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우리는 '비판(Kritik)'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지' 간략하게 살펴봤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이성으로는 사물의 본성을 결코 인식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을 넘어서는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결코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이었지요.

이번 글에서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칸트가 직접 말했던 아래 물음들을 살펴볼까 합니다.

"나의 이성의 모든 (사변적인 것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관심은 다음의 세 물음으로 통합된다: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3.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KrV, A804=B832-A805=B833)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에서 직접 했던 말입니다. 위의 'KrV'라는 인용 표기가 보이시나요? 이것은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의 약자입니다. A는 <순수이성비판> 초판본의 독일어 원문 페이지를, B는 재판(second edition)의 독일어 원문 페이지를 표시해 둔 것이에요. 이 구절을 보면, 칸트가 어떤 관심사를 갖고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는지 알 수 있지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초판본.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초판본. 

칸트의 비판철학은 매우 넓고 방대하고 복잡한 논의를 담고 있지만, 결국 이 세 가지 물음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바로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Was kann ich wissen)?",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Was soll ich tun)?", 그리고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Was darf ich hoffen)?"이지요. 그러니 지난 글에서 다룬 논의는 칸트가 물었던 첫째 질문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지요.

그러나 우리의 주된 주제인 '칸트와 희망의 신학'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셋째 물음인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를 진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 물음을 줄여서 '희망-물음'이라고 부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희망-물음은 둘째 물음인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와 아주 밀접한 관계 속에서만 그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에, 이번 글에서는 그 연관성을 함께 찾아보려고 합니다.

1.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물음과
행복해도 좋을 자격을 갖추는 일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할까요?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뭘까'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 일이 떠오를 것입니다. 미처 끄지 못한 가스 밸브를 잠그는 일, 갑작스레 생긴 야근으로 친구와 약속을 취소하기 위해 연락해야 하는 일, 또 오늘까지 납부해야 하는 건강보험료나 할부금을 챙기는 일 등등…. 이런 일도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죠. 그러나 이런 일들은 아주 개인적이고 사적인 일일 것입니다. 칸트는 이러한 개인적인 일들을 넘어 모든 인류가 함께 보편적으로 추구해야만 하는, '해야만 하는 일'을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류가 함께 보편적으로 해야만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에요. 이를 칸트의 말로 바꿔 표현하면 "도덕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도덕법칙이 무엇이고, 또 우리가 어떻게 도덕법칙에 따를 수 있는지 한참 논의해야 하는데, 이 이야기는 조금 복잡하니 다음 글에서 조금 상세하게 다뤄 볼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왜 도덕적으로 행동해야만 하느냐는 것이죠. 칸트 이전의 많은 철학자들은 그 이유를 '행복'에서 찾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죠. 우리는 모두 행복해지고 싶어 합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맛있는 것을 먹기도 하고, 좋은 곳에 여행을 가기도 하고, 사랑을 하기도 하고, 우정을 쌓기도 하고, 또 의미 있는 일들을 찾아 하기도 해요. 그러나 고대 철학자들은 도덕적으로 행동할 때에야 비로소 가장 지고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윤리학적 입장을 우리는 '행복주의 윤리학'이라고 부릅니다. 이를 아주 거칠게 정리하면, 이렇게 표현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만약 네가 진정으로 행복해지고자 한다면, 너는 도덕적으로 행동해야만 한다!"

그러나 칸트는 이와 같은 입장을 거짓말처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우리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행동한다고 한들, 정말 행복해질 수 있기는 해? 오히려 도덕적으로 행동할수록 더 괴롭고 힘들어지기만 하는 것 아니야?'라고 생각한 것이죠. 실제로 우리 주변을 한번 돌아봅시다. 도덕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오히려 세상 물정 모르는 어수룩한 사람이라고, 괜히 손해만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풍토가 우리에게 있지 않나요? 오히려 조금씩 약삭빠르고 교활하게, 비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우리 안에 있지는 않나요?

