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을 고백한다는 것은) 사적 세계로 후퇴하며 자신의 세계를 각종 논리로 옹호하려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김진혁, <우리가 믿는 것들에 대하여>(복있는사람), 13쪽]

제가 사상적으로 강력한 영향을 받은 교회가 한 곳 있습니다. 저와 같은 교단에 속한 교회입니다. 방황하던 신학생 시절 (인터넷을 통해) 만난 그 교회의 신학과 목회 방향은, 광활한 우주에 내동댕이쳐진 것만 같던 제 삶을 붙잡아 오늘에 이르도록 도와줬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예배 중에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어디에도 명시하고 있지 않아서, 혼자 궁금해만 하다 15년 정도가 흘렀습니다. 이제와 보니, 그 교회는 충분히 그럴 만한 교회로 생각됩니다. 왜 그런지 알 것 같습니다. 당사자(담임목사)에게 답을 듣지 못했을 뿐.

금년 초 담임 목회를 시작하며 첫 번째 주보를 만들던 날이 생각납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교회가 사도신경을 안 하는데 나도 안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하지만 제가 부임하기 전부터 출석하시던 교인이 무려 '한 분' 계셨기 때문에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분이 '신학적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실 수도 있는 일이고, 무엇보다 부임하자마자 예배 순서에 손을 대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게 좋은 영향을 줬던 그 교회를 계승하고 싶은 꿈이 지연되는 것 같아 마음 한편에 진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7개월이 흘렀고, 오늘 저는 몇 시간 전에 <우리가 믿는 것들에 대하여>(복있는사람)의 마지막 장을 덮었습니다. 책장을 덮으며 이면지에 급하게 쓴 메모는 이렇습니다. "사도신경에 대해 이런 해설이 가능하다면, 예배 중에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라고.

<우리가 믿는 것들에 대하여 - 사도신경에 담긴 그리스도교 신앙 해설> / 김진혁 지음 / 복있는사람 펴냄 / 312쪽 / 1만 6000원
<우리가 믿는 것들에 대하여 - 사도신경에 담긴 그리스도교 신앙 해설> / 김진혁 지음 / 복있는사람 펴냄 / 312쪽 / 1만 6000원

"'아멘'으로 사도신경을 끝맺으며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미래에 대한 갈망을 품고서 오늘의 세상을 바라보고 그 속에서 진실하게 살겠다고 담대히 선언합니다." (286쪽)

제 경험에 국한한 것일지 모르지만, 어려서부터 제게 인식된 기독교 신앙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남루한 일상이나 비열한 정치적 현실에 전혀 무관심한 "탈역사적"(96쪽) 종교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이야 어떻든 지구를 탈출하여 천국으로 이사 가려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일상의 무료함을 못 견뎌 하면서도, 부활이나 영생을 "시간의 끝없는 지속"(270쪽)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기독교인들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예수께서 타락한 "기득권에 대한 매서운 비판"(126쪽)을 하신 분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떤 기독교인들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예수의 이름을 함부로 동원하는 것 같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 성찰에 있어 정직하거나 순수해 보이지 않았고, 매사에 신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합리화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목사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운운하며 '공포 마케팅'을 벌이는 장사꾼 같았습니다(156쪽).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구원받았다는 "우월 의식"(268쪽) 속에서 '누구는 천국 갔고, 누구는 지옥 갔다'는 판정을 망설임 없이 하는 기독교인들의 정서를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이 모든 게 어린 제 마음에 큰 그림자를 드리웠고, 내일모레 마흔을 앞둔 지금까지도 그 그림자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기독교인들 속에서 외로운 기독교인이 되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애석하게도, '타이밍'을 놓쳐 결국 목사가 됐습니다. 애석하다는 말은 취소하겠습니다. 감사하게도, 교회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위에 장황히 나열한 부정적인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교회 현실과 마주할 때, 제가 이상한 건지 교회가 이상한 건지 참 헷갈리기도 하고 우울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저는 평소 책을 읽는 습관이 있고, 건강한 신학자들을 통해 '너는 정상이다'라는 진단서를 받을 때마다 교회와 목회를 떠날 타이밍을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키곤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읽은 김진혁 교수의 책은 고마운 진단서였습니다. 위에 나열한 기독교의 모습이 아닌 정반대의 모습이야말로 참다운 기독교임을 제게 다시 한번 일깨워 줬습니다. 덕분에 제가 하나님을 향해 한 번 더 도약하게 됨을 느낍니다.

그런데 좋은 책을 만날 때마다 종종 느끼지만, 책 내용이 좋으면서도 참 낯섭니다. 마치 제가 읽은 책이 존재하지 않는 듯 교회는 자기만의 길을 열심히 가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어느 신학책을 사무실 책상에 올려놓았더니, 그런 건 뭐 하러 보냐고 '걱정'하시던 선배가 생각납니다. 우리들의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오늘 읽은 고마운 책을 더 많은 분이 읽게 되어 매주 습관처럼 울려 퍼지고 있을 사도신경이 진정으로 사도신경답게 고백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제가 이 책의 부제를 정한다면, '삼위일체란 무엇일까'로 짓겠습니다. 그만큼 저자는 삼위일체신학을 중심축으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자신을 "타자에게 선물하는 능력"(126쪽)입니다. 성부·성자·성령은 서로 간에 영원토록 자신을 선물로 내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가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말해 주기도 합니다. 많은 신자가 강단에서 선포되는 '이웃 사랑'에 관한 담론을 일종의 '짐'으로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삼위일체신학의 맥락에서 다뤄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한편 이 책의 강점 중 하나는, 사도신경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반론을 펴 나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반론이라 함은 단순히 논리적으로 결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저자의 이런 모습이 느껴지는 대목의 귀퉁이에 "전통적인 틀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진보적으로 나아가는 시도"라고 메모했습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사도신경을 비판하거나 심지어 비꼬는 신학적 관점들에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주보를 만들 때 신경이 쓰였던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한국교회의 개혁은 단순히 사도신경의 단어나 개념을 수정·폐기하는 문제에 달린 것이 아닐 수 있겠다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전통을 무너뜨리는 것만이 능사라는 식의 소위 '진보적' 태도는 많은 사람에게 상처만 줄 뿐, 달라질 것은 없으리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저자 김진혁 교수의 글쓰기는 작년 즈음 <질문하는 신학>(복있는사람)을 통해 처음 접했습니다. 그때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이런 표현을 해도 된다면, 그는 '다정한 칼날'이라는 장르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독자를 배려한 다정한 글투와 타락한 교회에 가져다 대는 예리한 칼날이 동시에 공존하는 작가로 느껴집니다. <질문하는 신학> 이후에 나온 이 책은 더 다정하고, 더 예리합니다. 예수는 좋지만, 교회와 목회자에게는 지긋지긋한 환멸감을 느껴 고민하는 이들에게 안성맞춤인 신학자와 그의 저술 방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좋은 책을 다 함께 읽어 보시면 어떨까요. 그러면 사도신경을 외울 때마다 영혼이 잠시 외출하던 일은 더 이상 반복되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경이로운 세계로 진입하게 되는 신비,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환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는(23쪽) 영적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현우 / 자유인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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