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정제기, '윤동주 주체성의 철학적 원형 - 칸트와 레비나스의 이중 변주', <한국시학연구>, 제65집, 2021에 수록된 논의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수정·보완한 글이며, <뉴스앤조이>가 2021년 4월 15일 게재한 '동주와 칸트: 이율배반을 극복하는 희망의 힘 - 윤동주가 희망한 불가능성의 가능성'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 편집자 주
들어가며: 타인의 얼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가장 지고하고도 중요한 계명은 무엇일까요? 아마 곧바로 예수님의 두 계명이 떠오를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첫째 계명과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마 22:37~40)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계명을 통해 모든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마음과 정성을 다해 지켜야 할 가치는 - 그 사람이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상관없이 - 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한국교회는 좀 이상합니다. 하나님 사랑은 그렇게 강조하고 부르짖는 것에 비해, 이웃 사랑에는 별반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이는 교회가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팬데믹 상황에서 '종교의자유'를 지키는 데는 목숨을 걸면서, 정작 고통받는 이웃을 돌보는 일에는 무관심한 모습을 보인 데서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저는 교회가 이웃 사랑의 원리를 지키기 위해 교회 공간을 환자들을 위한 격리 공간으로 내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혹은 교회가 코로나19로 취소된 행사 비용을 아껴 어려운 이웃에게 흘려 보냈다는 이야기도 별로 들어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가 말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부르짖지만, 실제로는 이웃들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일로 명백히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웃 사랑의 원리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가 말한 '타자성의 사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 기고한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사유들: 니체, 칸트, 레비나스'에서 저는 '레비나스가 왜 한국교회에 필요한 사유인지' 간략하게나마 설명했습니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어떤 특정 이론의 틀에 맞춰 세계 전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전체성의 폭력'을 거부하는 사유이며, 동시에 타자성을 향해 나아가는 사유입니다.

레비나스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명령하는 구약성경의 가치를 되살려 타자성의 사유를 치밀하게 전개한 철학자입니다.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사유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바로 "얼굴의 현현" 개념입니다. 그에 따르면, 타자의 얼굴은 벌거벗은 모습을 하고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저항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서, 또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얼굴을 하고서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닥쳐옵니다. 레비나스는 우리가 이 얼굴을 경험할 때 비로소 진정한 윤리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레비나스의 이 얼굴에 대한 사유는 시인 윤동주의 작품 곳곳에서도 발견됩니다.

윤동주가 보여 주는 레비나스적 성찰
윤동주(1917~1945)와 레비나스(1906~1995).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윤동주(1917~1945)와 레비나스(1906~1995).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이전 글에서 저는 윤동주의 시에서 칸트적인 특징이 잘 드러난다는 것을 '이율배반'과 '희망'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윤동주는 칸트적 색채만을 드러내는 시인은 아닙니다. 칸트적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레비나스적인, 타자성에 대한 성찰을 갖춘 시인입니다. 레비나스가 나치의 만행으로 부모·형제를 모두 잃고 유대인 수용소에 갇혔던 경험을 통해, 전체성의 폭력을 극복하는 '타자의 형이상학'을 전개한 철학자라면, 윤동주는 일제강점기와 전쟁 상황이라는 거대한 전체성의 폭력을 벗어나기 위해 시를 쓴 시인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윤동주의 시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마음으로 "하늘", "바람", "별" 같은 타자성을 성찰합니다. 윤동주의 시에 담긴 타자성의 사유를 잘 이해하기 위해 다음 작품들을 살펴봅시다.

빨랫줄에 걸어 논 / 요에다 그린 지도 / 지난밤에 내 동생 / 싸 그린 지도 // 꿈에 가 본 엄마 계신 / 별나라 지돈가? / 돈 벌러 간 아빠 계신/만주 땅 지돈가? ('오줌싸개 지도', 1936년 초)1)

어머니 / 누나 쓰다 버린 습자지는 / 두었다간 뭣에 쓰나요? // 그런 줄 몰랐더니 / 습자지에다 내 버선 놓고 / 가위로 오려 / 버선본 만드는 걸. // 어머니 / 내가 쓰다 버린 몽당연필은 / 두었다간 뭣에 쓰나요? // 그런 줄 몰랐더니 / 천 위에다 버선본 놓고 / 침 발라 점을 찍곤 / 내 버선 만드는 걸. ('버선본', 1936년 12월 초)2)

