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과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라는 물음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간략하게 살펴봤습니다. 다음과 같이 간단히 요약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1) 도덕은 결코 행복을 보장해 줄 수는 없지만, 행복해도 좋을 자격을 갖추도록 해 줄 수는 있다. (2) <순수이성비판>은 도덕성과 이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이 필연적으로 결합되는 것을 '최고선(das höchste Gut)'이라고 부른다. (3) <순수이성비판>은 감성계에서는 최고선이 온전히 실현될 수 없기 때문에, 현세가 아닌 내세적이고 지성적인 도덕 세계에서 최고선이 마치 가능한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를 토대로,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라는 물음에 "나는 도덕적으로 행동해야만 합니다. 즉 행복해도 좋을 자격을 갖출 수 있도록 그렇게 행동해야만 합니다"라고 답변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도덕에 대한 칸트의 입장을 절반 정도, 그것도 도덕신학의 측면에서만 간신히 조명하는 것에 그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덕신학으로 나아가기 이전 단계에서 논의되는 순수한 '도덕성'의 의미가 무엇인지 예비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무척 방대하고 복잡한 논의이므로, 짧은 지면에 담아내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 늦어지는 감이 있지만, 우리의 주된 목적인 '칸트와 희망의 신학'으로 넘어가기 전에 앞으로 2회 차에 걸쳐 칸트가 최고선의 구성 요소 중 하나로 제시한 '도덕성'의 의미를 보다 꼼꼼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1. 탁월함이 곧 선이다?
고전 윤리학과의 결별

<도덕형이상학 정초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약칭 <정초 GMS>)는 칸트의 윤리학 관련 저서 중 기초이자 중심이 되는 책입니다. 칸트가 직접 쓴 윤리학 저술 중에서는 그나마 쉬운 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고요(그럼에도 이 책을 혼자 끝까지 읽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혹 관심이 있는 분들은 서울대 박찬구 명예교수의 <칸트의 도덕형이상학 정초 읽기>(세창출판사)를 참조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정초>를 시작하면서, 칸트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에서 세계 안에서도, 심지어 세계 바깥에서도 제한 없이 선하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ein guter Wille)뿐이다." (GMS, Ⅳ393.)

이 유명한 구절을 통해, 칸트는 자신 이전에 전개된 윤리학 이론들과 결별을 선언합니다. 전통적인 윤리학, 특히 고대 그리스에서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윤리학은 '탁월함의 윤리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탁월한 것(Arete)', 즉 '가장 좋은 것'이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본 것입니다.

얼른 보기에 이는 이해하기 무척 어려운 입장입니다. 왜 탁월한 것이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단어 'Good'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영어 사전에서 'Good'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크게 두 가지 의미가 함께 나오는데요. 하나는 '좋은·훌륭한'이라는 의미, 또 다른 하나는 '(도덕적으로) 선한'이라는 의미입니다. 칸트는 고대 철학자들이 이 'Good'이라는 단어에 내재된 '좋은' 혹은 '탁월한'이라는 의미와 '(도덕적으로) 선한'이라는 의미를 구분하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탁월한 것이 곧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라고 오해했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한번 생각해 볼까요? 우리는 어떤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을 때 "이 책은 좋은 책이야(This is a good book)"라고 말합니다. 누군가 좋은 질문을 했을 때는 "좋은 질문입니다(Good question)"라고 말하고요. 탁월한 수리 기술을 가진 수리공을 만났을 때는 "그분은 좋은 수리공이셔(He/She is a good refairer)"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는 'good'이 '좋은', 혹은 '탁월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대표적인 예시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분은 좋은 선생님입니다(He/She is a good teacher)"라고 말하는 경우, good의 의미가 무척 애매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수능이나 공무원 시험 '일타 강사' 선생님들처럼 가르치는 기술이 탁월한 선생님을 의미할 수도 있고, 또는 도덕적으로 선한 인품을 갖고 계셔서 존경할 만한 선생님이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좋은 친구야(He/She is a good friend)"라고 말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친구는 도덕적으로 매우 악하지만, 나에게만큼은 좋은 친구라는 의미에서 이런 문장을 사용할 수도 있겠고, 반대로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족이지만,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표현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독자분이라면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복음성가를 익히 알고 계실 텐데요. 가사는 다음과 같지요.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이 가사의 영어 버전은 "God is so good. God is so good. God is so good. He is good to me"입니다. 여기서 'good'은 무슨 뜻으로 사용됐을까요?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good'의 두 가지 의미 모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내게 (탁월함의 의미로) 좋은 분이라는 해석입니다(God is good to me). "우리 아빠는 좋은 아빠야"라는 말이 우리 아빠가 나에게만큼은 최고로 탁월한 아빠라는 말로 이해될 수 있듯이 말이지요. 둘째로,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선한 분이라는 해석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선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위 가사는, 하나님이 내게 탁월하게 좋은 분이시자 동시에 선하신 분이라는 의미를 함께 담은 고백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원래 논의로 되돌아와서, 이러한 점을 볼 때 고대 철학자들이 '좋음'의 의미를 추적하면서 최초로 '도덕적 선'의 의미를 함께 물었던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고대 철학자들은 탁월함의 의미를 물으면서 어떻게 하면 유덕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혜·용기·절제 등을 덕스러운 것으로 설명하면서, 이러한 덕을 갖춘 좋은 사람이 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칸트가 생각하기에, 탁월한 것은 결코 도덕적으로 선한 것과 완전히 일치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탁월하면서 동시에 도덕적으로 선한 분이시지만, 유한한 한계를 지닌 인간은 탁월하다고 해서 결코 도덕적으로 선할 수 없다고 본 것이지요. 칸트의 말을 조금 더 살펴봅시다.

