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사람 죽는 것처럼 울었지 / 인천공항에서도 나리타공항에서도
울지 말자고 서로 힘내서 약속해 놓고
돌아오며 내내 / 언제 또 만날까
아무런 약속도 되어 있지 않고 / 어쩌면 오늘 이후로 다시 만날 리 없는
귀한 내 친구들아 / 동시에 다 죽어 버리자
그 시간이 찾아오기 전에 / 먼저 선수 쳐 버리자
(중략)
우리가 먼저 죽게 되면 / 일도 안 해도 되고
돈도 없어도 되고 / 울지 않아도 되고
헤어지지 않아도 되고 / 만나지 않아도 되고
편지도 안 써도 되고 / 메일도 안 보내도 되고
메일도 안 읽어도 되고 / 목도 안 매도 되고
불에 안 타도 되고 / 물에 안 빠져도 되고
손목도 안 그어도 되고 / 약도 한꺼번에 엄청 많이 안 먹어도 되고
한꺼번에 싹 다 가 버리는 멸망일 테니까
아아아아 아아아 아아 너무 좋다
아아아 아아아 아아 깔끔하다
'환란의 세대', 이랑 3집 <늑대가 나타났다> 4번, 10번 트랙.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우면 이런 노래를 할 수 있을까요? 마치 실제로 목을 매달아 본 것처럼, 손목을 그어 본 것처럼 노래하는 이 가사에는 피맺힌 절규가 담겨 있습니다. 가능하시다면 위의 노래를 듣고 난 뒤 글을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노래를 듣고 오신 여러분,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혹시 기분이 나빠지는 섬뜩한 절망감을 느끼지 않으셨나요? 고통스러웠던 예전 상처가 다시 끄집어내지는 듯한 느낌을 받지 않으셨나요? 혹은 누군가가 자신의 상처를 위로해 주는 듯한 느낌을 받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곡은 사실 누군가를 위로하는 노래입니다. 상대방의 고통에 크게 공감하면서, 그 사람과 함께 펑펑 울면서, "너 이렇게 괴로워할 거면 나랑 같이 죽어 버리자"라고 말하는 노래입니다. 그래서 곡을 쓴 싱어송라이터 이랑도 "이게 사랑 노래라는 걸 내 친구들은 알겠지"1)라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그런 점에서 참 묘합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영상 내내 보여 주는데, 뒤에 앉은 사람이 운전하는 사람의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러고선 운전하는 사람의 등에 자신의 머리를 의지하듯 기대고 있습니다. 매우 위험천만하고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운전자는 이를 말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랑곳하지 않고 운전해 갑니다. 곡이 진행될수록 화면은 점점 더 어두워집니다. 종종 지나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 얼굴이 잠깐잠깐 비치는 장면은 불안감을 더합니다. 마지막 대목에서는 화면이 밝게 명멸하는데, 이는 이들이 사고로 죽었음을 암시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이들의 모습은 사랑과 위로의 한 형태를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운전자의 등에 자신의 온몸을 의지하면서, 앞도 쳐다보지 않고 운전자의 눈을 가리는 이 사람은 운전자에게 "이렇게 힘들 바에는 우리 같이 죽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에서 "귀한 내 친구들아 / 동시에 다 죽어 버리자"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괴로워서 죽어 버릴 거라면, 나중에 죽지 말고, 괴로움을 버티지 못해 죽기 전에, 그 괴로운 날이 오기 전에, 미리 선수쳐서 모두 함께 죽어 버리자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사는 한편으로는 죽음마저도 함께하고자 하는 위로의 마음을, 다른 한편으로는 온몸으로 "죽지 말고 우리 함께 같이 살아남자"는 격려의 마음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랑은 마지막에 더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이 곡의 마지막 1분은 여성 코러스의 합창이 절규와 비명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치 실제 여성들이 죽으면서 내는 것 같은 비명과 음악이 이루는 기묘한 불협화음은 누군가의 울음소리처럼 들립니다. 그 울음소리는 내 울음소리일수도 있고, 내 주변 누군가의 울음소리일지도 모릅니다. 누구의 울음소리라도 상관없습니다. 이 울음은 한편으로는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고통받는 이를 위로하는 울음, 피가 맺히도록 함께 우는 울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이 곡에 대한 대중음악의견가 서정민갑의 평가는 매우 옳은 것 같습니다.

