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남녀공학이 아닌 학교가 거의 없지만, 내 학창 시절에는 대부분의 학교가 남녀로 분리돼 있었다. 나도 남중과 남고를 다녔다. 특히, 내가 다닌 남고는 여자 선생님이 단 한 분도 계시지 않은 진정 '놈'들의 세상이었다. 축구공만 가지고도 체내 단 한 방울의 수분까지 아낌없이 뽑아내며 에너지를 발산하는 사춘기 남학생들에게, 체육 시간은 둑이 터지는 듯한 해방감을 가져다주는 시간이었다.

'비 오는 체육 시간'은 또 다른 의미의 해방을 맛보는 시간이었다. 운동장 대신 교실로 들어오신 체육 선생님이 분필을 잡고 칠판 한가운데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쓰시는 것은 '성.교.육'이었다. 비정규적인, 속된 말로 '야매' 성교육이다. 선생님의 지극히 주관적 경험에 바탕을 둔 성 관련(체험) 이야기, 거기에 진실 여부가 의심되는 친구들의 경험담이 얹어지면 음담패설 향연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렇게 성교육 아닌 성교육을 받았다.

'야매'가 아닌 성교육을 찾아서

그렇게 배우고 자라,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고, 성을 경험한 어른으로서, 어느덧 사춘기 자녀 앞에 서게 됐다. "아빠가 생각하는 행복은, 인생은, 신앙은, 세상은…" 하며 밥상머리 대화도 해 봤다. 여기저기서 귀동냥한 지식까지 동원해 가며 말이 통하는 아빠가 되려고 노력했다. 한데, 한 가지 영역에서만큼은 참으로 할 말이 없었으니, 바로 '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딸과 아빠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애당초 배운 바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놈'들의 세상에서 자란 아빠였기에, 딸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더더욱 없었다.

성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알려 주고 싶었다. 아빠로서 내 자녀에게만이 아니라, 동네 작은 도서관 관장이자 목사로서, 청소년과 그들의 부모를 위한 제대로 된 성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믿을 수 있는 성교육 강사와 책을 부지런히 찾았다. 먼저는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했으면 좋겠고, 동시에 청소년을 가슴으로 이해하면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분, 아닌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분, 특히 청소년 성 문제를 진지하게 연구하고 고민하며, 이상적 가치와 현실의 조화 가운데 지향해야 할 바를 제시해 줄 수 있는 분이 어디 없을까 고민했다.

성교육만큼 강사의 가치관이 고스란히 투영되고 그 영향을 받는 교육도 없을 것이다. 신체 구조와 기능에 대한 생물학적·객관적 설명은 누구나 가능하지만, '방법'이 아닌 '관계'라는 관점으로 교육을 이해하면 강사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본능에 충실하며 감정에 따라 자유로운 성을 주장할 수도 있고, 온몸을 천으로 꽁꽁 감싼 것처럼 이성 간에는 손도 잡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철저한 순결만을 강조할 수도 있다. 심지어는 학생들이 자신이나 주변의 경험에서 나온 구체적이고 심각한 질문을 던질 때,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기는커녕 어이없어하는 반응을 보이는 분도 있다.

내 딸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성 이야기

그리고 마침내 김경아 작가를 만났다. 김경아 작가에게 동네 청소년들을 위한 성교육 강의를 부탁하고 뒤에 앉아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강의를 듣는데, 작가가 가장 먼저 꺼낸 이야기는 '입양'이었다. 개인의 진솔한 이야기였지만 '입양이 성교육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바둑 9단이 깊은 내공으로 던진 첫 수와 같았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성(관계)은 사랑하는 성인 남녀 사이의 섹스'라는 이해가 얼마나 피상적이었는지를 알게 됐다.

김경아 작가는 성관계 '방법'이 아니라,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최고의 친밀함을 이끌어 내는 아름답고 소중한 성,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인 성에 대해 말해 줬다. 기쁨과 환희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복된 관계, 두 인격의 하나 됨, 그러기 위해 필요한 선지식과 이해, 가치와 관점 등에 관해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식과 지혜로 잘 설명해 줬다. 성은 섹스 행위가 아니라 '우리 몸과 마음의 이야기'라는 작가의 말이 가슴에 새겨졌다. 그야말로 내가 애타게 찾던 성교육이었다. 내 딸들에게, 청소년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성 이야기였다.

<청소년이 성을 알면 달라지는 것들>(IVP)은 그 내용을 토대로 하여, 그중에서도 청소년을 콕 집어 출간된 맞춤 책이다. 이 책은 청소년들을 본질로 초대한다. 어떤 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사랑하는 사이라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지, 성은 성인들만의 전유물인지, 성인이면 어떤 관계라도 이해되는 것인지, 이 세상을 남자와 여자로만 나눌 수 있는지 등,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지 않거나 애써 눈감고 있는 질문으로 이끌어 준다. 그리고 오랜 기독교 신앙과 깊은 사유에 터한 신학적 통찰로, 개개인의 존귀함과 가치를 붙잡고 친절하고도 부드럽게 설명·설득한다.

<청소년이 성을 알면 달라지는 것들 - 몸, 마음, 관계에서 나를 찾아 가는 성교육> / 김경아 지음 / IVP 펴냄  / 192쪽 / 1만 1000원 
<청소년이 성을 알면 달라지는 것들 - 몸, 마음, 관계에서 나를 찾아 가는 성교육> / 김경아 지음 / IVP 펴냄 / 192쪽 / 1만 1000원 
빠르지 않더라도 바르게 가는 대화를 나누자

보수적인 분들에게 이 책의 어떤 부분은 충격적일 수도 있다. 허나 우리가 사냥꾼을 피해 눈밭에 머리를 처박는 꿩으로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청소년들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봐야 그들을 이끌어 줄 수 있다. 두려움은 외면을 낳고 왜곡을 가져온다. 반대로 자유로운 분들에게 이 책은 답답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조건 빠른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빨리 가지는 않을지라도, 바르게 가는 중이라고 변호하고 싶다.

만약 누군가 개신교 목사로서 성에 관한 책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한다면, 나는 이 책을 권할 것이다. 게으른 탓인지 이보다 나은 책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염려되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특히 2부(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기)는 교회 현장의 뜨거운 감자인 젠더와 동성애를 다루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죄라고 규정해야 편한 분들이 있고, 또 그렇게 말하는 것이 불편한 분들이 있다. 하여 치열한 공방이 오가거나 갈등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외면보다 직면을 통해 성숙하리라 믿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향한 존중과 애정을 나눌 수 있다. 소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을 피하지 않고 다룬 작가의 믿음도 나와 다르지 않으리라 본다.

청소년들, 그리고 청소년을 양육하는 분들, 신앙인들이 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눠 보면 좋겠다. 두려워하지 말자. 내가 우리 딸들과 그랬던 것처럼, 동네 청소년들과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우리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나는 누구이고, 나와 다른 너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할지' 묵상하고 마침내 모두 '품위 있는 성'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남태일 /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궁금해 여기저기서 이것저것을 배웠다. 반백 년 이상을 살았지만 여전히 사방을 기웃거리며 사람과 어울려 사는 것을 좋아하는 지구 별 여행객. 어.울림교회 목사, 언덕위광장작은도서관 관장, 회복적 정의 활동가, 현장 노동자다. 그리스도 안에서 품위를 빚는 하루, 품위 있는 사람으로 사는 길을 찾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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