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우리는 칸트의 저서 <도덕형이상학 정초>를 중심으로 칸트 윤리학의 근본 입장을 간략하게 살펴봤습니다. 칸트는 매우 엄격한 의무를 제시했습니다. 무척 좁고 따라가기 어려운 길을 보여 줬지요. 이번 글에서는 지난번 논의에 이어, 칸트 윤리학에서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는 몇 가지 입장을 <실천이성비판>을 중심으로 보다 더 상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도덕성과 행복의 관계:
행복은 결코 도덕성을 정초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한 차례 도덕성과 행복의 관계를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 논의를 잠시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행복주의 윤리학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행동할 때 그에 상응하는 행복이 충분히 그 결과로서 보장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 그러나 자연 인과성의 지배를 받는 감성계에서는 결코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이 보장될 수 없다. (3)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도덕적으로 행동함으로써 '행복해도 좋을 자격'을 갖추는 것뿐이다.

칸트는 이러한 입장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실천이성비판>에서 매우 강력한 주장을 폅니다. '행복은 결코 도덕성을 정초定礎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칸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욕구 능력의 어떤 객관(질료)을 의지의 규정 근거로 전제하는 모든 실천적 원리는 한결같이 경험적이며 아무런 실천 법칙도 제공할 수 없다." (KpV, Ⅴ21)

도덕성을 정초하기 위해 칸트가 취하는 전략은 이렇습니다. 도덕성의 원리에 속할 수 없는 불순한 것을 모두 제거하고 순수한 것만 남겨 놓는다면, 매우 엄격하고도 확고부동한 도덕성을 세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이 점에서 칸트는 도덕성의 영역에 들어올 수 없는 불순물, 즉 '경험적인 것'을 모두 배제하고자 합니다. 칸트는 왜 경험적인 것이 불순하다고 말하는 걸까요? 이에 대해 칸트는 "욕구 능력의 어떤 객관을 의지의 규정 근거로 전제하는 모든 실천적 원리는 한결같이 경험적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욕구 능력의 객관'이란 우리가 욕구하는 대상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배가 고플 때 내 눈 앞에 맛있는 밥이 있다면 이 밥이 욕구 능력의 객관이 됩니다. 또 내가 옷이 없어서 고민할 때 옷 가게에 멋진 옷이 진열돼 있다면 그 옷이 욕구 능력의 객관이 되는 것이고요. 따라서 우리가 그 밥을 먹기로 결단하고 그 옷을 사 입기로 결단한다면, 그 욕구 능력의 객관들(밥과 옷)이 우리 의지를 규정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제가 예시로 든 밥과 옷을 포함해 이러한 욕구 능력의 객관들은 하나같이 '경험적 대상'입니다. 지난 글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경험적 대상들은 특수한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고 있고요. 따라서 이러한 경험적 대상들을 욕구하며 이것들을 취하겠노라고 우리 의지를 규정하기로 결단하는 모든 종류의 원리도 마찬가지로 경험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이러한 경험적 원리들은 아무리 그 범위를 넓혀 봐도 '일반적 규칙(general rule)'은 제공할 수 있지만 '보편적 법칙(universal law)'을 제공해 주지 못합니다. 여기서 일반적 규칙은 어느 정도 예외가 허용되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학급에서 정한 규칙이나 교통법규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하지요. 그러나 보편적 법칙은 결코 예외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 기분이 안 좋다거나 특별한 사유가 있다고 해서 중력 법칙을 거스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칸트는 이처럼 '보편적 법칙'을 정립함으로써 엄격한 도덕성의 원리를 세우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타당한 도덕법칙을 입법하기 위해 경험적 요소를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경험적인 것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만 적용될 수 있을 뿐이니까요. 그렇다면 경험적인 것을 모두 제거하면 어떤 것이 남을까요? 경험과 무관하며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있는 '아프리오리(a priori)'한 것들만이 남습니다. 이러한 아프리오리한 것들은 철저히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지요. 이 점에서 칸트의 엄격한 도덕은 철저히 경험적인 것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이성적 도덕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칸트의 도덕에는 행복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행복 또한 철저히 경험적이기 때문이지요. 칸트는 행복을 "어떤 이성적 존재자의 전체 현존에 중단 없이 동반되는 삶의 쾌적함을 의식하는 것(KpV, Ⅴ22)"이라고 설명합니다. 삶의 쾌적함을 의식하기 위해서는 욕구 능력의 객관을 의지의 규정 근거로 삼아 쾌의 감정을 산출해야 합니다. 즉, 배가 고플 때 맛있는 밥을 먹고, 옷이 필요할 때 좋은 옷을 사 입으면서 생겨나는 쾌의 감정을 우리 삶 전체에 걸쳐 의식하는 게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이성적이지만 유한한 존재자인 우리 인간은 누구나 필연적으로 행복을 원합니다. 행복은 우리의 "욕구 능력을 불가피하게 규정하는 근거(KpV, Ⅴ25)"이지요. 그러나 이처럼 경험과 관계된 행복은 결코 엄밀한 의미에서 이성적인 도덕성을 정초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모든 경험적 요소, 심지어는 행복마저도 완전히 배제하고 철저히 이성만을 사용해 순수한 도덕법칙을 확립하는 것이 바로 칸트 윤리학의 가장 근본적인 목표입니다.

