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메시지

사람이 메시지다. 고유한 삶이 고유한 글을 빚어낸다. 책을 접할 때 저자에게 먼저 관심을 갖는 이유다. 그렇기에 <동양의 눈으로 읽는 로마서>(IVP)는 신비롭다. '잭슨 W.(Jackson W.)'는 저자의 필명이다. 그에 대한 정보가 상당히 제한적이다. 막연히 그를 아시아계 신약학자 혹은 동양 고전을 전공한 서양 학자일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건 '동양'을 '학문'의 영역으로 단정한 결과다. 저자에게 동양은 '삶'이다. 그는 신학자이자 중국 목회자들을 가르치는 선교사다. 미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동아시아에서 20년 가까이 살았다. 어찌 보면, 이른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 불리는 동양에 대한 서양인의 우월적 편견을 갖기 쉬운 상황이다.

그러나 저자는 '동양'이라는 삶의 자리를 진지하게 성찰했다. 그러한 깨달음을 통해 자신의 힘겨웠던 어린 시절의 의미를 반추한다(62~64쪽). 이를 통해 나는 서양인 저자가 '동양의 눈'으로 '로마서'를 이해할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음을 인정하게 됐다. 동시에 동양인 독자로서 서양인 저자로부터 배우게 될, 로마서를 해석하는 폭넓은 시각을 기대하게 됐다.

<동양의 눈으로 읽는 로마서 - 바울의 메시지와 선교에 나타난 명예-수치 문화> / 잭슨 W. 지음 / 박장훈 옮김 / IVP 펴냄 / 440쪽 / 2만 5000원
<동양의 눈으로 읽는 로마서 - 바울의 메시지와 선교에 나타난 명예-수치 문화> / 잭슨 W. 지음 / 박장훈 옮김 / IVP 펴냄 / 440쪽 / 2만 5000원
방법론: 아시아 신학의 가능성

본격적으로 내용을 소개하기에 앞서 이 책의 방법론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많은 독자가 공감할 것이다. 신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서양'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좌절을 겪는다. 하지만 '서양의 눈'으로 쌓은 신학적 성과 중 일부는 자칫 성경의 메시지와는 거리가 멀 수 있다. 당대 문화를 외면한 채 현대 서양의 시각으로 본문에 접근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단지 '죄인'이라는 사실만을 일깨우고 '구원의 확신'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추상적인 복음 제시(259쪽)가 대표적인 예다.

반면에 저자는 오늘날 동아시아 사람들은 성경의 배경인 고대 서아시아 사람들과 '명예-수치 문화'를 공유한다고 주장한다(42쪽). 따라서 기존의 '서양적 관점'의 한계를 뛰어넘는 폭넓은 신학을 동양이 제시할 수 있다고 격려한다. 나는 이를 통해 좌절을 딛고 일어나 한국인 목회자로서 긍지를 가지고 성경을 연구할 위로와 희망을 발견했다.

핵심 주제: 명예-수치 문화

책의 서두에서 눈에 띄는 점은 성경 본문을 대하는 저자의 성숙한 태도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신학 작업은 그전에도 많이 시도된 바 있다. 그중에는 '상황'을 가지고 무리하게 본문을 헤집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단호하게 밝힌다.

"다시 말하지만 동아시아적 맥락을 성경에 강제로 끼워 넣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성경을 그 자체의 언어로 이해하는 것이다." (42쪽)

저자는 현대 서양 문화에 더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낯선, 동양의 '명예-수치 문화'를 통해 로마서를 살펴본다. 그는 동양인 혹은 동양 문화를 함부로 단정하지 않고 세심하게 접근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통찰을 억지로 로마서 본문에 덧칠하지 않는다. 이렇게 원숙한 태도가 책 전체에 흐르고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로마서의 핵심 사상인 '바울의 선교'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새롭고 깊은 성찰을 얻을 수 있었다.

1) 바울의 선교

로마서는 '선교를 위한 편지'다. 기록 목적이 그 사실을 분명히 드러낸다. 바울은 흔히 오해하듯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로마서를 쓰지 않았다. 스페인 선교를 위해 로마 교회의 도움을 받고자 편지를 썼다.

이를 위해 바울은 '이방인을 향한 자신의 소명'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76쪽). 심지어 자신의 정체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롬 1:1)으로 규정한다. 이때 '종'을 가리키는 헬라어는 '두울로스(doulos)'다. 당시 사회의 '명예-수치 문화'를 고려한다면, 이는 매우 충격적인 표현이다. "이러한 자기소개는 관습적 인사 방식과 현저히 다른 것이며, 확실히 '체면을 잃게' 하는 것"(72쪽)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자신을 낮춰 상대의 체면을 높이기 위함이다.

