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최연소 아쿠타가와상에 빛나던 신예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1935~)에게 1963년 6월 첫째 아들의 탄생은 일대 전환을 불러온 사건이었다. 머리에 큰 혹이 붙은 채 태어난 아들은 위험천만한 수술 후 평생 시각장애·지적장애·간질 등을 안고 살아가게 됐다. 이 시기 겐자부로는 철학자이자 기독교 신비주의자인 시몬 베유가 쓴 프랑스어판 <신을 기다리며 Attente de Dieu>를 읽고 있었는데, 여기 나오는 이누이트 우화가 그를 위로했다.

"영원한 암흑, 먹이를 찾을 수 없었던 까마귀가 빛을 간절히 바랐더니 땅이 환해졌다." [시몬 베유, <신을 기다리며>(이제이북스), 85쪽]

빛에 집중하는 까마귀의 자세처럼 '주의 깊은 시선'으로 기도와 이웃 사랑을 행할 것을 촉구하는 이 글에 착안하여 겐자부로는 아들 이름을 '히카리(빛)'로 지었고, 다음 말을 가슴에 새겼다. "충만한 이웃 사랑이란 그저 '무엇이 괴로우신지요?'라고 묻는 것이다."(91쪽) 후일 일흔 노인이 된 겐자부로는 한 강연에서 이 물음을 주의 깊게 던지는 사람이 되고자 꾸준히 노력해 왔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1994년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천재적 음악 재능을 꽃피운 히카리 또한 작곡가로 성공을 거뒀다. 후기로 갈수록 난해해지는 그의 '악문惡文'과, 동서양을 넘나드는 신화적 세계와 함께 나타나는 폭력·죽음·'불구'의 이미지는 지적장애 아들과의 공생, 전후 민주주의자이자 '일본 양심의 상징'으로 신념을 지켜온 시간이 결단코 쉽지 않은 세월이었음을 역설한다.

<로완 윌리엄스와의 대화 - 정의와 사랑에 관하여> / 로완 윌리엄스·메리 저나지 지음 / 강성윤·민경찬 옮김 / 비아 펴냄 / 280쪽 / 1만 6000원
<로완 윌리엄스와의 대화 - 정의와 사랑에 관하여> / 로완 윌리엄스·메리 저나지 지음 / 강성윤·민경찬 옮김 / 비아 펴냄 / 280쪽 / 1만 6000원

로완 윌리엄스의 대담집 <로완 윌리엄스와의 대화 - 정의와 사랑에 관하여>(비아)를 읽으면서 오에 겐자부로를 떠올렸다. 타자와 세계를 올바르게 마주하는 과정을 통한 정의와 사랑의 실천이라는 이 대담집의 핵심 메시지가 제시하는 인간상과 그의 삶이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타자와 세계를 알아 가려면 '낭비'의 시간이 필요하다. 책에는 지적장애인의 삶을 마주하는 분투가 그 사례로 나온다(242~245쪽)]. 또한 이 책은 그리스도교 배경을 지닌 사상가·문학가·신학자의 저작이 정의와 사랑의 언어에 입체성을 더해 준다는 사실을 증언하는데, 시몬 베유도 비중 있게 다룬다. 로완은 '관대함이 개인 영역과 공공 영역에서 실질적으로 이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는 물음에 답하며, 겐자부로가 영향을 받은 <신을 기다리며>의 한 대목을 아래와 같이 변주한다. 이 대담집에서 시종일관 관심을 놓지 않는 태도, '올바로 보기'와 관련이 깊은 내용이다.

"핵심 연결 고리는 시몬 베유가 '관심' 혹은 '주시'라고 부른 것에서 찾을 수 있지요. 정의와 사랑은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것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데 달려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선입관이나 편견, 두려움, 선호 같은 걸 전부 내려놓고 분명하게 보려 노력하는 것이지요. 관대함이라는 건 가슴 따뜻한 감정이 흘러넘쳐서 생겨나는 게 아니라, 인내심을 가지고 보고 듣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관조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물론이고 불교 전통에서도 연민은 '무정념(dispassion)'에서 나온다고 강조합니다. 이때 '무정념'은 쌀쌀맞은 무심함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볼 때 들끓게 되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뜻합니다. 사회정의가 오래도록 지속되려면 이런 습관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단언컨대 법률 몇 개 통과되는 걸로는 부족해요." (158쪽)