누나의 얼굴은 / 해바라기 얼굴 / 해가 금방 뜨자 / 일터에 간다. // 해바라기 얼굴은 / 누나의 얼굴 / 얼굴이 숙어 들어 / 집으로 온다. ('해바라기 얼굴', 1938년 추정)3)

위에서 인용한 시는 윤동주의 동시童詩들입니다. '오줌싸개 지도'는 밤새 동생이 이불에 오줌을 누었다는 정겨운 추억을 떠올리는 모티프를 사용하지만, 동시에 깊은 그리움과 외로움이 내재된 동시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화자의 동생은 밤중에 이불에 오줌을 눌 만큼 나이 어린 동생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이 시의 화자가 결코 나이가 많은 사람은 아닐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둘째, 화자는 동생의 오줌이 그려 낸 모양을 보고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라고 중얼거리고 있습니다. 화자는 엄마를 "꿈"에서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엄마가 별나라에 계시다는 것, 엄마를 꿈에서나 겨우 볼 수 있다는 것은 엄마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요? 셋째, 화자의 아버지조차 "돈 벌러 만주 땅"에 계시다는 것을 통해 우리는 화자가 부모님과 떨어져 어린 동생과 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돈 벌러 저 멀리 만주 땅까지 가야만 하는 상황에서 홀로 동생을 돌봐야 하는 어린 화자는 "고아"의 얼굴을 가진 타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버선본'의 화자는 '오줌싸개 지도'의 화자보다는 사정이 조금 나은 편입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누나와 함께 살고 있으므로 최소한 고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나가 쓰다 버린 습자지"로 버선본을 만들고, 또 "내가 쓰다 버린 몽당연필"에 침 발라 점을 찍어 버선을 만드는 가정의 경제적 상황은 결코 넉넉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시는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경제적 약자들의 얼굴을 세밀하게 포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해바라기 얼굴'의 경우, 동시의 화자가 보통 어린아이라는 점을 미루어 짐작할 때, 화자의 누나 역시도 그렇게 나이가 많지 않은 사람이거나, 같은 어린아이라고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시는 아동노동을 연상시키는 시가 됩니다. 설령 누나가 아동이 아니라 하더라도, 누나가 젊은 여성 노동자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혹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노동해 온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여성 인권에 대한 논의가 아직 자리 잡지 않은 이 시기의 노동 현장은 다분히 남성중심적이고 마초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노동 현장에서 일하는 어린 여성 노동자의 모습 또한 타자의 얼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들은 위와 같은 '타자들'의 얼굴이 현현하는 경험을 통해 작성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학적·철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이렇게 한번 상상해 봅시다. 아마 윤동주에게는 동생의 오줌 묻은 이불을 홀로 힘겹게 세탁하는 어린아이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을까요? 힘겹게 살림을 살며 습자지 하나, 몽당연필 하나도 버리지 않는 가난에 찌든 어느 어머니의 얼굴이 닥쳐오지 않았을까요? 힘들게 일하고 돌아와 얼굴에 검댕이 묻은, 피곤에 찌든 어느 어린 여성 노동자의 얼굴이 그에게 현현하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감수성을 염두에 두고 다음 시를 살펴봅시다.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 발걸음을 멈추어 /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 "사람이 되지" /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아우의 인상화', 1938. 9. 15.)4)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의 어린 동생과 대화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화자가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라고 묻자, 동생은 "사람이 되지"라고 대답한다는 것입니다. 화자는 동생의 대답이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라고 말하지만, 그 설은 동생의 대답에서 그 이상의 깊은 의미를 느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맞잡은 동생의 손을 놓고 얼굴을 들여다보기에 이릅니다. 화자가 갑자기 동생 손을 놓고서 얼굴을 들여다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사람이 되지"라는 동생의 답변이 '너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즉 '너는 사람답게 행동해야만 한다'라는 타자의 얼굴의 명령으로 닥쳐온 것은 아닐까요? 그 얼굴의 명령을 느낀 화자는 늘 익숙하게 봐 왔던 동생에게서 '낯선 자의 얼굴'을 발견한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타인의 얼굴로 드러난 동생의 얼굴은 "슬픈 그림"을 하고 있습니다. 왜 슬픈 그림일 수밖에 없었을까요? 이는 우리가 '사람답게 행동해야만 한다'는 얼굴의 윤리적 명령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그 윤리적 명령에 따라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반성이 아니었을까요? 이러한 반성적 태도는 '투르게네프의 언덕'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나는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그때 세 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 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 병, 간즈메 통, 쇳조각, 헌 양말짝 등 폐물이 가득하였다.
둘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셋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름한 입술, 너덜너덜한 남루, 찢겨진 맨발,
아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 있을 것은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만지작 거릴 뿐이었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 보았다.
첫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 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셋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소근소근 이야기하면서 고개로 넘어갔다.
언덕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 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 ('투르게네프의 언덕', 1939. 9.)5)

