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아에게는 연수라는 딸이 있다. 친구 입에서 "연수 같은 딸 있으면 좋겠다"라는 말이 나오게 하는 딸, 잘나가는 변호사와 비교해도 부럽지 않은 딸이다. 연수는 교사라는 좋은 직업을 가진, 참하고, 엄마한테 잘하고, 엄마 닮아 숙맥인 여자, 남자를 잘 모르는 정숙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경아는 이런 연수가 자랑스럽다. 지금 이대로가 딱 좋다. 이 귀한 딸이 혹시 어디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하며 옷차림을 단속하고, 늦은 귀가 시간에 잔소리를 아끼지 않는 경아의 행동은 전부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연수가 집을 떠나 근무하는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시작했을 때도, 경아는 연수가 자취방에 혼자 있는 게 맞는지부터 확인하려 한다. '남자', 경아가 상상하는 가장 최악의 문제인 남자가 함께 있다면 연수가 다칠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만약 연수가 경아의 생각과 같은 '그런' 딸이 아니라면, 경아와 연수는 어떻게 될까. 만약 연수가 학교 쓰레기통에 임신 테스트기를 버리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여자애"들의 편이라면.

집에 들른 연수와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양손 가득 반찬을 들려 자취방으로 돌려보낸 다음 날, 경아는 의문의 메시지를 받는다. 첨부된 영상을 클릭하자 익숙한 자취방을 배경으로 가벼운 옷차림을 한 연수가 등장한다. 카메라를 향해 자신이 섹시한지 묻는 연수의 모습은 경아에겐 너무 낯설고 혼란스러운 무엇이다. 경아의 당혹감은 곧 거대한 충격으로 바뀐다. 그건 연수의 전 남자 친구가 유포한 성관계 영상이었다.

영화 '경아의 딸'(김정은 감독, 2022) 포스터.
영화 '경아의 딸'(김정은 감독, 2022) 포스터.

영화 '경아의 딸'은 디지털 성범죄를 다룬 기존 영상미디어들('걸캅스', '호텔 델루나',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과 달리, 범인을 잡거나 복수하는 게 목적인 영화가 아니다. 범인의 정체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고, 더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 재판을 통한 가해자 처벌이 피해자의 회복 과정에 중요한 요소로 제시되기는 하지만, 재판 과정 내내 가해자 남성의 존재감은 제로에 가깝다. 유죄판결이 난 순간 법정에서 연행되는 남자가 힘차게 아웃포커싱되는 연출이 거의 유머로 느껴질 정도다.

이 영화가 주목하는 문제는 경아 안에 있다. 경아가 두려워하는 불특정 다수의 남자들도, 경아를 때린 남편도, 모두 경아 내면의 목소리로 자리잡아 연수를 다치게 한다. 경아가 먼저 굴복당했던 목소리 앞에서 연수는 "끝까지 해보려고" 하는데, 그런 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경아는 비슷한 실수를 반복한다.

사랑해서 하는 거라고 믿었던 말이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쫓아 버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경아는 전에 알던 사랑을 깨고 나오기로 한다.

"춥고 숨막히는, 아빠가 생각나는 인천"에 눌러살며 누구 하나 만나는 사람도 없이 요양보호사 일에 헌신하던 경아는, 남편의 유산이었던 아파트를 떠난다. 보수적인 가풍을 암시하는 십자가 달린 문짝, 근엄하게 찍힌 가족사진 따위가 경아의 뒤로 남겨진다. 꾹꾹 눌러쓴 엄벌 탄원서는 경아가 새로 발명한 사랑의 기록이다. 스크린에 스쳐 지나간 정확한 사과의 몸짓에 나는 조금 압도감을 느꼈다. 현실에도 이렇게 딸과 화해를 해낸 엄마가 있을까? 세상이 이 사랑을 두려워하면 좋겠다. 모든 사람이 정말 자기 딸을 이렇게 사랑할 줄 알게 된다면, 지금 당장 온 세상이 산산조각나 디지털 성폭력 같은 폭력은 존재할 수 없는 형태로 재조립돼 버릴 테니까.

부모와의 연결이 돈독한 가정에서 자란 여성들은 '경아의 딸'에서 자신과 엄마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믿는 집안의 딸인 한 친구는 이 영화를 일컬어 "기독교 혼전순결주의자 엄마를 둔 딸이라면 꼭 봐야 하는 영화"라고 칭했는데, 적절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경아의 딸'은 우리 사회의 엄마들이 딸들에게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면서도, 그 이해에서 더 나아간 대화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다. 가정에서 쉽게 시청할 수 있게 VOD로도 보급되길 바란다.

딸 연수(하윤경 분)가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경아(김정영 분)는  크게 혼란스러워한다. 영화 '경아의 딸' 스틸컷
딸 연수(하윤경 분)가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경아(김정영 분)는 크게 혼란스러워한다. 영화 '경아의 딸' 스틸컷

마지막으로, 디지털 성범죄 분야에서 활동한 활동가로서, 이 영화의 가장 탁월한 지점은 피해자 재현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여러 미디어에서,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는 주로 하얀 옷을 입고 생과 사의 경계에 선 비체, 즉 귀신이나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로 존재하며 가련하고 연약한 이미지로 표현돼 왔다. 여성이 자발적으로 성관계에 응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될 구시대적인 비난을 피하기 위해, 성관계 단계에서부터 강제로 폭행을 당한 사례에 집중하는 경향성도 뚜렷했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이 '성관계에 응하며 영상을 찍은 여자도 잘못'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내비치는 탓이다.

'경아의 딸'은 이와 같은 재현이 수반하는 과오를 답습하지 않으면서 피해 경험 이후에도 이어지는 연수의 삶을 구체적으로 비춘다.

실제로 피해자들은 괴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앞에서 묘사된 모습처럼 보이는 피해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회권을 박탈당하고, 피해 회복에 큰 비용을 들이게 되는 현실은 피해자 개인이 마음을 긍정적으로 먹는다고 해결되지 않는 물리적인 장벽이기에, 어떤 피해자는 죽음을 삶보다 더 가깝게 느끼기도 한다. 영상을 유포하고, 클릭하고, 다운받고, 공유하는 가해자들이 피해자를 죽일 듯이 괴롭히고 있기 때문에 지극히 당연하게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그러나 피해자가 사람인 이상, 그런 감각만이 그 사람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고통스러운 상황이 자꾸 반복된다 하더라도, 산 사람의 삶에서는 고통만이 전부가 아닌 시간이 생기고야 만다. '경아의 딸'을 끝까지 보면 이 문단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한유리 / 머리 아플 때 시편 23편 부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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