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2일 날씨 맑음. 오늘은 축구를 했다. 참 재미있었다."

나의 여름방학 일기는 항상 이 모양이었다. 일기란 날마다 겪은 일을 기록하고 성찰하는 '하루의 기록'일 텐데, 사실상 미루고 미루다가 개학 전날 한 번에 40일 치 기록을 몽땅 다 써 버리는 '하루 만의 기록'이었다. 개학이 다가오면 매일을 기록하고 성찰하는 힘 대신, 모든 일을 하루 만에 기록(조작)할 수 있는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났다.

사순절을 지내다 보면 부랴부랴 해치우던 방학 일기가 떠오른다. 사순절은 예수님과 함께 하루하루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는 40일의 여정이다. 하지만 예수님과 보조를 맞춰 걸어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순절 묵상과 실천을 은혜롭게 시작했지만, 삶에 치여 하루 이틀 미루고 놓치다 보니 어느새 예수님은 저만치 앞서 걸어가고 계시고 우리는 뒤처진다. 어느덧 십자가의 윤곽이 보이는 사순절 막바지에 접어들면, 서둘러 예수님과 거리를 좁혀 보겠다고 방학 일기를 하루 만에 해치우듯 '성금요일' 단 하루 만에 헐레벌떡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려 해 본다.

하루 만에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가성비 좋은 방법은 예수님의 유언과도 같은 '가상칠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이다. 하지만 가상칠언으로 사순절 묵상을 단번에 해치우려 했던 불순한 의도 때문일까? 일곱 말씀 하나하나가 몰아 쓴 일기마냥 공허하게 느껴진다.

<예수의 마지막 말들 -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 / 플레밍 러틀리지 지음 / 손승우 옮김 / 비아 펴냄 / 168쪽 / 1만 2000원 
<예수의 마지막 말들 -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 / 플레밍 러틀리지 지음 / 손승우 옮김 / 비아 펴냄 / 168쪽 / 1만 2000원 

그런 와중에 다행인 점은 플레밍 러틀리지의 <예수의 마지막 말들>(비아) 같은 좋은 가상칠언 안내서가 있다는 것이다. 나처럼 나태한 순례자들도 숨을 고르고 십자가를 차분히 헤아릴 수 있게 해 주는 선물이다. 러틀리지는 가상칠언 앞에서 무의미와 공허함을 느끼는 우리, 성실한 묵상과 성찰에 실패했던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 바로 아래로 데려다주고, 예수님의 최후 모습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비친 그분의 삶을 보게끔 한다. 단 일곱 개뿐인 말씀인데도, 예수님과 날마다 함께했던 것처럼 그분의 삶이 펼쳐지는 은총을 맛보게 한다.

십자가는 본디 '망각'의 장치다. 로마제국이 반역자를 처형하던 틀이었다. 아무리 금칠을 하고 보석을 붙여도, 본래는 단두대 같은 공개 처형 틀이다. 존재를 저주하고 모욕하여 지워 버리는 도구다. 러틀리지는 십자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가장 끔찍한 사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아무도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17쪽)

십자가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명백하게 "당신들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 이 사람은 인간이 아니"(18쪽)라고 말한다. 십자가에 달린 이는 예수님만이 아닐 텐데, 우리는 예수님 외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다른 이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위력이다. 그곳에서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철저히 망각하게 하되, 그가 왜 그렇게 죽었는지를 선명하게 기억하게 하고, 그와 같은 일일랑 꿈도 꾸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 것이다. 당신도 이 꼴이 되기 싫거든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인해 십자가는 '기억'의 장치가 됐다. 십자가는 한 사내의 존재를 흔적도 없이 지우고자 했지만, 우리는 기억한다. 그 사내의 이름을, 그의 삶을, 그리고 그가 지고 간 세상의 죄를, 그것도 모자라 그분의 마지막 숨소리와 표정, 그리고 마지막 말씀까지도. 게다가 십자가에 달린 사람처럼 살겠다고 다짐한다. 이 기억이야말로 십자가가 가장 바라지 않던 상황이다. 러틀리지가 들려주는 일곱 말씀의 설교로 우리는 많은 것을 다시 기억하게 된다.

프랑스 오베르쉬르우아즈성당에 위치한 십자고상. 뉴스앤조이 여운송
파리 생쉴피스성당에 위치한 십자고상. 뉴스앤조이 여운송

가상칠언의 첫째 말씀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를 들으며 우리는 예수님이 죄인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기억한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에서 예수님이 어떤 사람들과 삶을 함께하셨는지를, "여자여,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이다. 이 사람이 너의 어머니시다"에서 예수님이 어떤 공동체를 꿈꾸셨는지를,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절규에서 우리를 살리기 위한 그분의 낮아지심을, "목마르다"를 들으며 예수님이 품었던 갈망을, "다 이루었다"에서 그가 이루신 놀라운 일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라는 마지막 말씀에서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셨는지를 기억하게 된다. 일곱 말씀 하나하나를 헤며 그분의 삶을 불러 보는 것이다.

누군가는 가상칠언을 거짓이라고 말한다. 마치 내 방학 일기가 뒤늦은 재구성인 것처럼 말이다. 가상칠언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개수와 내용에서 복음서끼리 불일치할 리가 없고, 또한 초주검으로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그렇게 많은 말을 할 수도 없다는 이유에서다. '가상架上칠언'이 '가상假想의 칠언'이라는 것이다.

물론 가상칠언이 예수님이 손수 남기신 역사적 유언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가상칠언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알려 준다. 바로 '예수는 죽었다'는 것이다. 그는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도록 죽었다. 그러나 가상칠언은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남김없이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역사적 증거다. 일곱 말씀은 부랴부랴 쓴 일곱 개의 아무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이 일곱 말씀을 언제나 하나의 전체로 보았다." (121쪽)

가상칠언은 우리를 위해 사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분에 대한 온전한 증언이다. 이 증언을 따라감으로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 죽을 준비를, 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그리스도로 고백할 준비를 마친다. 이번 사순절에는 가까스로 "참 잘했어요"라는 보라색 도장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이광희 /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내일의 예배>(브랜든선교연구소), <예배의 감각>(비아)을 한국어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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