"이 음반이 젊은 여성들의 비명을 옮겨 담은 상자임을 모르는 일은 불가능하다. 마지막 트랙 '환란의 시대(Choir Ver.)'의 마지막 1분은 2021년 한국 대중음악에서 가장 간절한 1분이며, 가장 처절한 1분이다."2)

싱어송라이터 이랑. 사진 제공 유어썸머
싱어송라이터 이랑. 사진 제공 유어썸머

싱어송라이터 이랑의 노래는 이처럼 슬프고 괴롭고 때로는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이랑의 노래에는 많은 여성 서사가 담겨 있습니다. 또 여성들이 이런 상황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우뚝 딛고 서서 신을 조롱하고, 신에게 항변하기도 합니다. '당신이 만약 정말로 선한 신이라면, 어떻게 세상이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둘 수 있느냐'는 듯이 말입니다. 이 점에서 이랑의 음악은 페미니즘 그리고 기독교 신학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이랑의 음악을 들으면 교회 내 여성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들이 지닌 아픔, 괴로움, 죽음이 떠오릅니다. 저는 이 글을 두 차례(페미니즘, 신학)로 나눠 여러분들께 이랑의 음악을 소개하고, 제가 받은 충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나눔을 통해 우리가 교회 내 여성들에 대한 관심을 넓혀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첫 번째 글은 이랑의 페미니즘입니다.

이랑의 페미니즘

이랑의 음악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페미니즘입니다. 물론 이랑이 곡을 쓰면서 특정 이론에 입각해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거나 설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랑의 음악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받아 왔던 억압과 차별, 고통과 상처들을 노래합니다.

난 사실 멋 내는 게 좋아 / 아무도 모르게 은근히 슬쩍슬쩍
그런데 누가 멋 냈느냐고 물어보면 /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내가 왜 그러는지 / 내가 왜
어려서부터 울 언니가 나보다 훨 예뻤어 / 얼굴도 작고 늘씬한 서구형 미인
그래서 내가 언제부턴가 멋 부리려 했더니 / 못생긴 애가 멋 부린다고 어른들이 놀렸어
그래서 그랬어 / 그래서 그랬어
누가 나보고 예쁘다고 하면 / 난 그 말만 듣고 그럼 나랑 사귀자고 했어
그런 식으로 만난 남자만 해도 벌써 / 한 명 두 명 세 명 네 명 다섯 명 여섯 명 일곱 명 여덟 명
내가 왜 그랬는지 / 내가 왜
그러니까 너도 함부로 나한테 /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그렇게 말하지 마
잘 알지도 못하면서 / 알지도 못하면서
나 예쁘니? 어디가? 진짜? / 그럼 나랑 사귈래?
난 사실 멋 내는 게 좋아 / 아무도 모르게 은근히 슬쩍슬쩍
그런데 누가 멋냈느냐고 물어보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옷이나 그런 거 별로 관심 없는데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랑 1집 <욘욘슨> 1번 트랙.

이 가사는 어린 시절부터 심각하게 외모를 평가받아 온 화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랑의 자전적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동시에 어떤 여성의 서사를 대입해도 공감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물론 교회 내 여성들에게도 유효하게 확장됩니다.

