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판에 대한 오해

여러분은 '비판(Kritik)'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사실 저는 이 단어 때문에 골치 아플 때가 많았습니다. 이런 설교를 정말 많이 들었거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 이르기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비판하거나 미워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는 식의 설교를요. 저는 고3 때 처음 교회를 다녔는데요. 그때쯤 저는 정말로 교회 안에서는 어떤 비판도 하면 안 되는 줄 알았습니다. 뭔가 이건 아닌데 싶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도 꾹 참았더랬지요.

그런데 스무 살이 되어 철학과에 입학해 보니, 거기서는 또 비판적인 사유와 태도가 무척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꽤나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교회에서는 비판하지 말라 하고, 학교에서는 마음껏 비판하라 하니까요. 심지어 그런 혼란을 겪다가 대학원에 입학했는데, 전공을 정하고 보니 칸트의 철학을 무려 '비판철학(kritische Philosophie)'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읽어야 하는 책들도 무려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 <실천이성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판단력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과 같이 '비판'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무시무시한 제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칸트 비판철학을 전공한 저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우선 마태복음이 말하는 저 '비판'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헬라어를 할 줄 모르니까 원어를 뒤져 볼 능력은 없고, 영어 성경과 독일어 성경을 열심히 찾아봤지요. 그랬더니 NIV나 NASB, 심지어 킹제임스성경조차 "비판하지 말라"를 "Do not judge", 혹은 "not judge" 정도로 번역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judge'는 법정에서 판결을 내릴 때 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독일어 성경을 살펴보니, 루터성경에서는 "Richtet nicht", Gute Nachricht Bibel(우리 말로는 좋은소식성경, 혹은 복음성경 정도가 되겠네요)에서는 "Verurteilt nicht"라고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루터성경이 사용한 '리히텐(richten)'이라는 동사는 "바르게 하다", "바로잡다", "향하게 하다"라는 뜻도 있지만, 동시에 "재판하다", "판결하다"라는 뜻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루터성경이 번역한 맥락에서는 영어 성경들과 마찬가지로 'judge'의 의미로 쓰였다고 이해해야 좋을 것 같아요. Gute Nachricht Bibel이 사용한 '페어우어타일렌(verurteilen)'이라는 동사에는 "유죄 판결을 내리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마태복음 7장이 말하는 "비판하지 말라"의 의미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나쁜 말을 하거나, 공격하는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하나님의 입장이 되어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태복음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가 칸트의 비판철학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마음의 걸림돌을 제거할 수 있게 되는 셈입니다. 철학에서 '비판'이라는 말은, 특히 칸트철학에서 사용되는 '비판'은 성경이 "비판하지 말라"라고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거든요. 그렇다면 비판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것이 정말로 옳은지 혹은 옳지 않은지 엄격하게 따지고 검토해 보는 일을 뜻합니다. 즉 철학에서 상대방을 '비판한다'는 말은, 그 사람이 말하고 있는 주장이 정말로 옳은 주장인지 아닌지 꼼꼼하게 따져 본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물론 그 과정에서 감정적인 말들이 오갈 수도 있겠고, 상대방의 마음이 조금 다칠 수도 있겠지만요.

그러나 비판의 목적이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정말로 옳은지 그른지 따져 묻는 것이라면, 우리가 굳이 교회 안에서 비판을 금지하거나 허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교회 안에서 비판을 충분히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성경을 읽을 때 이 말씀이 정말로 오늘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인지 검토하기도 하고, 교회학교 수련회를 할 때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준비할지 함께 검토하기도 하고, 임직식을 통해 장로님·권사님을 뽑을 때 어떤 분이 그 직분에 더 적합한 사람인지를 따져 묻기도 하지요. 이러한 모든 작업이 사실은 비판적 작업인 것입니다. 철학은 이를 보다 더 전문적으로, 또 보다 엄격하게 수행하는 것일 뿐이고요.