칸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평범한 지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도덕적으로 선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하고, 반대로 악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요. 그러니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불행을 겪는 것을 보면, 혹은 도덕적으로 매우 악한 사람들이 벌을 받지 않고 떵떵거리며 잘사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이를 부당하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칸트가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아마 칸트의 사유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권선징악적 직관'이 내재해 있는 것 같아요.

실제로 우리는 그런 사례를 참 많이 봅니다.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분투하다가 결국 불타 죽었던 전태일 같은 분들, 혹은 구의역에서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다가 사망한 김 군 같은 분들, 최근 SPC 공장에서 일하다 기계에 끼여 죽거나 다친 노동자분들, 이처럼 열심히 분투하며 자신의 삶을 살던 분들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지 못하고 불행한 결말을 맞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이를 무척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당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하기 마련이고요.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아무리 도덕적으로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행복해지기 어려워요. 오히려 불행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칸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도덕법칙은 오직 행복해도 좋을 자격(Würdigkeit, glücklich zu sein)을 갖추게 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만 하는지를 명령한다." (KrV, A806=B834.)

결국, 우리가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이유는 '행복해도 좋을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고대 철학자들이 말했던 것과는 달리, 우리는 아무리 도덕적으로 노력해도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복해도 좋을 자격을 갖추는 것만은 여전히 가능합니다. 우리 인생이 아무리 어렵고 고달프다 하더라도, 또 아무리 도덕적으로 행동해도 우리 삶이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안다 하더라도, 행복해도 좋을 자격을 갖추기 위해 분투하는 것만큼은 여전히 가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쁘든지, 슬프든지, 행복하든지, 괴롭든지 간에, 여전히 도덕법칙은, 즉 도덕적 의무는 변함없이 "너는 행복해도 좋을 자격을 갖출 수 있도록 도덕적으로 행동해야만 한다"라고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2. 최고선에 대한 희망

이제 드디어 중요한 '희망-물음'을 이야기할 때가 됐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할까요? 우리는 도덕적으로 행동해야만 합니다.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행복해도 좋을 자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충분히 도덕적으로 행동했다면, 그래서 행복해도 좋을 자격을 충분히 갖추게 되었다면, 바로 그때에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을까요? 우리가 행복해도 좋을 자격을 갖춘 바로 그 정도만큼의 행복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희망해도 좋게 됩니다. 바로 여기가 우리의 희망-물음이 출현하는 지점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의 현실에서는 아무리 도덕적으로 행동한다 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행복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는 '행복을 희망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될 뿐입니다. 그리고 칸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이성에게는 행복만으로 완벽한 선이 되기에는 어림도 없다. (중략) 그러나 도덕성만으로는, 그리고 이와 함께 한낱 행복해도 좋을 자격을 갖추는 일만으로는 또한 완벽한 선이기에는 한참 멀다. 이것(최고선)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도록 처신했던 사람이 행복에 참여하게 될 것을 희망할 수 있어야만 한다." (KrV, A813=B841.)

도덕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 도덕을 위해 분투하는 사람은 더욱더 크고 완전한 선을 이루고 싶어 할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이처럼 도덕적으로 가장 완전한 선을 보고 '최고선(das höchste Gut/the highest Good)'이라고 불렀습니다. 가장 지고하고, 또 도덕적으로 가장 완전한 선이라는 뜻이죠. 그러나 칸트가 생각하기에, 행복해도 좋을 자격을 갖추는 일만으로는 최고선에 도달하기 어려워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행복만 갖고서 최고선에 도달하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고요. 도덕성을 통해 행복해도 좋을 자격을 충분히 갖춘 다음, 그에 상응하는 행복이 충분히 보장될 때, 그래서 도덕성과 행복이 필연적으로 결합될 때, 그제서야 비로소 최고선이 가능할 수 있다고 칸트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은 현실에서 보장되지 않고, 다만 '희망'의 대상이 될 뿐이라는 것이죠. 이전 글에서 우리가 '현상(Erscheinung)'과 '사물 자체(Ding an sich)'를 구분했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우리는 사물의 본성, 즉 사물 자체를 인식할 수 없고, 사물 자체로부터 나오는 현상만을 경험할 수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우리가 경험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현상세계(앞으로는 현상계, 혹은 감성계라고 부르겠습니다)는 물리법칙과 같은 자연 인과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행복이 결과로 도출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자연 인과성의 원리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최고선을 실현할 수 있을까요?