2. 너는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도덕성을 엄격하게 세우는 것까지는 좋은데, 우리가 과연 이를 지키고 따를 수 있을지가 우려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칸트 본인도 <정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대개 의무에 합치하는 행위의 준칙이 오로지 도덕적 근거와 자기 의무에 대한 표상에만 의거하는 단 한 번의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경험을 통해 완전히 확실하게 밝혀 내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 (중략) 실제로는 아무리 노력하여 검토해 봐도 우리는 이 은밀한 동기를 결코 완전히 간파해 낼 수 없다. 도덕적 가치가 문제가 될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보는 행위가 아니라 보지 못하는 행위의 내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GMS, Ⅳ407)

위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칸트가 제시한 도덕법칙에 따라 아무리 엄격하게 행동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말 도덕법칙에 따른 행동인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순수하게 도덕법칙을 따라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다른 충동들이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내가 어려운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었다고 하더라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내가 이렇게 멋진 모습을 보였으니 다른 사람들이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겠지?'라는 생각이 함께 작동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칸트에 따르면, 이런 경우는 '의무에 합치하는(pflichtmäßig)' 행동일 뿐이지 '의무로부터 나온(aus Pflicht)' 행동은 아니지요.

또 다른 사람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행동했다 하더라도, '이만한 금액을 타인을 위해 쓸 수 있는 내 자신이 정말 멋지고 대견한걸' 하는 자기애가 아주 은밀한 동기로 작동했을지 모릅니다. 이러한 점에서 칸트는 "이 은밀한 동기를 우리는 결코 완전히 간파해 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칸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런 순수한 원천에서 생겨난 행위는 전혀 없다 해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저러한 일들이 일어나는지가 아니라 이성이 모든 현상에서 독립해서 독자적으로 무엇이 일어나야 할지를 지시 명령한다는 점을 분명히 확신하는 것이다. (중략)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중략) 아마도 지금까지 세상에 단 하나의 실례도 존재한 적이 없던 행위가 실행될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러워할 수 있다 해도, 그럼에도 이 행위를 이성은 단호하게 지시 명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하는 것이다." (GMS, Ⅳ408)

설령 도덕법칙을 온전히 따르는 행동이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은 여전히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명령'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 사실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신의와 신뢰를 지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신뢰 없는 행동을 해도 괜찮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타인과의 신뢰를 지켜야만 한다"고 명령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요. 이 내면의 목소리가 바로 '이성'의 명령입니다.

모두가 신뢰를 지키지 않는 세상에서 나 홀로 신뢰를 지킬수록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이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신뢰를 지켜야만 한다"고 명령합니다. 이 명령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는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신뢰를 지키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는 것을 믿고, 신뢰는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신'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칸트가 지적하듯이, 우리 인간 본성은 "이처럼 존경할 만한 [도덕적] 이념을 자신의 수칙으로 삼을 만큼 충분히 고상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따르기에는 너무나 나약(GMS, Ⅳ406)"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도덕적으로 행동하면서 이 좁은 길을 기쁘게 걸어갈 수 있을까요?