정의와 사랑에 관한 5년간의 대화

'정의'와 '사랑'을 핵심 키워드 삼아 오늘날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를 다루는 5년(2015~2019)간의 대담을 담은 <로완 윌리엄스와의 대화>는 "정의와 사랑의 관계를 함께 탐구"하고, "정의에 관한 언어를 풍부하게 만들어 줄 신학적, 철학적 기반을 다져" 보려는 목적으로 기획됐다(29쪽). 로완 윌리엄스를 이 대화에 초대한 그리스계 호주인 철학자 메리 저나지가 주로 질문하고, 로완이 답을 하면 메리가 짧게 정리하며 자유롭게 대답이 오가는 형태로 그려진다. 일곱 차례의 만남은 법적 차원을 넘어선 '정의'의 본뜻을 살피는 작업으로 시작하여, 정의와 사랑의 관계를 탐구하고, 마침내는 정의와 사랑의 실천을 위한 믿음에 관한 이야기로 끝을 맺는데, '에필로그'에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메리와 로완이 주고받은 편지가 수록돼 있다.

이 책까지 17권의 저작이 번역(이 중 16권이 2015년 이후 출간)된 로완 윌리엄스는 한국 교계에서 대중적이지 않아도 꾸준히 독자층을 확보해 왔다. 반면, 메리 저나지는 매우 생소한 인물이다. 문화 이론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다큐멘터리 '개를 위한 민주주의'(2016)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으며, 희망·평화 등을 주제로 책을 썼고,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친다는 기본 정보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는 데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들어가며'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개인적으로도 어렸을 적부터 그리스정교회 영향 아래 있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혹은 슬픔이나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그리스도교 의례, 종교 언어의 도움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는 "진리에 대한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 생명체의 가치를 숙고하고, 친교와 연대로부터 생겨나는 관계를 올바로 인식하기 위해 윤리적으로 분투하는" 측면에서 공적·정치적 영역에 영적 차원의 사고방식이 필요하다고 보고, "그리스도교 신학과 철학의 언어가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줄" 수 있다는 열린 자세를 취한다(13쪽).

대담 중 그리스도교 지식인의 면모를 한껏 발휘하는 로완은 정의와 사랑을 둘러싼 그리스도교적 개념을 그리스도교 바깥에서도 통용되는 언어로 풀어낸다. 그리스도인이 공적 대화에서 어떤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지 세련된 형태로 보여 준다. 5년간의 대담 배경으로 깔리는 "시리아 난민 위기, 파리 폭탄 테러, ISIS의 공격, 브렉시트, 미국 대선과 총선, 환경문제, 사회경제 위기가 전 세계에 미친 영향들"(30쪽)은 하나하나 매듭을 쉽게 풀기 힘든 거대한 문제인데, 시간 및 지면 관계상 두 사람 간 대화는 해당 이슈들을 충분히 다룬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를 우회하지 않는다. 쉽게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자포자기하지 않도록 희망을 북돋우며 '대화', '인내', '상상력', '배움' 등 현실적 해법으로 나아가는 근원적 장치를 되새기면서 "정의의 새로운 의미, 정의에 관한 새로운 물음, 정의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는 시도를 이어 간다(31쪽).

로완 윌리엄스(Rowan D. Williams, 1950~). The Archbishop of Canterbury 유튜브 채널 갈무리
로완 윌리엄스(Rowan D. Williams, 1950~). The Archbishop of Canterbury 유튜브 채널 갈무리
'올바로 보기'로부터 시작되는 정의

