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퍼리안이 되기까지

1992년 10월 28일 자정, 지금도 그때를 잊지 못한다. 이날은 다미선교회가 지목한 예수님 재림의 때였다. 당시 나는 합리주의를 표방하던 자유주의신학이 일찍 자리 잡은 교회에 다녔다. 하지만 다미선교회의 거짓 시한부종말론은 합리주의자·보수주의자·신비주의자를 가리지 않고 전국 교회를 강타했다. 내가 다니던 교회 친구들은 학교를 자퇴하고 부모님과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모임에 들어가야만 했다. 다행히 나는 불신자 가정이었던 덕분(?)에 의심이 많아 그 교회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학교 친구의 인도로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옮겼다.

1년 후, 실제로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1992년 가을 10월 28일 자정, 이전 교회 친구들과 선배들을 텔레비전 뉴스에서 다시 만났다. 그들이 흰옷을 입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모습은 전국에 생중계됐다.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다. 다시 1년이 지난 후, 뒤늦게 고등학교에 입학한 친구와 어느 가게에서 마주쳤지만,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지나쳤다. 

친구와의 완전한 작별을 확인한 1993년, 나의 신앙은 혼돈 속에 있었다. 기독교 신앙은 비이성적으로 보였고, 광적인 굿을 하는 무당의 그것과 기독교가 어떻게 다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신앙과 실제 삶이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내 생각을 바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연히 교회 대학부에서 기획한 강의를 들었는데, 신칼뱅주의 기독교 세계관을 담은 브라이언 왈쉬·리차드 미들톤의 <그리스도인의 비전>(IVP)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이는 내 신앙과 내가 사는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와 회복의 사역으로 통합할 수 있다는 어렴풋한 희망을 줬다. 그 경험은 마치 C. S. 루이스를 회심으로 이끈 기차역에서의 잔잔한 희열과도 같았다.

강의 내용은 희미하지만 그때의 분위기와 공기와 희열이 지금까지 나를 이끌고 있다. 세상과 분리되지 않는 통합된 신앙의 가능성을 발견한 후, 나는 서점으로 달려가 <그리스도인의 비전>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이후 나는 칼뱅주의와 신칼뱅주의 전통의 교회와 신학교, 라브리(L'Abri) 공동체에서 자라고 사역자로 섬겼다. 이 경험은 자연스럽게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헤르만 도예베르트, 앨빈 플랜팅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알버트 월터스, 프란시스 쉐퍼, 한스 로크마커, 리처드 마우 등이 쓴 책들 앞으로 나를 인도했다.

나는 이들의 사상을 이해하고자 노력했으며, 급기야 라브리에 들어가 문화 변증과 공동체 생활에 나의 젊음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문화적 칼뱅주의자로 구분되는 신칼뱅주의자들의 책들은 독해하기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언제나 낑낑대며 한 권 한 권 읽어 내려갔고, 친구들과 독서 토론도 해 봤지만, 누가 옳은지 알 수 없는 답답한 시간만 지속됐다. 이러한 지루한 시간을 거친 지금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됐지만, 최근까지도 이들의 사상을 하나로 꿰는 선생님이나 안내서가 있기를 내심 바랐다.

카이퍼 전통의 길잡이

정말 기쁜 소식은 기독교 세계관의 희열로 나를 이끌었던 IVP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많은 사람을 위해 책을 출간했다는 것이다. '커비래잉공공신학센터(Kirby Laing Centre for Public Theology)'의 크레이그 바르톨로뮤가 쓴 <아브라함 카이퍼의 전통과 삶의 체계로서의 기독교 신앙>이다. 영어 제목 '카이퍼 전통의 윤곽(Contours of Kuyperian Tradition)'은 이 책의 목적을 보다 명확하게 알려 준다. 바르톨로뮤 또한 머리말에서 이 책의 목적이 "카이퍼 사상의 체계적 윤곽을 분석하는 것"과 "카이퍼의 동료 및 제자들의 사상"을 소개하고 분석해서 오늘날 배울 점을 묻는 것이라고 밝힌다(36쪽). 그러므로 이 책의 목적은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첫째는 카이퍼와 동료들의 사상을 소개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들 사상의 현대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다. 과연 이 책은 저자의 의도를 독자들에게 충실히 전달했을까?

<아브라함 카이퍼 전통과 삶의 체계로서의 기독교 신앙> / 크레이그 바르톨로뮤 지음 / 이종인 옮김 / IVP 펴냄 / 558쪽 / 3만 2000원. 사진 제공 IVP
<아브라함 카이퍼 전통과 삶의 체계로서의 기독교 신앙> / 크레이그 바르톨로뮤 지음 / 이종인 옮김 / IVP 펴냄 / 558쪽 / 3만 2000원. 사진 제공 IVP

나의 짧은 감상평은 이러하다. 첫째, 바르톨로뮤는 카이퍼와 동료들의 사상을 다른 어떤 학자들보다 탁월하게 소개했다. 이런 종류의 책이 과거에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들은 신칼뱅주의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었을 뿐, 카이퍼의 저작이 영어나 한글로 그리 많이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에, 카이퍼의 사상에 깊이 접근하기 힘든 한계가 있었다. 이제는 미국에서도 카이퍼의 글이 영어로 번역‧소개되고 있으니, 영미권의 다양한 연구가 계속해서 나올 것이라 기대한다.

