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팅의 시대다. 이제 대부분의 자료와 정보는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누구든지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언제든지 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자료 때문에 오히려 좋은 자료를 골라내기가 어렵다. 원하는 정보를 얻고 싶어 검색창에 키워드를 넣어 봐도 맘에 맞는 자료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능력은 넘쳐 나는 정보 속에서 적절한 내용을 분별하고 골라낼 수 있는 안목이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평가와 코멘트를 살짝 얹어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금상첨화다.

큐레이팅의 진짜 실력은 소비자의 필요를 얼마나 정확하게 파악하느냐에 있다. 소비자가 원하는 것, 궁금해하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이 딱 그렇다. 정말 궁금했던 내용을 정확하게 짚어 냈다. 히틀러 통치 시기에 과연 독일의 목회자들은 어떤 설교를 했을까? 독일교회 목회자 대다수가 정부 편에서 유대인 학살에 동조했을 때, 과감하게 나치를 향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사람들은 과연 어떤 정신으로, 어떤 내용으로 설교를 했을까? 진짜 궁금했다. 이런 대중의 관심을 이 책은 정확하게 조준했다.

이 책의 가치는 나치 정권에 저항했던 대표적인 신학자들의 설교문을 직접 읽을 수 있다는 점에 있지만, 그보다 더 빛을 발하는 것은 이들의 설교문을 엮어 낸 딘 G. 스트라우드의 안목과 해설이다. 책의 절반을 차지하는 편집자 서문은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그 당시의 분위기와 사건들을 잘 소개한다. 무엇보다 히틀러와 기독교의 관계,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왜곡된 신앙, 그리고 소수지만 시대를 거스른 신학자들의 용기 있는 신앙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 수 있다. 독일 문학을 전공한 학자라서 그런지, 히틀러의 연설이나 신학자들의 언어 속에 담긴 의미와 표현도 잘 설명한다.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다섯 명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카를 바르트, 헬무트 골비처, 게르하르트 에벨링, 루돌프 불트만의 설교를 한 편씩 소개한다. 각 설교를 소개하기 전에 간략하지만 충실하게 해당 신학자를 소개하고 시대 배경을 알려 준다. 사실 스트라우드의 설명이 있기 때문에 이들의 설교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만약 해설 없이 설교문만 읽었다면 그냥 평범한 설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역사의 그늘에 서서 - 히틀러 치하 독일 신학자들의 설교> / 딘 G. 스트라우드 엮음 / 진규선 옮김 / 감은사 펴냄 / 256쪽 / 1만 6800원
<역사의 그늘에 서서 - 히틀러 치하 독일 신학자들의 설교> / 딘 G. 스트라우드 엮음 / 진규선 옮김 / 감은사 펴냄 / 256쪽 / 1만 6800원

나에게는 위대한 신학자들의 설교문을 평가할 자격이나 실력이 없다. 본회퍼의 설교나 바르트의 설교가 얼마나 성경 주해를 잘했는지 또 얼마나 설교학적으로 좋은 설교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이들의 설교를 읽으면서 이 설교가 1933년 히틀러의 아리안 조항이 나왔을 때 그 시대적 상황과 분위기를 반영한 설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있었다. 글로만 봐서는 '아니다'. 그냥 평상시 설교와 크게 다를 바 없고, 대단히 저항적인 설교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어찌 된 일일까? 혹시 스트라우드가 이들의 설교문을 잘못 골라낸 걸까? 이보다 더 급진적이고 더 날카로운 설교가 있었는데 못 찾아낸 걸까? 아니면 원래 이들의 설교가 이렇게 밋밋했던 걸까?

어떤 이들은 나치에 저항한 신학자들의 설교 속에는 정권을 향한 날카롭고 예리한 비판이 담겨 있을 거라고 예상할지 모르겠다. 목숨을 걸고 현 정부를 비판하는 진정한 예언자의 목소리를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설교는 없다. 본회퍼는 그저 기드온의 용기와 결단을 강조하는 설교를 했을 뿐이다. 그의 설교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저항을 암시하는) 그리 특별한 내용은 없다. 있다면 그저 하나님의 승리를 십자가와 연결하는 사고의 전환 정도?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진정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지 설교한다. 바르트의 경우 하나님의 말씀이 폴크(Volk, 민족을 뜻하는 독일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임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폴크, 즉 유대인이었다는 메시지 정도가 당시 분위기에서는 과감한 설교였다 할 수 있다(160, 163쪽). 설교의 결론은 합심해서 열심히 기도하자는 강력한 권고로 끝난다. 골비처의 설교는그나마 직설적이다. 그는 현대판 세례 요한이라도 된 것처럼 정의를 외면한 예배자들의 가식적인 모습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골비처의 설교에서는 우리가 기대했던 예언자적 파토스를 볼 수 있다. 반면 불트만도 기대에 미치지는 못한다. 그는 1933년 5월 대학에서 '현 상황에서의 신학의 과제'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는데, 그 강의는 이렇게 시작한다.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제 강의에서 현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절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216쪽)

이들의 설교를 읽으면 우리가 기대하는 시대의 예언자, 정권에 저항한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이 아니라 당황스러울 수 있다. 왜 이들은 이렇게 말을 아꼈을까? 혹시 권력이 두려워서였을까? 아니면 원래 신앙과 정치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도대체 이들은 무슨 연유에서 그토록 말을 아꼈을까?