"지성, 재치, 판단력 그리고 그 밖의 정신적 재능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 혹은 기질의 특성인 용기, 결연함, 끈기도 확실히 여러 가지 면에서 선하고 바람직스럽다. 하지만 의지가 (중략) 선하지 못할 때는 이것들도 극단적으로 악하고 해로울 수 있다." (GMS, Ⅳ393.)

"격정과 열정의 억제, 자제, 그리고 냉철한 숙고는 여러 면에서 선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격의 내적 가치 가운데 일부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것들을 제한 없이 선하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물론 고대인들은 이것들을 무조건적으로 찬양했지만 말이다.) 이것들도 선의지의 원칙이 없으면 지극히 악해질 수 있고, 또 악한 자의 냉혹함도 그런 것이 없을 때 그에 대해 악하다고 여겼던 것보다 훨씬 더 그를 위험스럽게 만들 뿐만 아니라, 직접 우리 눈에도 한층 더 가증스럽게 보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GMS, Ⅳ394.)

여기에서 칸트는 분명하게 '덕윤리학', 즉 '탁월함의 윤리학'을 거부합니다. 지성, 재치, 판단력, 혹은 격정과 열정을 억제하고 자제하는 것, 냉철하게 숙고하는 것 등은 고대 철학자들이 말한 유덕함의 일종이었습니다. 칸트가 여기에서 언급하는 지성적인 사람, 재치 있고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 격한 감정을 잘 억제하고 인내하는 사람, 냉철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탁월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칸트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선한 의지'가 전제돼 있지 않는 한, 결코 도덕적으로 선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선한 의지를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악한 사람이 이러한 지성과 재치와 판단력과 인내 등을 갖추고 있다면, 이를 갖추고 있지 않은 악한 사람보다 훨씬 더 무섭고 악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영화 '배트맨' 시리즈에 등장하는 '조커'라는 캐릭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조커는 악의로 똘똘 뭉친 사람이지만, 매우 똑똑하고 지성적인 사람입니다. 또한 독특한 유머 감각을 갖고 있고, 판단력이 뛰어나기도 하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잘 인내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커라는 캐릭터를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점에서 칸트는 반드시 선한 의지가 전제돼야만 도덕적으로 선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선의지와 의무로부터 나온 행동

그렇다면 칸트에게 선의지란 무엇일까요? 선의지를 설명하기 위해 칸트는 '의무(Pflicht)'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왜냐하면 "의무 개념은 어느 정도의 주관적 제한과 방해 아래에 있기는 하지만 선의지 개념을 포함하기"(GMS, Ⅳ397.) 때문입니다. 의무가 무엇인지 이야기하기 위해, 칸트는 네 가지 종류의 행동을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1) 어떤 행위가 의무에 반하는 경우, (2) 의무에 합치하는(pflichtmäßig) 행동이지만 이 행위를 하려는 직접적인 경향성을 갖지 않은 경우, (3) 의무에 합치하면서 동시에 이 행위를 하려는 직접적인 경향성을 가진 경우, (4) 의무로부터 나온(aus Pflicht) 행동인 경우

먼저, 칸트는 의무에 반하는 행동의 경우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합니다. 의무에 반하는 행동은 의무가 무엇인지 전혀 몰라도 당연히 비도덕적인 행동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의무에 합치하는 행동이기는 하지만, 이 행위를 하려는 직접적인 경향성을 갖지 않은 경우도 칸트는 무시합니다. 이 경우를 조금 더 상세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이 겉보기에는 도덕적인 행동일 수 있습니다. 이웃에게 자선을 베푼다던지, 혹은 누군가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고 정직하게 답하는 것은 도덕적인 행동이지요.