2. 칸트와 이성 비판의 기획

칸트가 어렵기로 악명 높은 <비판>을 쓴 이유는, 우리가 갖고 있고 또 자주 사용하고 있는 '이성'을 비판하기 위해서입니다. 위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이성을 비판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정말로 이성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지 엄격하게 검토하고 따져 보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언젠가 진은영 시인께서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그린비)라는 책을 쓰셨는데, 내용은 차치하고서라도 책 제목이 칸트가 수행하고자 했던 이성 비판의 의미를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성을 법정에 세운다는 것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혹은 어떠한 기준도 없이 함부로 사용해 왔던 이성의 능력이 과연 어디까지인지 정확하게 검토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성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나요? 인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칸트가 순수한 이성의 능력을 비판한다는 것은, 아주 쉽게 표현하면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지 그 범위와 한계를 규명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알 수 있고, 또 어디서부터는 알 수 없을까요?

첫째, 우리는 사물의 참된 본성을 알 수 없습니다. 칸트 이전 시대에 활동했던 이성주의 전통의 철학자들은 인간 이성을 통해 사물의 참된 본성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데카르트입니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 앞에 어떤 밀랍이 놓여 있다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감각 경험을 통해 이 밀랍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크기는 어떻고, 색깔은 어떻고, 맛은 어떻고, 향기는 어떻고, 촉감은 또 어떻고 하는 식으로요.

그런데 이 밀랍에 열을 가하면, 크기도 줄어들고, 색깔과 모양과 맛도 달라지고, 이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됩니다. 하지만 밀랍을 인식할 때 사용한 어떤 경험적인 요소가 달라지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여전히 밀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것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요? 바로 이성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이성이 사물의 본성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한 밀랍의 모든 경험적인 요소들이 바뀌어 버린다고 하더라도, 이성을 통해 여전히 그것이 밀랍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칸트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결코 사물의 본성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특정한 관점에 따라서만 사물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우 거친 비유지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새빨간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사물들이 다 빨갛게 보이겠죠? 또 우리가 새파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다 파랗게 보일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결코 벗어 던질 수 없는, 선험적인(transzendental) 안경을 쓰고 태어납니다. 그 안경의 이름은 바로 '시간'과 '공간'입니다.