이 노래의 화자는 "난 사실 멋 내는 게 좋아"라고 고백하지만, 정작 "누가 멋 냈느냐고 물어보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행동합니다. 그 이유는 "어려서부터 나보다 훨씬 예쁘고, 얼굴도 작고 늘씬한 서구형 미인"인 언니와 늘 비교당했기 때문이고, 또 정작 멋을 부리면 "못생긴 애가 멋 부린다고 어른들이 놀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란 화자는 자신에게 예쁘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서슴없이 사귀자고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자라납니다. 어려서부터 외모 평가를 받으며 자랐다 보니, 자신의 외모에 자신이 없었고, 그래서 예쁘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크게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화자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말하지 마"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이는 화자 스스로도 이런 방식의 인간관계가 건강하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것을, 또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이런 식으로 상대를 만날 수밖에 없는 끊어 낼 수 없는 굴레가 존재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 노래의 화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가까운 누군가와 계속 외모를 비교당하는 경험, 특히 예쁜 언니에 비해 못생겼다는 평가를 받는 경험, 또 못생긴 애가 멋 부린다고 놀림을 받는 경험, 그래서 아무 사람이나 함부로 만나게 되는 경험은 당사자에게 큰 상처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의 화자는 멋 부리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를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멋 부리지 않은 것처럼 "저는 옷이나 뭐 그런 거 별로 관심 없는데요"라고 스스로를 방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랑의 음악에는 페미니즘적 요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사진 제공 유어썸머
이랑의 음악에는 페미니즘적 요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사진 제공 유어썸머

 이랑의 다른 노래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또 다른 문맥에서 페미니즘을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내가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에 대해
정작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말과 말 사이에 흥겨움만 찾기에 바빴다
나는 가지 않아도 되는 파티에 초대받았다
초대 명단엔 내 이름이 틀리게 적혀 있었다
(후략)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이랑 2집 <신의 놀이> 8번 트랙.

이 짧은 가사가 우리에게 주는 무게감은 상당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상상력을 동원해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왜 이 화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미워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을까요? 그것도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말입니다. 여기서 "미워하기 시작했다"를 "나쁘게 대하기 시작했다"로 바꿔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나를 좋아하니까, 나에게 호의가 있으니까, 내가 마음대로 해도 되는 사람인 것처럼 취급당하는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사람들이 화자를 나쁘게 대하는 장면은 바로 다음 가사에 이어서 등장합니다. 화자는 이상한 지점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칭찬하는데, 이상한 것을, 이를테면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을 칭찬한다는 것입니다. 말을 할 줄 안다는 당연한 일을 칭찬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이 화자를 성숙한 인격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 아닐까요? 성숙한 인격들의 건강한 관계에서는 서로 존중하면서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집중하며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정작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말과 말 사이에 흥겨움만 찾기에 바쁜"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말을 할 줄 안다는 사실에 대한 칭찬은 역설적으로 그 사람의 수준을 매우 낮은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화자를 나쁘게 대하는 것, 다시 말해 하나의 인격적 개체로 존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외모와 복장에 대해 평가하고, 또 말을 할 줄 안다는 사실에 대해 칭찬하는 것은 단적으로 '대상화된 여성'을 상징합니다. 여성이 "예쁜 서구적 외모"인지 아닌지로 평가받는 상황, 더 나아가 "너 이런 말도 할 줄 아네?"라는 말로 칭찬받는 상황은 여성의 주체성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상황입니다. 칸트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이는 그 여성을 목적 자체가 아니라 수단으로 대우하는 행동입니다. 우리는 이를 대상화(objectification)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의 가사에서 여성이 대상화되고 전시되는 상황은 다음 가사에서 더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가지 않아도 되는 파티에 초대"를 받지만, 심지어 초대 명단에는 이름이 "틀리게 적혀 있"는 상황은 어떤 점을 시사할까요? 화자가 파티에 와서 자리를 빛내 주기를 바라지만, 정작 화자 자체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그저 들러리처럼 파티장에 전시돼 있기만을 바라는 상황 아닐까요?