대담은 '정의(justice)'의 어원을 역사적으로 살피며 그리스어·히브리어에서 뜻하는 바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로완은 'justice'의 뿌리인 라틴어 '유스(jus)'는 법·권리를 의미하지만, 그리스어 '디카이오스'와 히브리어 '체다카'는 '바른 상태', '가지런한 상태'를 지칭한다고 말한다. 즉, "히브리어에서 정의롭게 행동한다, 혹은 올바로 행동한다는 것은 자신의 태도, 자기 삶의 방향을 바르게 한다, 재배열한다, 가지런히 한다는 뜻"이다(38쪽). 로완이 밝히듯, 정의는 법을 지키는 데 한정되지 않고,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올바름에 일치하는 것, 그 방향으로 돌이켜 삶을 재배열하는 일이다. 고로 사물·사건·사람을 '올바로 대하는' 일은 법·권리 차원의 "분쟁 해결"이 아니라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바탕"과 관련이 깊다(41쪽). 법적 권리 관점에서 접근하는 정의는 현실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 되레 법으로 '문제가 종결'됐다고 착각하게 만들 수 있다(43쪽). 따라서 우리는 법으로서의 정의가 아니라 덕으로서의 정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지?', '이 문제의 정답은 뭘까?'와 같은 물음보다는 '어떤 행위가, 어떤 기질과 성향이 우리를 이러저러한 종류의 사람으로 만들어 줄까?'라는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자기 이해에 연속성을 추구하다 보면, 우리는 덕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됩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덕으로서의 정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러니까 올바로 보기, 공정하게 보기, 온전하게 보기와 관련된 덕으로서의 정의에서 출발하면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51쪽)

이 말은 정의에 관한 이 대담의 서곡이며, 이후 오는 논의는 이에 대한 변주다. 올바로 볼 때 올바로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완 윌리엄스는 다른 저작에서도 익숙한 단어를 '낯설게' 봄으로써 의미가 '오염된' 말에 본연의 빛깔을 다시 부여하는 작업을 하곤 했는데, 이 또한 '올바로 보기'라고 말할 수 있다. 로완은 이 대담집에서도 마찬가지로 단어를 새롭게 정의하는 데 힘을 쏟는다. 큰 틀에서는 '정의'와 '사랑'이 그에 해당하고, 이를 둘러싼 관계망으로 엮인 단어들로 '자선', '공감', '민주주의', '시간' 등이 포함된다. 그는 이 단어들을 재배열하여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고민하며 의미의 전환 혹은 확장을 꾀한다.

"본래 국제 구호라는 건 궁핍한, 빈곤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받아 마땅한 몫을 받도록 돕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계적으로 균형을 맞추거나 빚을 청산하거나 갚는 것 이상의 무언가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의 정의를 실현하고 지켜 나가고자 한다면 '자선'의 뿌리가 무엇인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관계의 회복이라든가, 그런 것들과 관련한 요소들을 포괄해야만 하지요. (중략) 초기 성공회 기도서를 보면 "부당하게 빼앗은 남의 땅이나 재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관계를 바로잡는 행위가 자선이지요." (45~47쪽)

이 책에서 특징적인 요소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 셰익스피어,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시몬 베유, 아이리스 머독, 플래너리 오코너 등 신학자·문학가·사상가가 다채롭게 인용된다는 점이다. 대화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일급 신학자가 사회 현실에 잇닿아 이들의 저작을 읽어 나가는 방법을 엿볼 수 있다. 유독 문학작품이 많이 등장한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소포클레스 비극부터 넷플릭스 드라마까지 언급된다. 그 목적은 분명하다. 수많은 이야기를 통한 일종의 사고실험(98쪽)이자, 새로운 사고와 정서를 발견하는 과정(144쪽),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는 상상력을 부여해 '도덕적 시험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186~187쪽). 무엇보다 이 텍스트들은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습화된 시각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249쪽) 돕는다.

타자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토양과 바다를 오염시키는, 재활용 불가능한 거대한 플라스틱 더미가 우리 경제의 위험성에 대한 암울한 은유인 것과 마찬가지로, 터무니없는 말이 쌓이고 쌓여 이제 해체되거나 허물어지지도 않고 건전한 주장과 조화를 이루게 될 수도 없는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말의 무더기에 깔려 질식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279쪽)

