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물러나 홀로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간혹 있었습니다." [후스토 곤잘레스, <교회 공동체의 믿음>(이레서원), 13쪽]

"교회에 하나님 보러 가지, 사람 보러 가냐"는 식의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저는 어려서부터 가끔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심지어 작년에도 어느 성도님과 대화를 나누다 들었을 정도입니다. 때에 따라 '사람'의 위치에 '목사'가 들어가기도 하지요. 그런 문장이 잉태된 자리는, 아마도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교우나 목사에 대한 실망스러운 경험일 겁니다. 그래서 너무 괴롭지만, 오랫동안 몸담아 온 교회를 차마 떠날 수는 없어서 꺼내든 비장의 카드가 바로 "교회는 사람 보러 가는 곳이 아니다"라는 선언인 것이겠지요. 그 선언을 계속 되뇌며 괴로운 마음을 달랬을 겁니다. 저는 그 카드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누구나 인격의 부족함이 있겠지만, 단순히 그런 부족함을 넘어 도가 지나치게 절망을 안겨 주는 교인과 목사들의 삶의 자리를 목격하는 일은 분명 큰 상처였을 테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문장 자체에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았습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선 그 말은 교회의 부패에 일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어느 성도님은 제게 본인의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머니가 출석하는 교회 목사의 부덕한 모습 때문에 괴로워하신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그러셨다는군요. "엄마, 너무 힘들어 하지 마. 우리가 목사님 보러 교회 다니는 거 아니잖아." 저는 성도님의 이야기를 죽 듣고,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도님, 그래서 교회가 개혁이 안 되는 거 아닐까요? 목사가 아무리 잘못을 해도 성도들이 자기 안 보고 하나님 보러 온다는데, 그 나쁜 목사가 얼마나 흥겹게 안도의 한숨을 쉬겠습니까."

"성찬 때 함께 빵을 뗌으로써 우리는 서로의 동반자임을 선포하고 (하략)" (161쪽)

첫 번째 이유보다 훨씬 더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제 판단이 잘못됐을 수도 있지만, 제 경험을 돌아보면 정말로 '하나님만' 보러 교회 다니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이 꼭 나쁜 인격을 지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배에 성실히 출석하고 진지하게 설교를 들었으며 교회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다른 교우들을 대할 때도 정중한 태도와 교양 있는 화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종종 묻게 됐습니다. '우리는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으로서 서로에게 정말 누구일까'라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제가 경험해 온 교회들이 늘 '집단'으로 경험될 뿐, '공동체'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의미의 부정적 경험이 오랫동안 쌓여 오는 동안 저는 점차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사람 보러 교회 가야지. 사람 보러 가야, 하나님도 볼 수 있는 거야'라고 말입니다.

자신의 평소 생각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책을 읽는 것은 많은 경우 바람직하지 않지만, 저의 다짐을 격려해 주는 것만 같은 후스토 곤잘레스의 책 <교회 공동체의 믿음>(이레서원)은 퍽 위로가 됐습니다. 저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거든요.

'이 목사, 자네 생각에 나도 동의한다네. 앞으로도 계속 사람 보러 교회에 가길 바라네. 그러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보게 되는 일이 될 걸세.'

<교회 공동체의 믿음 - 하나님, 인간, 구원, 교회, 종말, 삶에 대한 기독교 역사의 대답> / 후스토 곤잘레스 지음 / 오현미 옮김 / 이레서원 펴냄 / 188쪽 / 1만 3000원
<교회 공동체의 믿음 - 하나님, 인간, 구원, 교회, 종말, 삶에 대한 기독교 역사의 대답> / 후스토 곤잘레스 지음 / 오현미 옮김 / 이레서원 펴냄 / 188쪽 / 1만 3000원

"이 책을 진지하게 대하는 만큼 형제자매를 진지하게 대하십시오." (14쪽)

사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기독교 '교리'에 관한 책입니다. 곤잘레스는 역사신학자로서, 세계의 다양한 교회들이 자신의 고유한 전통과 색깔에도 불구하고 서로 어떤 공통분모를 가져 왔는지를 설명합니다(29쪽).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방법부터, 삼위일체, 인간의 타락, 예수님의 구원, 성령, 교회, 예배, 종말에 이르기까지 총 10장에 걸쳐 교리 개념을 풀어냅니다. 

