⅵ394)으로, 자기 의무를 준수할 때 인간 의지의 도덕적 강함(MS, Ⅵ405)으로, 혹은 숙고된 확고한 결의를 갖고 도덕법칙을 실행에 옮기려는 부동의 믿음(MS, Ⅵ409)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학자들도 저마다 덕을 이해하는 방식이 매우 다른데요. 어떤 학자는 덕을 선한 의지의 상태[강영안, <도덕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소나무), 119쪽]로 설명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는 선의지와 구별되어 준칙과 행위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역할[김성호, '칸트 윤리학에서 덕의 개념', <가톨릭철학>(한국가톨릭철학회), 제9호, 93쪽]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덕'은 매우 상이한 의미를 지닌 개념이지만, 여기에서는 "심정이 도덕법칙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KpV, Ⅴ122)"이라고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한번 생각해 볼까요? 지난 글에서 우리는 도덕법칙이 매우 엄격한 개념이며, 따라서 유한한 우리 인간으로서는 도덕법칙을 온전히 따르기 힘들다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도덕법칙을 온전히 따라서 행동한 단 하나의 사례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요(GMS, Ⅳ407).

그런데 칸트는 우리 마음이 도덕법칙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을 '덕'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도대체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요? 물론 우리 마음이 도덕법칙에 완전히 일치할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어떤 상황과 환경에도 변하지 않고 도덕법칙에 따라 우리 의지를 규정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는 정말로 '최고선'이라는 명칭에 걸맞는 높은 단계의 도덕성임에는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무척 어렵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용어로 번역해 보자면, 칸트가 말하는 이러한 덕은 우리 마음이 항상 주님의 뜻과 일치해 있는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뜻을 따라 행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본성상 죄인인 우리는 결코 주님의 계명을 온전히 다 지키지 못할뿐더러, 우리 마음에 주님의 계명을 온전히 담아낼 수도 없지요. 어쩌면 단 한 순간도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칸트는 이처럼 무시무시한 덕 개념을 제시해 놓고도, 이것이 최고선을 형성하기 위한 최상 조건, 즉 '최상선'에 불과할 뿐 완전선인 '최고선'의 단계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최고선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바로 덕에 상응하는 '행복'이 필요한 것입니다(KpV, Ⅴ110). 즉 덕에 상응하는 행복이 필연적으로 덕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완전한 최고선의 지위에 오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덕과 행복은 함께 한 인격에서 최고선의 소유를 구성하되 행복이라 하더라도 도덕성(인격의 가치로서의 도덕성, 이 인격이 행복해도 좋을 자격으로서의 도덕성)에 아주 정확히 비례해서 할당되었을 때, 가능한 세계의 최고선(das höchste Gut einer möglichen Welt)을 구성한다. 이런 한에서 최고선은 전체, 즉 완전한 선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완전선에서 덕은 항상 조건으로서 최상선이다. 더는 아무 상위 조건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는 늘 쾌적한 어떤 것이겠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단적으로 선하지 않으며 모든 점에서 선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완전선에서 행복은 언제나 도덕적-합법칙적 행동을 조건으로 전제한다." (KpV, Ⅴ110-111.)

이는 한편으로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의 입장을 그대로 계승해 온 것처럼 보입니다. 두 번째 글에서 우리는 칸트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을 살펴봤지요.

"우리 이성에게는 행복만으로 완벽한 선이 되기에는 어림도 없다. (중략) 그러나 도덕성만으로는, 그리고 이와 함께 한낱 행복해도 좋을 자격을 갖추는 일만으로는 또한 완벽한 선이기에는 한참 멀다. 이것(최고선)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도록 처신했던 사람이 행복에 참여하게 될 것을 희망할 수 있어야만 한다." (KrV, A813=B841.)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도덕성만으로는 완전한 최고선이 될 수가 없고, 행복만으로도 완전한 최고선이 될 수는 없다"라고 말했던 입장을 이와 같이 발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도덕성, 즉 자신의 의지를 도덕법칙에 완전히 일치시킨 상태인 덕은 '최고선'을 실현하기 위한 최상 조건입니다. 따라서 최고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최상선인 덕을 반드시 먼저 갖춰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가능한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러한 덕을 갖추고 그에 상응하는 행복이 보장될 수 있어야만 완전한 선인 최고선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덕과 행복이 "한 인격에서" 최고선의 소유를 구성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칸트의 관심이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와 완전히 유리되고 독립된 지성적 도덕 세계를 이상적으로 구축하는 것[<순수이성비판>]에서, 구체적인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도덕적 개인의 인격[<실천이성비판>]으로 이행하고 있는 것을 보여 줍니다. 최고선에 대한 사유가 복잡한 사변적 논의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분투하며 살아가고 있는 구체적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논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칸트는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최고선의 이율배반