재미있게도 이 책이 소개하는 신학자들은 히틀러의 독재가 심화하면 할수록 더욱더 우직하게 그리스도만을 설교했다. 참혹한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라서도 아니다. 어쩌면 이들은 월터 브루그만이 말한 이 시대의 진정한 예언자들인지 모른다. 예언자는 은유와 상징을 사용해 듣는 이로 하여금 현실의 문제을 자각하게 만드는 이들이다. 그렇다면 히틀러 치하의 고백교회 신학자들은 "복음적 수사를 통하여 나치의 정치적 연설에 맞"선 것이다(119쪽). 실제로 바르트는 히틀러가 아리안 조항을 발표했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예정하셨다는 예정론을 한창 집필 중에 있었고, 본회퍼는 기독론 강의를 하고 있었다.

설교자는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야 만다. 그걸 숨길 필요도 없고, 숨길 수도 없다. 있는 그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전달한다 하더라도 결국 자신이 서 있는 사회적·정치적 입장에 맞게 적용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걸 노골적으로 하느냐, 은유적으로 하느냐다. 청중은 설교자가 자신의 생각과 이념을 주입하기 위해 말씀을 이용하면 대번에 눈치를 챈다.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걸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차분하게 성경의 흐름을 보여 주면서 자연스럽게 상상력을 자극하면 적용을 전혀 하지 않아도 매우 정치적인 설교가 될 수 있다. 사실 그게 진짜 신학적 정치학이다. 청중의 상상력을 자극해, 말씀을 듣는 순간 그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고 또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 시대의 설교자들은 통속적인 정치 설교가 아니라 가장 반정치적인 방식으로 정치적인 설교를 한 것이다. 말씀만으로, 그리스도만으로, 시대를 읽어 낼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과연 기독교 신앙이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새로운 안목과 혜안을 제공할 수 있을까?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이들과는 다른 시대정신을 가질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왜 그 당시 그토록 많은 독일 그리스도인들이 나치에 찬동했을까? 그들이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들도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고, 신앙생활에 진심이지 않았을까? 만약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 없다면, 과연 무엇이 다름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지금까지 내가 내린 결론은, 다름은 '희생자의 얼굴을 직접 봤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희생자의 얼굴을 직접 본 사람은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말로만 듣거나 글로만 접한 사람은 그 차이를 만들어 내기 어렵다. 직접 희생자의 얼굴을 본 사람은 그 얼굴을 쉽게 지우기 어렵다. 본회퍼는 젊은 시절 미국에서 흑인 교회를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노동자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어린이에게 교리 공부를 시킨 적이 있다. 소위 다른 계층의 사람을 만나면서 새로운 지평을 만나게 된 것이다. 에벨링은 나치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당한 희생자 가족을 직접 봤다. 그들의 슬픔과 울분을 직접 경험했다. 나치의 선동과 형이상학적인 신학에 현혹되지 않고, 직접 희생자의 얼굴을 보면 정신을 차릴 수 있다. 결국 시대를 분별하는 안목은 동시대에 희생자가 누구인지 분별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그 안목이 결국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어쩌면 바르트가 본회퍼만큼 유대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던 것은 희생자와 조금 더 거리가 있었기 때문 아닐까 유추해 본다).

많은 목회자들이 정치적인 이슈를 주제로 설교하기를 꺼린다. 정치 이슈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졌든 언급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 문제로 고민하는 분들에게 이 책이 하나의 힌트를 제공할 수 있다. 반드시 정치적인 현안을 직접 언급해야만 예언자적 메시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전달함으로 지도자의 권력을 상대화할 수 있고, 예수의 말과 행동이 지닌 맥락과 의미만 잘 전달해도 그 자체로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다. 루터와 본회퍼가 그랬듯, 십계명과 주기도와 사도신조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정치적인 설교를 할 수 있다. 그 실력을 키우는 건 설교자의 몫이다.

* 이 책에서 내가 꼽은 '원픽' 설교는 게르하르트 에벨링의 '장애인 학살 프로그램의 희생자를 위한 설교'다. 하필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읽었는데 눈물을 참느라 힘들었다. 국가에 의해 희생당한 가족 앞에서 어떤 설교를 할 수 있을지 궁금한 분들은 꼭 읽어 보길. 최근 읽은 설교 중 최고였다.

** 루터교 신학자였던 루돌프 불트만은 1941년 6월 22일 누가복음 14장 16~24절을 본문으로 '큰 잔치 비유에 관한 설교'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날 아침 독일이 소련을 공격했고, 불트만은 어쩔 수 없이 정한 본문으로 설교를 해야만 했다. 이 난감한 상황을 불트만이 어떻게 해결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는 관점 포인트.

최경환 / 대학과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출판사와 아카데미에서 일하면서 강연을 기획하고 다양한 세미나를 진행해 왔다. 현재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공공신학과 정치철학을 꾸준히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들 Ⅰ·Ⅱ>(공저), <태극기를 흔드는 그리스도인>(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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