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PCUSA(미국장로교회) 인디언(다코타)노회에 소속한 유일한 'non-Indian' 목사입니다."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안맹호 목사(72)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원주민 선교를 시작한 지 27년, 그는 원주민 '선교사'가 아니라 아예 그들 중 한 명이 됐다. 이제 70대가 되어 현업에서는 물러날 때가 지났지만 "노회에서는 내가 젊은 편이에요. 일 좀 그만하려 했더니 다른 원주민 목사들이 '젊은 목사가 벌써 그만두려고 하느냐'고 하더라고요" 하며 멋쩍게 웃었다. PCUSA에는 정년이 없기도 하다.

모든 선교가 그렇겠지만 '원주민 선교'는 특히 까다롭다. '신대륙 발견'이라는 미명하에 서구 세계가 그들의 땅과 인권을 유린하고 문화를 말살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 서구 세계는 곧 '기독교'였다. 안맹호 목사는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잠깐 인디언 교회가 부흥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1973년 이후 원주민들이 인권 운동을 시작하면서 인디언 교회는 말 그대로 폭삭 망했다. 그들이 역사를 공부해 보니 교회가 잘못한 게 너무 많았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반기독교 정서. 안 목사가 1996년 처음 원주민 마을에 발을 디뎠을 때 피부로 느꼈던 것이다. 멀게만 느껴졌던 원주민 선교가 지금 한국교회 상황과도 직결되는 부분이 있었다. 오늘날 한국에도 반기독교 정서가 팽배하다. 이 정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탓할 것이 아니다. "그들이 반기독교 정서를 가지게 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먼저 그걸 배우려 해야죠." 안 목사는 말한다.

안맹호 선교사는 1996년 미국 사우스다코타주에서 원주민 사역을 시작했고, 2007년 애리조나주로 사역지를 옮겼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안맹호 선교사는 1996년 미국 사우스다코타주에서 원주민 사역을 시작했고, 2007년 애리조나주로 사역지를 옮겼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원주민 선교는 한국 교계에서는 낯선 주제다. 안 목사는 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15년간 원주민 선교학을 강의했고, 2010년경에는 <미주뉴스앤조이>(현 <뉴스M>)에 원주민 교회 이야기를 연재해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개인적인 일정으로 한국에 들어온 안맹호 목사를 11월 28일 서울 중구 희년평화빌딩에서 만났다.

올해는 미국 원주민들에게 뜻깊은 해이기도 하다. 올해 7월 미국에서 가장 크고 보수적인 교단인 남침례회가 원주민을 학대했던 역사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이로써 2009년 미국성공회를 시작으로 미국의 주요 교단 모두가 원주민에게 공식 사과했다. 안맹호 목사는 "가장 왼쪽부터 가장 오른쪽까지 모두 공식적으로 사과한 거죠.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반가웠고 감동이었어요"라고 말했다.

'배우는 선교사'

안맹호 목사의 40년 목회 인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반기독교 정서'였다. '반기독교 정서가 팽배한 곳에서 복음은 어떻게 해석돼야 하는가'가 안 목사 필생의 과제였다. 그가 30대 초반 나갔던 첫 사역지부터 그랬다. '석굴암 뒷 골짜기' 농촌 마을이었다. 당시 330세대 1300명이 살고 있던 그 지역은, 40년간 교회가 6번 세워졌다 사라진 곳이었다. 노회에서 그곳을 다시 살려 보려고 목회자를 물색했으나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다. 1984년 신학대학원 졸업반이었던 안맹호 목사가 손을 들었다.

그가 교회를 세운다는 소문이 돌자 마을에서는 '안맹호전도사이주반대위원회'까지 구성됐다고 한다. 안 목사는 당황했지만 동시에 너무 궁금했다. 왜 이렇게 교회를 싫어할까. 그는 주민들에게 묻고 '배웠다'. 우연히 알게 된 <경상북도 지명 유래 총람>을 어렵게 구해 공부했다. 지역사와 주민들의 정서를 알고 나니 그들의 필요가 보였다.

"제 기준이 세 가지예요. 사람들이 꼭 필요로 하는 것, 하지만 그 사람들이 하기는 어려운 것, 그중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 세 가지 기준에 맞는 것만 했어요. 그 농촌에서 청년들 불러 교육시키고, 중학생들을 위한 장학회를 만들고 했죠. 몇 개월 지나니까 마을 사람들이 '교회가 이런 일을 하는 곳이라면 우리는 교회가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때가 12월 중순쯤 됐나? 선물이라고 가져왔는데 열어 보니 케이크에 '축 성탄'이라고 써 있었다니까요.(웃음)"

이 경험은 그가 원주민 선교를 결심하는 데도 큰 영향을 줬다. 1992년 미국으로 건너가 한인 교회 목회를 하다가 1996년 원주민 정착지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안 목사가 한 일은 그들이 만든 대학에 가서 인디언 언어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었다. 기독교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원주민들도 '가르치는 선교사'가 아닌 '배우는 선교사'의 등장에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다음 한 일은? 기다리는 것이었다.

