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싱어송라이터 '이랑'의 페미니즘과 신학(1)"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 편집자 주

우리는 지난번 글에서 싱어송라이터 이랑의 가사들을 통해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여성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 고통과 괴로움은 실로 끔찍하고 무거워서, 당사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하거나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이랑은 이런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매우 부당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자기가 잘못한 일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면 체념이라도 할 텐데,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괴로움을 겪게 되니 이는 매우 부조리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랑은 자신의 노래에서 이러한 부당함을 신에게 토로하기 시작합니다. 이 고통과 괴로움이 결국에는 신의 탓이라는 것이죠.

이랑과 악의 문제

젊은 친구 지구에 온 것을 환영하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곳이라네
둥글고 축축하고 북적대는 곳이라네
자네 이곳에서 고작해야 백년이나 살까
세이프 섹스를 하고 새 생명을 내보내지 말게
이 지구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 만들었다네
믿을 수 없다면 조간신문을 사서 읽어 보도록 하게
어떤 신문이든 어떤 날짜든 상관없다네
'좋은 소식, 나쁜 소식', 이랑 2집 <신의 놀이>10번 트랙.

이 곡은 짧지만 중독성 있는 멜로디와 충격적인 가사는 머릿속을 계속 맴돕니다. 화자는 지구에 이제 막 태어난 사람에게 조언을 건네는 관조자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 역시도 어쩔 수 없는 지구인일 텐데, 자신은 지구인이 아닌 것처럼 타자화하고, 동시에 상대방을 지구인으로 규정하며 조언하는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화자는 지구에 온 것을 환영하면서도 동시에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알려 주는 경고자 역할을 수행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세이프 섹스를 하고 새 생명을 내보내지 말게"라고 경고하는 점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전통적인 관점에 따르면, 성관계는 부부 사이에서만 허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성을 주신 이유는 자손을 낳아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에 따라 성관계를 통해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일은 인간이 지닌 숭고한 의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화자는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세이프 섹스"를 해서 새 생명을 더 내보내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이 지구를 만든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고, 그 사실은 조간신문을 살펴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악하게 느껴지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하면 더 이상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하지 말라고까지 권하는 것일까요?

싱어송라이터 이랑. 사진 제공 유어썸머
싱어송라이터 이랑. 사진 제공 유어썸머

이러한 가사에서 우리는 이랑의 사유가 '악의 문제'와 맞닿아 있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가사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암묵적으로 전제합니다. (1)만약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선할 것이다. (2)선한 신은 자신이 창조한 것들을 선하게 인도할 것이다.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악의 문제가 출현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결코 선한 세상이 아니라 오히려 괴로움과 고통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전 글에서 제가 했던 이야기를 보다 적극적으로 끌어와 해석하면, 이 세상은 '여성들이 죽어 나갈 수밖에 없는 세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선한 신에게서 악한 세상이 나올 수 있을까요? 이러한 악의 출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많은 현대 신학자가 '악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지닌 전능성의 의미를 제한하듯, 이랑은 과감하게 선한 신에 대한 관념을 포기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신이 아니라 사탄이 만든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선한 신은 자신이 창조한 세상이 악하게 흘러가는 것을 결코 두고볼 수 없을 테니까요.

저는 이 노래가 '이 세상이 이렇게 악할 수밖에 없다면, 그 책임은 신에게 있는 것 아니냐'고 묻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을 향해 '당신이 도대체 사탄이랑 다를 것이 무엇이냐'고 탄식하면서 말입니다. 다른 노래에서도 이랑은 세상을 악하게 만든 신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신이 앉아 있다 / 신은 행복하다
신은 만든다 신을 / 그에게도 행복을 전하고 싶어서
이제 그 신이 앉아 있다 / 그 신은 행복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 가끔 날아 보기도 한다
(중략)
우리는 행복을 알지 못한다 / 우리의 존재가 그렇게 하고 있다
지겹게 먹고 싸고 본다 / 저주받은 것처럼 늙어 간다
그러다 가끔 위를 올려다보았다 / 거기엔 분명히 뭔가 있었다
'나는 왜 알아요', 이랑 2집 <신의 놀이> 9번 트랙.

이 가사를 보면, 이랑은 '신은 행복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존재자'라고 노래합니다. 신에게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당한 비아냥입니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세상은 괴로움과 고통이 가득하고, 그로 인해 죽어 가는 사람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홀로 행복하기까지 합니다.