하지만 단순히 '개념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이 책을 펼치는 사람은 얻을 것이 별로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 "교회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러 가는 곳"이라는 말이 신령하다고 느끼는(오해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불편한 책이 될 것입니다. 곤잘레스의 목적은 단순히 수학 선생님처럼 하나님과 교회에 관한 논리적 이론을 전개하려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광대한 우주에서 고고한 자태로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뽐내며 스스로 뿌듯해하는 고독한 절대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령 저자는 기독교의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심을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만약 어떤 신학자가 삼위일체의 오묘한 신비를 논리적으로 파고들어 수백 수천 쪽의 대작을 완성했다 하더라도, 그가 교수 사회를 정치판으로 만드는 일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삼위일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은 늘 기도의 자리를 사모하며 날마다 구름 위를 주님과 걷고 있다고 자부하는 어떤 신자가 같은 교회를 다니는 이들과 '적당히 가까운 사이'로 지내는 일에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다면, 그는 '성찬'이 뭔지 모르는 사람일 겁니다(161쪽).

제 이야기인즉슨, 저자는 우리가 믿는 교리들의 목적은 우리 곁에 있는 이웃이나 같은 교회 식구, 심지어 생태계(175쪽)에 대한 사랑의 태도를 확정할 것을 요구하는 데 있기 때문에, 우리를 둘러싼 세계, 고통받는 이들, 죄가 넘실거리는 현실과 무관한 '개인적 의미'의 "신성한 장소"(123쪽)를 추구하는 것은 결코 기독교일 수 없다는 점을 역설했다는 뜻입니다. 저는 그것이 이 책의 매력이자 핵심이라고 이해합니다.

처음에는 '교회 공동체의 믿음'이라는 책 제목이 너무 진부하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이 단순해 보이는 책 제목에 담긴 위력을 한국의 많은 목사와 신자들이 느끼게 되기를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곤잘레스의 신학이(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사랑이) 항상 사람(그리고 피조 세계)에 대한 입장으로 귀결된다는 점이 책 제목에 정말 잘 드러났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자신을 대견하게 여기던 신자들, 그리고 무언가 충만해 보이는 개별적 존재가 그득 모여 앉아 있으면 뿌듯해하던 저 같은 목사들은, 이 책을 읽고 하나님 앞에 통렬한 참회를 올려야만 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집단'이 아니라 '공동체'라는 신학적 진실과 마주하면서 말입니다.

"참다운 인생은 어울려 사는 삶이다. 그리고 공동의 삶을 엮어 나갈 때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은 신성의 삼위일체다." (181쪽)

재작년으로 기억합니다. 넷플릭스 가입을 할지 말지 깊은 고뇌에 빠진 아내에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거 볼 시간이 있을까? 돈도 아까우니까 가입하지 말자." 하지만 결론적으로 저는 요새 '드라마 보는 아저씨'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재밌는 게 많은지, 나중에 천국이 넷플릭스보다 재미가 없을까 봐 걱정입니다.

오래전에는 로마제국의 박해 때문에 예수 믿기가 어려웠다고 하는데, 요새는 혼자서도 충분히 재밌게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서 예수 믿기가 어려운 시대인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젊은 사람으로서 그런 세상 풍조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혼자서도 잘 놀던 제 성격이 2022년과 아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만약 기독교 신앙이 혼자서 득도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고,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말이 "외톨이 성도"(65쪽)여도 무방한 것이라면 괜찮겠지만, 문제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절대 혼자가 아닌"(58쪽)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혼자서도 재밌게 잘 살아 낼 수 있다는 말이 어떤 면에서는 사실 우리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모든 방면에서 철저하게 타자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혼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꾸 잊게 만들며 우리 내면으로 한없이 파고들게 만드는 이 시대의 분위기가 저에게는 하나의 신앙적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혼자서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는 관념을 일종의 신으로 숭배하고 있는 세상은 '냉소'라는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아픔입니다.

결국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공동체적 삶은 필연임을 일깨우는 교회야말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교회일 겁니다. 왜곡된 의미의 개인주의가 팽배한 사회 속에 추악한 사심 없이, 어떤 정치적 계산도 없이 타인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일 수 있는 특이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우리 기독교 신자들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다른 질서가 가능하다는 것을"(122쪽) 보여 주는 한국교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후스토 곤잘레스의 좋은 책이 우리를 그런 삶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현우 / 자유인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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