최고선이 가능할 수 있기 위해서는 덕과 행복이 필연적으로 결합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덕과 행복은 어떤 방식으로 서로 결합될 수 있을까요? 칸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의 개념 안에 필연적으로 결합한 두 규정은 원인과 결과로 결합할 수밖에 없다. 이 통일은 분석적인 것(논리적 결합)으로 여겨지거나 아니면 종합적인 것(실재적 연결)으로 여겨진다. 앞의 것은 동일률에 따른 결합이며 뒤의 것은 인과율에 따른 연결이다. 그래서 덕과 행복의 결합은 다음 둘 가운데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덕스럽고자 노력하는 것과 이성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두 가지 다른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동일한 행위일 경우다. 이 경우 덕의 이유가 되는 준칙은 행복의 이유가 되는 준칙과 다를 필요가 없다. 아니면 원인이 결과를 산출하듯, 덕이 덕의 의식과는 구별되는 어떤 것인 행복을 산출하는 식으로 덕과 행복이 결합하는 경우다." (KpV, Ⅴ111.)

여기에서 칸트는 "하나의 개념 안에 필연적으로 결합한 두 규정은 원인과 결과로 결합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합니다. 최고선이라는 개념 아래 '도덕성'과 '행복'이 필연적으로 결합돼 있다면, 이 둘은 서로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1)도덕성을 원인으로 하여 행복을 결과로 도출하던지, 아니면 (2)행복을 원인으로 하여 도덕성을 결과로 도출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칸트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덧붙입니다. 이 통일이 '분석적인' 것이거나 '종합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칸트철학에서 '분석적인' 것은, 주어 개념을 분해했을 때 술어가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미혼 남성이다'라는 문장에서, '총각'이라는 주어 개념을 분해했을 때, '결혼하지 않은 미혼 남성'이라는 개념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분석판단'은 동일률의 판단이며, 우리 지식을 확장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어 개념을 아무리 분해하더라도 술어 개념이 필연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면, 이는 분석적인 것이 아니라 종합적인 것이 됩니다. 즉 '종합판단'의 경우, 술어 개념은 주어 개념 바깥에서 주어 개념에 덧붙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칸트가 종합판단의 예로 드는 것은 "모든 물체는 무겁다(KrV, B11)" 같은 것입니다. 물체라는 개념을 아무리 분해해도 '무겁다'라는 것이 이끌려 나오지는 않습니다. '무거움'이라는 개념은 다른 곳에서부터 물체 개념에 덧붙여져야 하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종합판단은 주어 개념에 포함돼 있지 않은 새로운 술어를 주어 개념에 덧붙인다는 점에서 '확장판단'이며, 우리 지식을 확장해 주는 판단이 됩니다.