이는 로완이 본 오늘날 세계의 현실이다. 사실 한국 사회도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서울은 1km를 사이에 두고 대립의 격전지가 된 지 오래다. 주말마다 서울 중구 태평로 일대에서는 '윤석열 퇴진' 집회가, 광화문광장 일대에서는 '문재인·이재명 구속' 집회가 이어진다. 갈등의 불씨는 도처에 자리하고 있고, 이미 터진 폭발의 흔적들은 쉬이 정리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책에서 언급되는 2016년 영국의 EU 탈퇴(브렉시트)가 통과됐을 당시 상황도 현재 한국 정치 지형도와 비교해 보면 기시감이 든다. 이때 '브렉시트'에 대한 국민투표는 52 대 48로 끝이 났다. 절반에 가까운 사람이 브렉시트 반대에 투표했음에도, 52%의 다수파는 48%가 낸 의견이 모두 증발해 버렸다는 듯이 반대편 사람들을 '국민의 적'이라고까지 묘사하면서 적대하는 흐름이 포착됐다. 이에 로완은 사람들이 다수파에 들어가기 위해서만 힘을 쏟고 있다며, 이처럼 대립과 반목이 극단화한 상황은 민주주의에 악영향을 끼쳐 소수파를 향한 관심을 사라지게 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이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로완의 주장 중 하나는, 여러 기관이 의지를 갖고 지역 차원에서 토론·토의 자리를 활성화하는 일이다. 이분법이나 극단을 넘어선 '대화'의 문화를 만들자는 말로 읽힌다.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첫째, 내가 옳다 하더라도 옳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워야만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말하고,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는 이들, 혹은 동의하지 않는 이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말이지요. 설령 내가 옳다 해도 배움은 이어져야 합니다.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둘째는 누구든, 그가 옳든 옳지 않든 그에게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들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 자신의 가치, 내가 이곳에 존재할 권리, 내가 이곳의 일부로 있을 권리를 입증하기 위해 상대방을 침묵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202쪽)

갈등의 시대에 맞춤한 해결 방안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한가? 이는 지극히 현실주의적 대응이다. 만나지 않는다면, '대화'를 하지 않는다면 갈등은 결단코 해결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로완이 지적하듯이, "타자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 어색하고 마음에 안 드는 저 이상한 현실을 눈앞에서 치워 버릴 수는 없다는 사실"(259쪽)을 기억해야 한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내 알 바 아니라고 말하고 행동하는 건 다른 사람을 형해화形骸化 하는 일"이며, "소통이 사라진 영역, 나눔이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며 자포자기에 가까운 상태가 되는 것"이다(232~233쪽). 로완이 제시한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브렉시트 지지자', '트럼프 지지자' 같은 사람을 무작정 공격하거나 경멸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악마화하거나 바보 취급하는 데 그친다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그들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가정해야" 하며, "그들의 생각과 느낌을 더 진지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167쪽).

"지금 의회에서 오가는 주장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올바르게 행동하고 싶지만 무력한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어떻게 보면 무력함은 그 자체로 현실이지요. 모든 일은 이 현실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선의의 노력으로는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에게 무력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제대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매우 불편한 방식일 수 있어요. 하지만 유일하게 정직한 방식입니다." (119쪽)

결국, 로완이 이야기하는 것은 "당면한 현실을 올바로 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균형점(point of balance)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다(260쪽). 이 균형점은 시몬 베유가 이야기한 '좁은 지점', '올바른 균형(just balance)'의 자리다. 이때 필요한 것은 열려 있는 미래를 향한 믿음이다. 이 희망이 인간을 더욱 성장하게 한다.

<로완 윌리엄스와의 대화>는 정의와 사랑에 관해 숙고하는 자리에 '함께' 서 보자고 재촉하는 초대장이다. 어쩌면 더 입체적으로 살펴야 할 사건과 맥락을 일별하며 지나가기에 대담집 자체의 한계에 따른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반대로, 타자와 세계를 대면하는 문제와 관련한 통찰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어 다양한 측면에서 생각을 깊이 해 보도록 돕는다는 점에서는 유익이 있다. 지금껏 번역·출간된 로완 윌리엄스의 다른 저작들과 함께 읽어 보면, 그가 사용했던 그리스도교적 용어가 어떻게 공적 대화로 녹아들었는지 비교해 볼 수 있다.

"자기보다 더 큰, 더 높은 무언가를 보고 지향하는 이, 동시에 자신이 언제든 실패할 수 있음을 알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 이러한 판단에 움츠러들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을 둘러싼 현실에 주의를 기울이고 사랑하는 이, 이러한 사람을 우리는 신뢰합니다. 그런 이들이 공적 영역에서 좀 더 많아질 때 오늘날 만연한 냉소의 흐름은 바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러한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는 일, 이를 배우고 익혀나가는 것이 오늘날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로완 윌리엄스, <어둠 속의 촛불들>(비아), 41쪽]

강동석 / 학부에서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학을 공부했으며, <뉴스앤조이>에서 편집기자로 일했다. 현재 <복음과상황>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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