이랑 3집 <늑대가 나타났다>. 사진 제공 유어썸머
이랑 3집 <늑대가 나타났다>. 사진 제공 유어썸머
그리고 교회 안의 여성들

저는 이 지점에서 교회 내 여성들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외모와 복장으로 평가되고, 여성의 말을 억누르는, 그러면서도 여성을 전시하고 싶어 하는, 그것이 우리 교회의 모습 아니었나요? 우리는 그런 여성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성들은 때로는 청년으로, 때로는 집사로, 때로는 권사로, 때로는 사모로, 때로는 목회자라고 불립니다. 교회 내 여성들은 각자의 지위와 역할에 따라 외모와 복장을 강요당합니다. 공적인 예배에 걸맞는, 예쁘지만 과하지 않은 화장을 강요당하며, 치마나 바지가 짧으면 짧은 대로, 길면 긴 대로 평가당합니다. 또 교회 안에서 특정 역할을 수행할 것을 강요당합니다. 게다가 이 역할은 교회의 중심적·핵심적 역할과는 거리가 멀고, 주로 주변적·부수적 역할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러한 강요의 핵심은, 교회가 여성의 발언권을 심각하게 배제하면서 이 강요의 굴레를 견고하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장로교단은 대부분 여성 목사·장로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남성 목사·장로들을 중심으로 당회와 공동의회를 주관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다 보니, 교회는 여성이 어떤 고충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고자 하는지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교회 내 여성은 여성으로서 받는 고충을 교회에서 적극적으로 토로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고충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마련된다고 하더라도, 단지 그 자리에 묵묵히 참석해 아무런 불만 없는 모습을 보여 줄 것을 은연중에 강요당하거나, 그마저도 참여하지 못하고 식당에서 식사·다과를 준비하도록 내몰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것을 거룩한 여성의 역할이라고 강조하지요.

저는 앞서 소개한 '환란의 세대'가 교회 안에서 상처받고 죽음을 고민하는 모든 여성을 위한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바라고 요구하는 틀 안에 들어오지 않는 여성들을 그 안에 욱여넣기 시작할 때, 얼마나 많은 폭력과 고통이 발생하는지요. 또 가부장적 남성 중심주의가 가득한 교회에서 여성을 향한 억압과 폭력이 얼마나 많이 가해지는지요. 특히 교회 내 성폭력은 높은 지위의 남성(목사)이 그렇지 않은 여성을 가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폭력 속에서 많은 여성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고민합니다. 그 가운데는 "사람 죽는 것처럼 우는" 정도에서 그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 괴로움으로 목을 매고, 손목을 긋고, 불에 타고, 약을 먹은 여성들이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여성들에게 다가가 "차라리 같이 죽자"고 말해 주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이랑의 노래, 특히 '환란의 세대'를 들으면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는 말씀이 생각나곤 합니다. 우리는 공동체 내 타인, 특히 상처받은 여성들을 위해 울어 주는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고통받은 사람이 고통을 이기지 못해 정말로 죽어 버린 것처럼 함께 울어 주는 공동체, 고통을 긍정하고 공감하면서 "함께 죽어 버리자"고 말해 주는 공동체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교회에 필요하지 않을까요. 괴로움과 고통을 대신 짊어지거나 없앨 수는 없어도, 그 고통에 공감하며 함께 울어 주는 것은 가능할 테니까요.(계속)

정제기 / 지방대 철학과 대학원생. 공부와 생계를 병행하기 위해 파트타임 노동자로도 살아가고 있다. 현재는 박사 논문을 쓰며 철학적 입장과 신앙고백의 일치를 모색하며 고민하고 있다.

1) 이은호, "이랑 '동시에 죽자는 이 노래, 사랑 노래입니다'", 쿠키뉴스, 2021년 9월 16일 기사. https://www.kukinews.com/newsView/kuk202109150004
2) https://www.vop.co.kr/A00001594865.html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