이 시는 '고아'와 같은 타자들을 시적 대상으로 제시합니다. 바로 "세 소년 거지"입니다. 이 소년들은 매우 남루한 행색을 하고서 힘겹게 살아가는 타자들입니다. '나'는 이들을 보면서 측은한 마음이 들지만, 정작 그들에게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 같은 자신의 소유물을 내줄 용기는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다정스레 이야기나" 할 요량으로 "얘들아" 하고 불러 볼 뿐입니다. 그러나 소년들의 반응은 냉랭합니다. 이러한 '다정스런 이야기'는 소년들에게 실제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소년들은 그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 보고" 말 뿐입니다. 그리고는 더는 돌아보지 않고 자신들이 가던 고갯길로 넘어가 버립니다.

우리는 윤동주가 이 소년들의 얼굴의 현현을 경험했을 것이라고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이 소년들이 떠나가고 난 뒤 "황혼이 밀려드는", "아무도 없"는 언덕 위에서 '나'는 무엇을 떠올렸을까요? 소년들의 '얼굴'이 아니었을까요? 소년들의 얼굴은 '너는 왜 너의 소유를 내어놓지 않는가'라고 말하며 '나'가 가진 소유물에 이의를 제기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너는 가난한 타자들을 책임져야만 한다'라는 얼굴의 윤리적 명령이 양심의 가책처럼 찔려 왔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두툼한 지갑도, 시계도, 손수건도 가지고 있었지만 무엇 하나 고아와 과부와 같은 타자들에게 내주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자책감이 윤동주가 이 시를 작성하게 된 근본적인 동기였을지도 모릅니다.

나오며: 타자를 향한 환대와 연대로

한국교회는 그동안 '교리' 혹은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이 틀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타자'들에게 수없이 전체성의 폭력을 휘둘러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성경은 늘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말합니다. 고아·과부는 누구입니까? 이를 단순히 문자주의적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당시 고아·과부는 전쟁·기근·환란이 닥쳐올 때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이들, 즉 '약자성'과 '소수자성'을 지닌 타자를 의미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들과 함께하셨습니다.그분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고, 바리새인들의 돌팔매질 위협으로부터 간음한 여인을 구해 내신 분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행보는 늘 약자성과 소수자성을 지닌 이과 함께였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고아'라는 단어가 총 61회, '과부'라는 단어가 총 84회 등장합니다. 이는 성경이 다른 그 어떤 일보다 약자와 소수자를 돌보는 일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레비나스의 사유에서, 또 윤동주의 시에서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 주변에는 수많은 이웃이 있습니다. 교회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이웃들이 우리가 지닌 교리적 틀 안에 들어오는지 아닌지' 평가하고 재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타자들을 환대하고 또 그들과 연대하며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우는 일이 필요합니다. 윤동주의 작품이 오줌싸개 어린 동생을 둔 아이와, 거지 소년들과, 얼굴이 숙어 든 누나의 얼굴이 지닌 삶의 무게를 발견하고 어루만졌듯이, 한국교회도 우리 주변 이웃을 환대하고 그들과 연대해 나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합니다.

정제기 / 지방대 철학과 대학원생. 공부와 생계를 병행하기 위해 파트타임 노동자로도 살아가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소속 교회 신자로, 철학적 입장과 신앙고백의 일치를 모색하며 탐구하고 있다.

1) 권영민 엮음, <윤동주 전집>, 문학사상사, 2017, 25쪽에서 인용. 이 글에서 윤동주의 원문을 인용할 때는 이 책에서 직접 인용했습니다.
2) <윤동주 전집>, 46쪽.
3) <윤동주 전집>, 77쪽.
4) <윤동주 전집>, 73쪽.
5) <윤동주 전집>, 8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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