바르톨로뮤의 작업이 특별히 의미 있는 지점은, 그가 카이퍼·바빙크와 동료들의 글을 화란어로 읽고, 원전에 기초해 독자들이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썼다는 점이다. 이에 더해 카이퍼리안들의 사상을 영역별로 나눠 알기 쉽게 설명한다. 카이퍼와 그의 사상을 이해하려는 일반 독자들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책은 없다고 확신한다.

둘째, 카이퍼와 동료들의 업적이 과연 우리가 사는 21세기에도 의미 있는 작업으로 다가올 수 있는지 점검해야 할 것이다. 100년도 더 지난 과거와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므로, 단순히 카이퍼와 동료들의 저작을 탐독하는 것에 더해 꼭 필요한 요소가 있다. 카이퍼의 저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줄 전문가와 함께 읽어야 한다. 바르톨로뮤는 여기에 딱 맞는 전문가 중 전문가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이 책에서 증명한다. 그가 제시하는 카이퍼와 동료들 저작의 현대적 의미에 대한 통찰은 이루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다. 그 통찰들을 숨은그림찾기식으로 찾는 독서만으로도 이 책은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바르톨로뮤는 카이퍼가 주장한 '많음(Manyness)'이 다원주의적인 현대사회 속 교회의 전략과 태도에 많은 도움을 준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전망하는 미래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적인 기독교 세계관으로 온전히 준비되어, 기독교 세계관이 우리 서구 문화에 가하는 비판을 충분히 인식하고, 다른 세계관들과의 대화에 열려 있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세계의 안녕과 하나님의 영광의 성패가 달려 있다." (209쪽)

다원주의 사회에서 교회는 다른 세계관들과 공존하기 어려운, 꽉 막힌 폐쇄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쉬운 선택지는 교회가 공동체주의라는 현대의 사상적 흐름 뒤에 숨는 것이다. 공동체주의란 공동체 각각의 독특성과 윤리적 체계를 인정하고 평화롭게 지내자는 느슨한 개인주의라 할 수 있다. 상당수의 교회 지도자와 신학자들은 세상과의 관계를 끊는 방식으로 이 공동체주의를 수용해, 기독교 공동체라는 안전한 테두리 안에서 안주하려고 한다. 느슨한 방식의 윤리, 일종의 에티켓만 세상에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르톨로뮤가 소개하듯, 카이퍼의 후배들은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예를 들어 철학 분야에서 플랜팅가와 월터스토프는 개혁주의 인식론의 위상을 현대 주류 인식론으로 올려 놓았으며, 결혼법 분야에서는 존 위티 주니어 같은 학자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비록 세상에서 일류로 인정받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과 목적은 아닐지라도, 세상 속에서 분투하며 각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선언하는 태도와 행동은 계속돼야 한다. 어쩌면 이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적 근거를 제공해 주는 유일한 것이 카이퍼와 그 동료들이 남겨 준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르톨로뮤는 카이퍼의 영역 주권에 대해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비전에 중심이 되는 것은,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풀타임 종이라는 점이다." (238쪽)

이론이 아닌 신앙

서평을 맺으며 신칼뱅주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비판을 짧게 언급하고자 한다. 1970년대 미국에서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승리주의'라는 비판이 있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마우는 신칼뱅주의가 이룩한 작지만 대단한 성취에 도취해서는 안 된다고 동료들에게 경고했다. 그에 앞서 카이퍼의 동지인 바빙크 또한 '신뢰와 겸손의 해석학'이라는 말로 동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한 바 있다. 아무리 좋은 이론과 결과가 있더라도 겸손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론적이며 이성적인 접근에는 반드시 그 기초에 경건이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해 바르톨로뮤는 "깊은 영성이 없을 때, 카이퍼 전통은 그 자체로 왜곡되거나 붕괴하지 않고는 지속될 수 없다"(289쪽)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카이퍼의 자유대학교 개교식 연설문 중 한 부분을 읽어 본다. 참된 영성이란 세상과 교회, 가정과 개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할 때 얻어지는 것 아닐까? 만약 그것이 기독교 세계관이라면, 기독교 세계관이란 이론이 아니라 신앙에 더 가까운 것 아닐지 생각해 본다.

"오, 우리 정신세계의 단 한 조각도 나머지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지 않아야 하며, 또한 우리 인간 존재의 전체 영역 가운데 단 한 치도 모든 것 위에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다!'라고 외치시지 않는 부분은 없습니다!" (235쪽)

이춘성 / 20~30대 대부분을 한국 라브리(L'Abri)와 국제 라브리 회원으로 지내며 공동체를 찾은 손님들을 환대하고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쳤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전문 사역 부목사로 섬기고 있으며,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윤리학 겸임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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