이러한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을 우리 논의에 적용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도덕성과 행복의 필연적 결합은 (1)도덕성을 원인으로 하여 행복이 분석적으로 도출되는 경우, (2)도덕성을 원인으로 하되 행복이 종합적으로 도출되는 경우, (3)행복을 원인으로 하여 도덕성이 분석적으로 도출되는 경우, (4)행복을 원인으로 하여 도덕성이 종합적으로 도출되는 경우, 이 네 가지 경우 중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실천이성비판>에서 칸트는 (1)과 (3)의 대표적인 예로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를 지목합니다. 칸트에 따르면, 스토아주의자들은 "자신의 덕을 의식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주장했으며,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행복으로 인도하는 자기 준칙을 의식하는 것이 덕"이라고 주장했습니다(KpV, Ⅴ111). 즉,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의 덕은 자신의 행복을 촉진하는 것이고, 스토아주의자들의 행복은 자신의 덕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에피쿠로스주의자들과 스토아주의자들에게 행복과 덕은 서로 다르지 않은, '분석적' 관계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칸트는 도덕성과 행복이 전적으로 상이한 두 요소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우리가 지난 글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행복은 결코 도덕성을 정초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덕성과 행복이 분석적 관계를 맺는다고 봤던 에피쿠로스주의자·스토아주의자의 입장, 즉 (1)과 (3)의 입장은 모두 거부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은 입장은 (2)와 (4)의 입장, 도덕성과 행복이 '종합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중에서도 (4)의 입장처럼 행복을 원인으로 하여 도덕성을 종합적으로 도출하는 것 역시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행복이 도덕성을 정초하는 것이 단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2)의 입장, 즉 '도덕성을 원인으로 하여 행복을 종합적으로 도출하는 것'만이 가능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문제가 발생합니다. 도덕성을 원인으로 하여 행복을 결과로 도출할 수 있어야만, 그것도 분석적인 방식이 아니라 종합적인 방식으로 도출할 수 있어야만 최고선이 가능할 수 있는데, 이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현실은 자연 인과성 원리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감성계는 물리법칙과 같은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 도덕성을 원인으로 하여 행복을 결과로 도출하는 도덕적 인과성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행동하더라도 결코 그에 상응하는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오히려 도덕적으로 행동할수록 더 고통받고 괴로워하게 될 가능성이 더 높지요. 우리가 도덕적으로 행동한 만큼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경우가 아예 없지는 않다 하더라도, 이는 우연적인 것에 불과하므로 '덕과 행복의 필연적 결합'인 최고선 개념에 도달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율배반적 도식을 추론해 볼 수 있겠습니다.

정립 : 도덕적 인간은 도덕법칙의 명령에 따라 최고선을 실현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최고선의 실현은 가능해야만 한다.
반정립 : 도덕적 인간은 감성계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도 최고선을 실현할 수 없다.

이율배반(Antinomie)이란, 서로 반대되는 두 명제가 사실 동시에 참이라는 것이 증명되어 상충할 때 발생하는 일종의 딜레마 상황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최고선을 실현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최고선을 실현하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최고선을 실현하는 것이 의무라면, 우리는 최고선을 실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정립 명제는 참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유한한 한계를 지닌 인간으로서는 감성계에서 어떠한 방식으로도 최고선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참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이는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정립 : 최상선은 실현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최상선은 실현될 수 있어야만 한다.
반정립 : 인간은 자신의 유한한 한계로 인해 최상선을 온전히 실현할 수 없다.
정립 : 최상선에 상응하는 행복은 보장돼야만 한다. 따라서 최상선에 상응하는 행복은 필연적으로 보장 가능해야만 한다.
반정립 : 자연 인과성이 지배하는 감성계에서는 최상선에 상응하는 행복이 필연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최고선 문제와 관련한 이율배반이 '최상선의 실현 가능성 문제'와 '최상선에 상응하는 행복의 실현 가능성 문제'에서 이중의 배반적인 상황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최상선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즉, 우리 의지가 도덕법칙에 완전히 합치하는 일은 유한한 한계를 지닌 인간으로서는 단적으로 불가능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도덕법칙은 여전히 끊임없이 "너는 최상선을 실현해야만 한다"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우리 의무를 지켜 행해야만 하며 이를 해낼 수 있다는 도덕법칙의 명령과, 우리의 유한한 한계로서는 결코 이를 온전히 다 해낼 수 없다는 한계상황이 서로 충돌합니다. 이율배반의 문제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어찌어찌 최상선을 실현하는 일이 가능한 것처럼 여겨진다고 하더라도, 덕에 상응하는 행복을 보장해 주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인간은 행복을 그렇게 쉽게 산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며, 행복을 누리는 방식 역시 다릅니다. 무엇보다도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어떤 정도의 행복이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인지 인식하거나 확인할 수 있는 방법 자체가 없습니다. 최고선이 가능한 것처럼 여겨질 수 있기 위해서는 덕에 상응하는 행복이 보장될 수 있어야만 하지만, 자연 인과성이 지배하는 감성계에서는 결코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이 결과로 보장되지 않습니다.

이 역시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용어로 번역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라며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악 된 본성과 유한성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실현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율배반의 문제 상황에 처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의롭다 칭함을 받고, 또 아무리 성화의 과정을 거쳐 나간다 하더라도, 나도 모르게 다시 죄에 굴복하고 무너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은 여전히 온전히 지켜야 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은 "너는 더 도덕적으로 행동해야만 한다"고 끊임없이 명령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율배반의 문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할까요? 그리고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들의 끝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게 될까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칸트는 '하나님의 현존'을 '요청(Postulat)'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상 다음 글에서 보다 상세하게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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