그러나 도덕적인 행동을 하고 싶지 않은데도 이런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부모님께 혼나기 싫어서 억지로 정직하게 대답하는 아이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이 아이는 정직하게 대답하고자 하는 직접적인 경향성 없이 의무에 합치하는 행동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아이의 행동은 부모님에 의해 한 것이지 아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한 것이 아니므로, 도덕적인 행동으로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칸트가 생각하기에 판정하기 어려운 것은 세 번째 경우, 즉 행위가 의무에 합치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행위하고자 하는 직접적인 경향성을 함께 갖고 있는 경우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칸트는 상인의 예시를 듭니다. 이 상인은 매우 정직한 장사꾼입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고객에게 바가지를 씌우지도 않고, 어린아이가 물건을 사러 와도 정직하게 물건을 내주는 사람입니다. 이 장사꾼은 정직하게 장사하고 싶어 하는 경향성도 갖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고, 이것이 더 많은 매출을 올리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칸트는 이러한 정직이 결코 도덕적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도덕적 행동의 동기에 '이기적인 의도'가 함께 뒤섞여 들어왔기 때문입니다(GMS, Ⅳ397.).

이 점에서 칸트는 '의무에 합치하는' 행동이 아니라, '의무로부터 나온' 행동만이 참된 도덕적 의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더욱 장사가 잘 될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정직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직하게 행동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할 때, 비로소 도덕적인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칸트는 선의지가 어떤 결과를 잘 도출하거나 혹은 유용하기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려고 함(das Wollen)' 때문에 선하다고 말합니다(GMS, Ⅳ394.).

이는 한편으로, 칸트 윤리학이 지닌 '동기주의적' 특징을 잘 보여 줍니다. 칸트의 윤리학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서 더욱 많은 행복을 주는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선한 행동이라고 말하는 '결과주의적' 공리주의 윤리학과는 달리, 그 사람이 어떤 '의도'와 '동기'로 행동했는지가 도덕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말합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는 성경 말씀과도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이지요.

또 다른 한편에서는 칸트 윤리학이 무척 엄격한 토대 위에서 도덕성을 세워 나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판단에서는 장사가 잘되려는 목적으로 정직하게 행동하는 상인 정도만 해도 충분히 도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칸트는 그러한 경우마저도 결코 도덕일 수 없다고 단호하게 선을 긋고 있습니다. 오직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에' 행할 때, 그 경우에만 도덕적으로 선할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기본적인 입장입니다. 이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아주 좁은 범위의 행동만을 도덕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심지어 칸트 스스로도 이처럼 의무로부터 나온 도덕적 행동이 우리의 경험 안에서 실제로 가능한지 의심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무척 어렵고 힘든 일이지요. 인간의 본성은 의무의 이념을 자신의 수칙으로 삼을 만큼 충분히 고상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따르기에는 너무나 나약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우리 행위의 내적 동기에 어떤 불순한 것들이 섞여 들어갔는지 스스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GMS, Ⅳ406-407.). 마치 주님의 계명을 온전히 따르는 일이 무척 좁고 어려운 길인 것처럼, 우리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마 26:41) 것처럼,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롬 7:19)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3.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계명을 따라야 하는 이유

<정초>에서 칸트는 이러한 의무 개념을 확장하여 '정언명령'의 형식을 정립합니다. 정언명령은 "너는 해야만 한다"라는 무조건적 명령이자 의무입니다. 그리고 선의지는 이러한 정언명령에 따르고자 하는 의지를 의미합니다. 정언명령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제가 이전에 기고한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사유들: 니체, 칸트, 레비나스'라는 글에 어느 정도 밝혀 뒀으니, 이를 참조해 주시면 무척 기쁠 것 같습니다. 이 글에서 저는 조건적 명령인 '가언명령'과 무조건적 명령인 '정언명령'을 구분하고, 무조건적 정언명령만이 도덕적 명령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어쩌면 많은 경우, 우리의 신앙은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보다는, 오히려 가언명령과 같은 쉽고 넓은 길을 가는 것으로 드러날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네가 현세에서 충분한 복을 받고자 한다면, 너는 주님의 계명을 따라야만 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전 글에서도 밝혔던 것처럼, 이러한 사유는 한국교회를 좀먹는 번영신학과 다르지 않습니다. 도덕적으로 행동하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행복주의 윤리학을 반복하는 것과도 다르지 않고요.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은 무척 좁고 험한 길입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의 계명에 따라야만 하기 때문에, 즉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지, 행복해지기 위해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현세에서 복을 받고 행복해지기 위해 주님의 계명을 따르고자 한다면, 이는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리 현세에서 주님의 계명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결코 주님의 복이 현세에서 보장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상인의 예시처럼, 우리가 현세의 복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주님의 계명을 따르고자 한다면, 이는 '의무에 합치하는' 행동에 불과하지, 순수하게 '의무로부터 나온' 행동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행동을 과연 참된 신앙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은, 칸트가 제시한 엄격한 의무 개념처럼 보다 좁고 어려운 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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