반면,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행복한 신에 비해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지겹게 먹고 싸고 보"면서 "저주받은 것처럼 늙어" 갈 뿐입니다. 저주받은 인간의 모습은, 다른 가사들에서 노래하듯, 외모를 평가당하고, 자존감이 떨어지고, 못생겼다고 놀림받고, 주체성을 침범당하고, 원치 않은 방식으로 대상화되고 전시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괴로움과 고통을 겪는 인간은 가끔 하늘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엔 분명히 뭔가 있었다"라는 가사는 신적인 존재자가 저 하늘 위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 악한 세상에서 괴로움과 고통을 겪으며 다만 하늘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은 행복합니다.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신은 자신이 창조한 세상이 얼마나 악하든지, 그 속에서 인간들이 얼마나 고통을 겪든지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이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고통을 오롯이 감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책임한 신을 원망하면서 말이지요.

이랑의 노래는 '신'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사진 제공 유어썸머
이랑의 노래는 '신'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사진 제공 유어썸머

인간의 욕심이란 끝없이 끝도 없어서
내가 만약 신이라면 그를 만든 걸 후회하고
지구를 만들기 전으로 되돌리고 싶을 텐데
(중략)
내가 만약 신이라면 이런 이기심에
엄청 화가 나서 다 엎어 버리고 싶을 텐데
내가 만약 신이라면 이미 다 죽여 버렸을 텐데
'내가 만약 신이라면', <숨 (SUM∞) 일곱 번째 그린플러그드 공식 옴니버스 앨범> 3번 트랙.

이 곡은 자연환경을 생각하자는 취지에서 여러 뮤지션이 협업한 앨범에 수록돼 있기에 조금 다른 문맥에 서 있기는 하지만, '신이 어떤 존재자여야 하는지'에 대한 이랑의 고유한 생각이 잘 드러난 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랑은 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관조하는, 홀로 행복한 존재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가사는, 이기적인 욕심으로 환경을 파괴하는 인간을 향한 분노로 읽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이런 인간을 향해 벌을 내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항의로 읽히기도 합니다. 이는 '신이라면 선한 책무를 다해야 한다', '이런 비통한 상황을 방관하지 말고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인간의 입장에서 가르치고 훈계하는 태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랑은 침묵하는 신을 깨우기 위해 신을 조롱하고 때로는 훈계합니다. 당신의 무책임함 때문에 이 세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보라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괴로워하며 울고, 또 얼마나 많이 죽는지를 보라고, 당신이 선하다면 지금 당장 악을 퇴치하기 위해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고 절규합니다. 이 구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왠지 익숙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시편의 탄식시에서 이러한 구도를 자주 발견합니다.

시편에는 탄식시가 많이 등장합니다. 시편 기자들은 악한 세상을 목도하고 괴로워하면서, 하나님이 왜 악인들의 형통을 그대로 놓아두시는지 따집니다. 그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무능력을 지적하고, '당신이 정말 살아 계시는 것 맞느냐'며 시비를 걸고, 세상의 악을 날려 버릴 신적 책무를 다하라고 훈계하기도 합니다. 이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하고 괴로운지 노래합니다. 그리고 신은 악한 세상을 낫게 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는 관조자일 뿐이라고 비아냥거립니다. 선한 신이 진정으로 해야 할 책무가 무엇인지 훈계하는 듯 노래하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랑의 노래, 이랑의 신학은 시편 탄식시와 닮아 있습니다.

공동체를 찾아서

내 안에 있는 그 노랠 찾아서
내가 살고 싶은 그 집을 찾아서
내가 사랑할 그 사람을 찾아서
내가 되고 싶은 가족을 찾아서

나는 언젠가 후회하게 될까
오늘 엄마의 전활 받지 않은 것
내 평생 아빨 용서하지 않은 것
키우는 고양일 세게 때렸던 것

 

나는 언젠가 후회하게 되겠지
오늘 엄마의 전활 받지 않은 것
내 평생 아빨 용서하지 않은 것
키우는 준이칠 세게 때렸던 것

 

이건 뭔가 되게 크게 잘못된 것 같아
이건 뭔가 되게 크게 잘못된 것 같아
이건 뭔가 되게 크게 잘못된 것 같아
잘못된 것 같아

 

내 안에 있는 그 집을 찾아서
내가 살고 싶은 그 집을 찾아서
내가 사랑할 그 집을 찾아서
내가 되고 싶은 그 가족을 찾아서
'가족을 찾아서', 이랑 2집 <신의 놀이> 2번 트랙.