조금 길지만, 아래의 인용문을 한번 꼼꼼히 살펴봅시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정욕적 경향성에 대해, 사랑스러운 상대나 그 상대를 접할 기회가 오면 이 정욕적 경향성에 도저히 저항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자. 이런 기회를 잡는 집 앞에 교수대가 설치되어 있어 이 사람이 쾌락을 누리고 난 즉시 매달도록 되어 있을 때 과연 자기 경향성을 제압하지 않을 것인가? 이 사람이 어떻게 답할지 우리는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사람의 군주가 곧 사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어떤 정직한 사람, 즉 군주가 그럴듯한 구실로 파멸시키고 싶은 정직한 사람에 대해 위증하기를 강요할 경우 아무리 생명에 대한 사랑이 크다 하더라도 이 위협을 극복할 수 있다고 여기는지 이 사람에게 물어보라. 위협을 극복할지 못할지 이 사람은 감히 확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극복하는 일이 자기에게 가능하다는 것을 이 사람은 주저없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 사람은 어떤 것을 해야만 한다고 의식하기 때문에 그것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하며, 도덕법칙이 없었다면 자기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자유를 자기 안에서 인식한다." (KpV, Ⅴ30)

이 인용문에서 칸트는 두 가지 사례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함부로 성범죄를 일삼는 사람의 예시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욕망이 너무 강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행동했다고 항변합니다. 사실 굉장히 어처구니없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종류의 변명이 먹혀드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러나 칸트는 이에 대해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정말로 그 사람이 자신의 욕망에 저항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의 성적 욕망이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하더라도, 그 욕망에 따라 범죄를 저지르게 될 경우 자신이 곧바로 교수대에 매달릴 것을 안다면, 과연 그때도 자신의 욕망을 참을 수 없겠느냐는 것입니다. 생명의 위험 앞에서 그 범죄자는 아마 높은 확률로 자신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며, 범죄를 저지르지 말아야겠다고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이 예시는 "너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성폭행해서는 안 된다"라는 도덕적 의무 앞에서는, 아무리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보여 줍니다.

두 번째 예시는 이렇습니다. 만약 어떤 포악한 왕에게 정직한 신하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왕은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는 다른 신하를 제거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 신하를 함부로 제거할 명분이 없습니다. 이때, 왕이 정직한 신하에게 와서 "나의 목적을 위해 거짓으로 증언하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너를 죽일 것이다"라고 협박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도덕적 의무에 따라 자신의 정직함을 계속해서 지키고자 한다면, 그래서 왕 앞에서 거짓으로 증언하기를 거부한다면, 결국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두려워 살아남고자 한다면, 그 정직한 신하는 지금까지 지켜 온 도덕적 원칙을 깨고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죽음의 위협은 모든 사람에게 심각한 두려움과 공포로 다가오기 때문에, 여기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정직함을 유지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칸트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합니다. 설령 이러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정직함을 지키는 일이 우리에게 단적으로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무척 어렵고 힘들지만, 우리는 그 도덕을 실천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나 자신이 죽음을 각오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도덕을 지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만큼은 우리에게 거부할 수 없는 사실로 다가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조차 정직함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여전히 도덕적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요.

바로 이것이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도덕법칙은 우리에게 "너는 해야만 한다"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명령을 의식할 때, 우리는 여러 주관적 제한과 방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즉시 이성이 명령한 "해야만 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이러한 "할 수 있다"를 칸트는 '자유(Freiheit)'라고 부릅니다. '해야만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인 것입니다.

제게는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칸트의 말이 무척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하루가 다르게 무너져 가는 교회 공동체를 바라보며,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 공동체를 지켜 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절망감으로 가득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독한 침묵 속에서 아무런 역사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든 공동체를 회복시켜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제 무능력함에 더 직면하는 시간들을 보냈지요. 이전 인터뷰에서도 잠깐 밝혔지만, 그래서인지 제게는 아직도 '망국 백성'의 정서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칸트의 이 명제에 있었습니다. 어려운 시기를 보내던 당시, 이 명제를 제게 적용해서 "성도는 교회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나는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현재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럽더라도, 우리 주변과 교회가 무너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성도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어떠한 절망 가운데 처하더라도 그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지를 규정하는 신앙적·실존적 결단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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