우리는 특수한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사물들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사물을 인식하든지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 안에서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심지어 아주 작은 원자나 분자, 혹은 쿼크 입자 같은 것을 인식할 때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이는 달리 말해, 우리가 비-시간적·비-공간적인 사물들은 결코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또 예시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과연 고양이와 동일한 시공간의 형식을 갖고 있을까요? 우리가 100년 가까이 산다고 했을 때, 고양이는 길어도 20년을 살기 어렵습니다. 또 우리는 보통 2m에 조금 못 미치는 신장을 가지고 있지만, 고양이는 우리 무릎 위에 올라올 수 있을 정도로 덩치가 작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물컵이라는 대상을 인식하고자 할 때, 우리가 인식하는 물컵과 고양이가 인식하는 물컵이 과연 같은 물컵일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손바닥만한 작은 크기로 물컵을 인식하지만, 고양이 입장에서는 자신의 얼굴만한 커다란 무엇인가일 수 있는 것이죠. 새끼 고양이의 경우에는 자기 덩치만한, 훨씬 더 큰 무언가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극단적인 비유를 들어서 한번 생각해 볼까요? 하루살이와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하루살이는 정확하게는 이틀 정도의 시간을 산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루살이의 몸길이는 약 2cm 정도라고 합니다. 날개를 다 펴도 고작 5cm 정도라고 하고요. 이런 하루살이가 인식하는 물컵과, 고양이가 인식하는 물컵과, 우리가 인식하는 물컵은 과연 '동일한' 물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칸트는 우리가 물컵의 '현상(Erscheinung)'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지, 물컵의 본성, 즉 '사물 자체(Ding an sich)'는 인식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종에 내재해 있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을 지닌 관점하에서만 사물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시공간의 형식을 벗어나서 사물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고양이가 지닌 시공간의 관점이 다르고, 또 하루살이가 지닌 시공간의 관점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시공간의 형식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죠. 결국 우리는 물컵이 우리의 시공간의 형식에 따라 경험되는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지, 물컵 자체, '사물 자체'는 인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인간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은 인식할 수 없습니다. 위에서 우리는 시공간이라는 형식 안에 들어오는 대상만 인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시공간이라는 형식 안에 들어오는 대상은 어떤 것들일까요? 바로 '경험적인' 대상들입니다. 경험적인 대상들은 특수한(particular)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상들을 인식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출현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영원불멸하시고 편재하시다고 믿습니다. 이를 철학적인 용어로 바꾸어 표현해 봅시다. 하나님이 영원불멸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이 '초-시간적인' 존재자라는 것을 의미하고, 하나님이 편재해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이 '초-공간적인' 존재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형식 안에 들어올 수 있는 대상들만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살펴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칸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증명도,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증명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인간 이성이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아득히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형식 안에 들어오는 대상들만을 인식할 수 있고, 그러한 경험적인 대상들에 대해서만 존재한다는 증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명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초월자이시기 때문에 결코 존재하신다는 증명도,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증명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칸트는, 자신 이전에 시도된 모든 종류의 '신 존재 증명(존재론적 증명, 우주론적 증명, 목적론적 증명)'들이 사실 전면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이 증명들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도 무척 의미있는 일이겠으나, 이는 무척 어렵고 복잡한 작업이기 때문에 우리 글에서는 다루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 점에서 칸트는 신에 대해 "이론적 영역에서는 불가지론(이 표현을 잘 기억해 둡시다)"의 입장을 취합니다. 우리는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표현이 무척 불경하게 느껴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어떤 분은 "아니, 하나님께서는 이리도 생생히 살아 계신데, 어떻게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른다고 말할 수 있나요?"라고 반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 중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심지어 우리 믿음의 조상들 중에서도 하나님을 직접 보거나 인식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세조차도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을 보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뿐이지, 하나님의 거대한 존재 앞에서는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거하고 계신 지성소에 허락 없이 들어간 사람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유한한 한계를 지닌 인간으로서는 결코 신을 온전히 인식하거나 증명해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지식과 믿음의 구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지식'과 '믿음'을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칸트에 따르면, 지식은 "주관적으로도 객관적으로도 필연적인 견해"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객관적으로는 필연적이지 않지만, 주관적으로는 필연적인 견해"입니다.

예시를 들어서 한번 생각해 볼까요? 우리는 7+5=12라는 수학적 명제를 믿거나, 신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한국 사람도, 일본 사람도, 미국 사람도, 다른 어떤 나라에 사는 사람도, 7+5=12라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또, 수만 년 전 인류가 문자를 창조하기 이전에 살았던 원시인들에게도 7+5=12라는 셈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앞으로 수천수만 년 후의 사람들에게도 매우 당연하게 여겨질 것이고요. 따라서 이러한 명제는 주관적으로도 객관적으로도 필연적인 견해이며, 따라서 지식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예시를 들어서 또 생각해 볼까요? 제가 자주 드는 예시입니다만, 우리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것을 믿거나 신앙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역사적 사실, 즉 지식이라고 부릅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쳤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믿거나 신앙하지 않으며, 지식의 영역에 둡니다.

칸트에 따르면, 이처럼 지식의 영역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철저히 경험적 대상들에 대한 논의들뿐입니다. 경험을 넘어선 것들은 결코 지식의 영역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인간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한계를 아득히 넘어서 계신 초-경험적 존재자 하나님을, 지식의 영역이 아닌 '믿음'의 영역에서 사유하기 시작합니다.

결코 다 이해할 수 없으며, 또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다만 믿을 뿐이라고 고백했던 교부들의 신앙고백은 이 점에서 틀림없이 참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하거나 인식할 수 있다면, 또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에 성공한다면, 하나님은 신앙의 대상이 아닌 지식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이성으로 결코 증명 불가능하고 파악 불가능하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의 영역에서 신앙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칸트를 빌려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는 말씀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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