그러나 이랑은 고통을 탄식하는 데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이 곡은 이상적인 가족 공동체를 반성적으로 노래한다는 점에서, 이랑의 소망이 담긴 노래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랑은 자신의 노래 전반에 걸쳐 부조리한 고통을 마주보고 서 있습니다. 이랑은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피 맺힌 울부짖음에 담아 노래하는 한편, 자신의 섭리 안에서 이 고통을 허용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고통 너머의 무능력한 신에게 탄식하며 노래합니다. 이 탄식의 끝에서 이랑은 더 이상 신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저 담담하게 자신이 함께 살고 싶은, 또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또 자신이 되고 싶은 가족 공동체를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어쩌면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악이 창궐하는 세상에서, 특히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더욱 부당한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 세상에서, 그럼에도 죽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남아 저항을 이어 가겠다는 다짐인지도 모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랑이 이 노래에서 어떤 집을 찾고 싶은지, 또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지, 또 어떤 가족이 되고 싶은지 적극적으로 설명하거나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한편으로, 이상적인 가족 공동체가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고통과 악의 앞에서는 어떤 이상적 공동체의 모습으로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 유한한 한계를 지닌 어떤 인간도 고통과 악을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간접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화자 자신의 주체성과 의지를 더욱 잘 보여 주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가 살고 싶은 집을 찾아 나서는 것도 '나 자신'이며, 내가 사랑할 사람을 찾아 나서는 일도, 그 사람을 사랑하기로 결정하는 일도, 내가 되고 싶은 가족을 찾아 나서는 일도, 또 되고 싶은 그 가족을 만들어 가는 일도 바로 '나 자신'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탄식의 끝에서 이랑은 그가 원하는 가족 공동체를 찾아 나섭니다. 사진 제공 유어썸머
고통과 탄식의 끝에서 이랑은 그가 원하는 가족 공동체를 찾아 나섭니다. 사진 제공 유어썸머

이러한 주체적 결단에는 더 이상 신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랑의 탄식 노래는 시편의 탄식시와는 구분됩니다. 시편의 탄식시가 끊임없이 고난 앞에서 절규하면서도 결국에는 문제들을 해결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이랑의 탄식 노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신에게 더 이상 어떤 것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랑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보다 정확히는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가족 공동체를 주체적인 방식으로 찾아 나서기로 결단합니다. 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랑은 그런 가족의 모습을 꿈꾸는 것 같습니다. 적극적으로 어떤 이상적인 가족 공동체의 모습을 규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엄마의 전화를 부담없이 잘 받을 수 있는 가족, 아버지를 충분히 용서할 수 있는 가족, 또 고양이를 세게 때릴 일이 없는 가족을 말입니다. 이는 간단해 보이지만, 많은 사람이 어려워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서로 전화를 잘 받고, 서로를 용서하며, 서로를 때리지 않는 공동체, 더 나아가 강자가 약자를 죽이지 않는 공동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깊게 사랑하는 일이 선행돼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회, 그런 가족 공동체는 지금으로서는 요원하기만 합니다.

이랑은 더 이상 신에게 어떠한 것도 바라지 않는 것 같지만, 어쩌면 이랑이 바라는 가족 공동체의 모습은 하나님나라와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인격체로서 존중하는 공동체, 서로 전화를 잘 받을 수 있고, 서로를 잘 용서할 수 있는 공동체. 여성의 외모나 복장을 평가하지 않고, 나쁘게 대하지 않고, 주체성을 침해하거나 대상화하지 않는, 그래서 더 이상 "사람 죽는 것처럼" 울지 않아도 되는, 수만 가지 방식의 자살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공동체.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나라가 그런 공동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혹은 다른 어떤 종류의 소수자라는 이유로 차별받거나 고통받지 않고 서로 존중하며 사랑하는 공동체, 이랑이 꿈꾸는 이런 공동체야말로 교회가 지향해야 할 하나님나라의 모습이 아닐까요?

정제기 / 지방대 철학과 대학원생. 공부와 생계를 병행하기 위해 파트타임 노동자로도 살아가고 있다. 현재는 박사 논문을 쓰며 철학적 입장과 신앙고백의 일치를 모색하며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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