"섣불리 하지 않는 겁니다. 그들과 코드가 맞기 전에는 안 해야 하는 거예요. 저는 사역을 '배우기, 기다리기, 나누기'라고 생각해요. 배우는 것도, 기다리는 것도 다 사역이에요.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자꾸 뭘 하려고 하잖아요. 그들의 요청이 있었나요? 왜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와서 하려고 해요. 기다리다 보면 그들이 먼저 요구해 와요. 그럼 그때 함께하면 되죠. 이때도 역시 이들이 꼭 필요한 것, 하지만 이들이 직접 하기는 어려운 것, 그중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기준으로 했어요.

 

또 한 가지 기준이 있다면 '돈이 들지 않는 것'이에요. 자꾸 돈으로 하려고 하면 돈 주는 곳에 끌려가게 돼 있어요. 물론 돈이 필요한 일도 있죠. 저는 선교사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후원 교회를 교육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선교사가 교회에 의해 좌지우지되면 사역 못 해요. 돌아보면 제가 사역하면서 가장 많이 했던 일이, 뒤돌아서서 한국교회를 향해 이야기한 거예요. 원주민들은 제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그냥 알아서 잘해요.(웃음)"

음악 쪽에 일가견이 있던 안맹호 목사는 처음엔 미션스쿨에서 학생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기도하던 중 백인들의 동화정책으로 그들이 언어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눈에 밟혀 '인디언 스피치 대회'를 기획했다. 이 행사는 현재 인디언 대학 공식 행사가 되어 매년 성대하게 치러진다고 한다. 안 목사는 2002년 다코타노회에 정식 가입한 후, 최근까지 총회대의원을 비롯해 노회 내 요직에서 일해 왔다.

안맹호 목사는 이제 자신을 원주민 '선교사'로 말하기는 힘들다며 웃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안맹호 목사는 이제 자신을 원주민 '선교사'로 말하기는 힘들다며 웃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27년째 원주민과 함께하면서 그는 "많이 배웠다"고 했다. 원주민들의 삶의 방식을 통해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법,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 원주민들이 교회보다 더 잘했다. 오죽하면 안 목사는 원주민이 싸우는 것을 보고도 "은혜를 받았다". 그들이 질서 있게 대화로 문제를 풀어 가는 모습을 한국교회가 꼭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울 강서구에 장애인 학교가 들어선다고 하니까 지역 주민이 엄청 반대했잖아요. 장애인 부모들이 무릎 꿇는 모습을 보고 제가 정말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동시에 이 사실을 우리 원주민들이 알게 되면 어쩌나 조마조마했어요. 그들이 그런 사실을 알게 되면 '한국엔 교회가 없나?'라고 물을 게 뻔해요. 교회가 대체 뭐 하고 있느냐는 거죠.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보면 말 그대로 'extended family(확장된 가족)'예요. 일례로 이들에게는 '고아'라는 개념이 있을 수가 없어요. 만약 부모가 어떤 일로 아이들을 키우지 못하게 된다면, 부족이 다 모여서 '너는 어디, 너는 어디로 가' 하고 다 결정해 줘요. 그렇게 가게 되면 그냥 그 집 자녀가 되는 거예요. 이들의 삶의 방식을 보면서 정말 많이 배웠어요. 사실 교회가 'extended family' 역할을 해야 하잖아요."

선교적 관점의 대전환

안맹호 목사의 사역은 원주민들의 사회적 상황과 떼려야 뗄 수 없다. 1973년 미국에서 원주민 인권 운동이 시작된 후 미국 사회에서 원주민들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인식이 점점 커지고 있다. 안 목사는 2009년을 역사적인 해로 기억했다. 2009년 7월 미국성공회가 개신교단 최초로 '발견주의 원칙(The Doctrine of Discovery)'과의 단절을 선언했다. 그해 8월에는 미국 상원에서 "인디언에 대한 연방 정부의 공식적인 약탈과 악의적인 정책의 오랜 역사를 인정하고 사과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발견주의 원칙의 유래는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후 스페인은 포르투갈과의 충돌을 예견해 당시 교황이었던 알렉산더 6세에게 '신대륙'에 대한 법적 권한을 가질 수 있도록 요청한다. 교황은 '인터 체테라 회칙(Inter Cetera Bull)'를 발행해 대륙을 정복하고 기독교 제국을 세울 '권한'을 부여했다. 500년도 더 지난 교황의 회칙이 뭐 그리 중요하느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 발견주의 원칙은 미국 정부 설립의 근간이다. 지금도 미국 법원은 영토 분쟁 시 발견주의 원칙에 근거를 둔 판결을 내놓고 있다.