그리고 바울은 헬라인과 이방인을 구분한다. 이를 통해 로마 교인들 또한 헬라인에게 단지 '이방인'에 지나지 않음을 미묘하게 상기시켜 그들을 겸손하게 한다(79쪽). 동시에 모든 문화를 초월하는 복음을 일깨우며 스페인 선교를 지원할 동기를 불어넣는다(82~83쪽). 이 역시 '집단적 정체성'과 관련한 동양의 시각으로 읽을 때 더욱 눈에 들어오는, 로마서의 중심 주제다.

2) 하나님의 영광

저자는 로마서의 핵심을 담은 5~8장의 중심 주제를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정리한다. "그리스도는 수치를 통해 명예를 얻었고,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도 수치를 통해 명예를 얻을 것이다."(248쪽) 이것은 로마서를 넘어 기독교 신앙 전체에 대한 탁월한 요약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망에 종노릇하던 죄인들을 수치로부터 해방시켜 주기 때문이다(롬 6:4, 8:11, 12).

바울의 자랑은 바로 이 소망에 있다. 이것이 그가 꿈꾸는 진정한 영광과 명예의 기초다(231쪽). 그 영광은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즉 예수님의 다스림에 참여해 그 뜻을 이 세상에 펼치는 '중재자'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240쪽).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체면을 잃는다'(243쪽)." 나는 이 문장에 마음 깊이 동의하며 밑줄을 긋고 그 옆에 이렇게 적었다. "그러나 잃음으로써 온전히 얻는다."

바울의 삶이 전하는 메시지

이와 같이 저자는 동서양을 넘나들며 얻은 폭넓은 성찰로 복음의 메시지를 풀어낸다. '명예와 수치'의 시각에서 로마서의 핵심 주제인 '선교'와 '영광'의 의미를 되짚어 준다. 이것은 곧 바울의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는 로마의 대표적인 항구도시인 길리기아 다소에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나 자랐다. 그리고 성장한 후에는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을 스승으로 모시고 정통 율법 교육을 받았다.

바울은 이처럼 드넓은 삶의 지평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이해했다. 그 결과 자신에게 본래 주어진 영광의 길, 많은 사람이 자랑스러워하는 숱한 성공의 기회를 포기했다. 기꺼이 수치를 감내하고 '종'을 자처하며 모욕을 견뎠다. 그 결과 바울은 위대한 사도가 됐다. 진정한 명예를 가슴에 품고 부활 소망을 이뤘다.

즉 로마서는 창백한 사상서가 아니라 바울의 뜨거운 삶이 빚어낸 위대한 복음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로마서에 담긴 바울의 맥박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진솔한 자기 고백과 소명 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이처럼 로마서 텍스트를 넘어 인간 바울을 생생히 마주하게 하는 것 역시 이 책의 소중한 미덕이다.

나의 삶, 나의 자랑, 나의 메시지

책을 덮으며 날카로운 질문 앞에 섰다. 나는 과연 어떤 명예를 추구하고 있는가. 내가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위해 나는 무엇을 인내하고 있는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자랑하는 내용은 우리가 무엇을 칭송받을 만하다고 여기는지를 드러낸다. 따라서 자랑은 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 인식을 시사한다." (255쪽)

물론 지나치게 비장할 필요는 없다. 모두가 바울처럼 살 수는 없다. 생활인으로서 여러 염려와 불안을 겪기도 한다. 현실적으로 유리한 여러 조건을 선망하기도 한다. 다만, 나는 로마서에 담긴 진리를 통해 '명예와 수치'를 올바로 깨닫길 소망한다. 자랑할 것을 자랑하고, 부끄러워할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알길 소망한다. 염치를 알고 건강한 양심과 상식을 지키는 목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가 걸어왔고 걸어갈 인생길을 통해 빚어낼 고유한 메시지가,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의미 있는 울림으로 다가가길 바라는 기도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이 책의 한 가지 아쉬움은 제목이다. '동양의 눈으로 읽는 로마서'는 원제 'Reading Romans with Eastern Eyes'의 직역이다. 서양 독자들에게는 신선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동양의 눈을 가진 한국 독자에게는 책의 진면목을 가리고, 진부하게 느끼거나 오해하게 만들 여지가 있다. 따라서 현재 제목을 '부제'로 하고, '더 넓게 읽는 로마서'와 같은 제목을 붙였다면 어땠을지 생각해 봤다.

이 책에는 본 서평에 담지 못한 많은 장점과 통찰이 녹아 있다. 로마서와 복음을 더 폭넓게 이해하기를 원하는 이에게, 그리스도인·목회자로서 자기 정체성과 소명을 새롭게 하길 원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또한 바울과 잭슨 W.가 그러했듯이 저마다의 고단한 삶을 통해 고유한 아름다움이 담긴 메시지를 전하길 진심으로 축복한다.

정대진 / 가장 평범한, 보통 목사가 되길 꿈꿉니다. 목회자로서의 많은 결점을 '정갈한 글쓰기'로 극복하고자 노력 중입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줄곧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 구약학 석사 학위를 어렵게 받았습니다. 현재 포항제일교회(박영호 목사)에서 공동체 담당 목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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