"세계가 모든 도덕법칙에 맞는 한에서 (세계는 이성적 존재자의 자유에 따라 그럴 수 있고, 도덕성의 필연적 법칙에 따라 그러해야만 하듯) 나는 세계를 도덕 세계라고 부른다. 이 세계는 그런 한에서 오롯이 지성계(intelligibele Welt)로 생각되는데, 왜냐하면 거기에는 도덕의 모든 조건들(목적들)과 모든 장애물들(인간 본성의 나약함과 불순함)조차 도외시되기 때문이다." (KrV, A808=B836.)

칸트는 우리가 현상으로서 경험할 수 있는 감성계가 아닌, 사물 자체의 세계인 지성계에서 이러한 최고선이 가능할 수 있다고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감성계가 '존재하는 것들', 즉 존재자들의 세계라면, 지성계는 '존재해야만 하는 것들', 즉 당위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지성계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혹은 존재하지 않는지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물 자체를 결코 인식하거나 증명할 수는 없지만, 즉 컵 자체의 본성을 인식하거나 증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적인 컵을 통해 컵 자체의 본성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사물 자체의 세계인 지성계 역시도 존재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당위의 세계인 지성계에서는 도덕성을 원인으로 하여, 행복을 결과로 도출하는 것이 가능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칸트는 이를 '도덕 세계(moralische Welt라)'고 부릅니다. 칸트는 이러한 도덕 세계를 "우리를 위한 내세"1)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현세에서는 아무리 도덕적으로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행복해질 수 없으니, 현세가 아닌 내세에서라도 도덕적 행복을 희망해 보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이를 우리의 신앙의 용어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산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행복이 찾아오나요? 그렇지는 않죠. 오히려 하나님 뜻에 따라 살려고 아무리 노력하고 분투한다고 해도 우리의 삶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의 삶이 이러하지만, 우리가 내세에는, 주님께서 계신 곳에서는, 우리의 선한 싸움을 다 싸운 후에는,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쓸 것이라고 희망하는 것만큼은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요? 칸트가 우리가 희망해도 좋을 행복이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품은 의의 면류관에 대한 희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칸트는 이러한 지성적이고 내세적인 도덕 세계에서 최고선이 온전히 가능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난 글에서 우리는 결코 이론적-객관적으로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증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명도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를 '이론적 불가지론'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주관적-실천적으로는 마치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처럼 여기는 믿음을 가질 수는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를 '실천적 유신론'이라고 부릅니다. 즉 칸트는 하나님에 대해 이론적으로는 불가지론의 태도를 취하지만, 실천적으로는 유신론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결코 그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주관적으로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질 수 있으면, 전능한 도덕적 신인 하나님이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을 얼마든지 보장해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칸트는 하나님을 감성계의 자연 인과성의 원리와, 또 지성계의 자유 인과성의 원리, 즉 도덕적 인과성의 원리 모두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 아래에서 우리는 비록 작금의 현실이 괴롭고 절망적이라고 할지라도, 마치 언젠가 저 내세에서만큼은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이 보장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희망을 잃지 않는 인간은 현실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도덕적으로 전진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넘어지고 무너져도, 전지한 하나님께서 나의 도덕적 분투를 다 알고 계시며, 또 전능한 하나님께서 그에 상응하는 행복을 언젠가는 보장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다시금 꾸준히 최고선을 추구하기 위해 분투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칸트 희망철학의 근본적인 지향점입니다.


1) KrV, A811=b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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