"15세기 이후 식민지 팽창을 도모해 온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동방무역로의 폐쇄'와 '새로운 영토의 절실한 필요성'이란 두 가지 사실로 인해 분열과 경쟁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운 영토에 대한 요구가 당연히 일어났으며, 이에 대한 해답으로서 '발견주의 원칙'이 만들어졌다. 이 원칙은 유럽인들의 식민지 팽창을 내부적으로 조절함으로써 국가 간의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의도가 있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새로 발견된 영토의 소유권은 발견한 국가에 귀속된다'는 것과 '새로이 영토의 소유권을 인정받은 국가는 원주민들의 생명과 그들의 소유물 및 토지에 대한 점유권, 정착권을 가진다'는 이른바 '선취권'을 인정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안맹호, '미국 원주민 선교지 회복을 위한 '치유와 화해' 사역')

원주민법연구소를 만든 버질 킬 스트레이트(왼쪽)와 스티브 뉴컴(오른쪽). 사진 출처 Indigenous Law Institute
원주민법연구소를 만든 버질 킬 스트레이트(왼쪽)와 스티브 뉴컴(오른쪽). 사진 출처 Indigenous Law Institute

'원주민법연구소(Indigenous Law Institute)'는 '교황 회칙 취소 운동'을 이끄는 단체다. 이들은 정치계·사회계·종교계 등 모든 영역에서 발견주의 원칙을 거부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이에 기독교계에서는 2009년 미국성공회를 시작으로 2012년 연합감리교회(UMC), 2016년 루터교회, PCUSA, 캐나다연합교회(UCC), 북미주개혁교회(CRC) 등이 참여했다. 이후 올해 7월 가장 보수적으로 알려진 남침례회가 여기 동참했다. 가장 중요한 가톨릭 교황청은 아직 이 회칙을 취소하지 않은 상태다.

"크게 두 가지예요. 발견주의 원칙 부정과 동화정책의 주요한 제도였던 기숙학교에서 벌어진 학대에 대한 사과. 이 두 가지는 서로 맞물려 있죠. 1993년 캐나다성공회가 기숙학교에서 벌어진 학대에 대해 공식 사과했어요. 사과가 끝이 아니에요. 향후 원주민 교회를 위한 주교는 원주민에서 배출될 것이고, 원주민 사제 150명을 서품하겠다고 약속했어요. 이것이 중요한 부분이죠. 미국의 교단들에서도 사과 한번 했다고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런 구체적인 변화가 이어질 거라고 봐요."

기독교가 발견주의 원칙과의 단절을 선언한 것은 안맹호 목사의 말마따나 '선교적 관점의 대전환'이다. 선교지는 더 이상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선교지와 원주민을 낮잡아 보고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여겼던 관점에서, 원주민도 동등한 권리를 가진 인격체라는 점을 인정하는 관점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는 미국의 복음주의를 거의 그대로 이식한 한국교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안 목사는 "엄청난 일인데 한국교회도, 미국에 있는 한인 교회도 이런 사실들을 잘 몰라요. 관심이 없어요"라며 아쉬워했다.

"뭐 제국주의적 선교라고 이야기하지만 한마디로 그냥 '제멋대로' 했던 거죠. 선교에서 제일 중요한 건 자기 변화예요. 우리가 선교지를 변화시키겠다고 왔지만, 정작 중요한 건 자기가 변하는 거예요. 한국 선교는 '복음 전해야 한다', '교회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 꽉 잡혀 있어서 현장을 잘 보지 못해요. 선교를 한다고 할 때 선교지에 대한 인식 없이 교회의 사명만 가지고 가면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뭘 자꾸 가르치려 하기 전에 먼저 배워야 해요.

 

풀러신학교 윌버트 쉥크(Wilbert R. Shenk) 박사는 선교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나라고, 거기로 가는 길은 '성육신 선교(Incarnational Ministry)'라고 이야기했어요. 저는 이 성육신 선교를 '수동성(passivity)의 회복'이라고 해석해요. 선교사들이 너무 적극적이에요. 선교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인식을 가지고 먼저 배우고 기다려야 하는데, 자꾸 자기가 보스가 되려고 하니까 돈이 필요하고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그럴 필요 없어요. 힘을 좀 빼면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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