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정제기, '윤동주 주체성의 철학적 원형 - 칸트와 레비나스의 이중 변주', <한국시학연구>, 제65집, 2021에 수록된 논의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수정·보완한 글입니다. - 편집자 주
들어가며: 정립과 반정립

우리 신앙생활은 늘 괴롭습니다. 어두운 길을 가는 것처럼 캄캄하고,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임에도 자주 무너지고 실패합니다. 목사님들 설교를 들어 보면, 다른 이들은 모두 나보다 잘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지기 쉬운 멍에라며,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든 가능하다는 선포를 생각보다 자주 듣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노라면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또다시 무너지고 맙니다. 신앙생활 연차가 쌓일수록 이러한 경험을 수백, 수천 번은 더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럴수록 괴로움은 커져만 갑니다.

나는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나는 죄인이며,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에 주님의 계명을 온전히 따라 살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해야만 하는 '당위'와 자신의 '유한성·한계'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충돌을 칸트는 '이율배반(Antinomie)'이라고 부릅니다. 칸트는 이율배반을 "정립과 반정립 간의 상충(Widerstreit des thesin cum antithesi)"이라고 설명하는데요.1) 이는 어떤 것을 증명하는 '정립 명제'와, 그와 상충하는 '반정립 명제'가 동시에 '참'일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세계에는 여러 가지 이율배반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중 "실천이성의 이율배반(Antinomie der praktischen Vernunft)"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사실 이것은 <실천이성비판> 후반부 '순수 실천이성의 변증론'이라는 장에 등장하는 조금 어려운 개념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다루려면 복잡한 논의가 필요하지만, 이를 이해하기 쉽게 간략하게 변형하면 아래와 같은 모습이 됩니다.

정립: 인간은 도덕적인 선을 실현하고 완성시켜야 한다.
반정립: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은 자신의 한계로 인해 온전히 도덕적 선을 실현하고 완성시킬 수 없다.2)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덕적으로 행동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온전히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유한하며, 도덕성이 아닌 욕구와 경향성을 따라 행동하고 싶은 한계를 지닌 존재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도덕성과 욕구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합니다. 동물은 본능과 욕구에 충실하기 때문에 도덕성과 욕구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그분이 원하는 것이 모두 선하기 때문에 갈등하지 않습니다. 도덕과 욕구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율배반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계명에 따라 행동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렇게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온전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뜻을 온전히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이며, 육신의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이율배반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윤동주의 '시'와 칸트적 '이율배반'
윤동주(18~)와 임마누엘 칸트(17~).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윤동주(1917~1945)와 임마누엘 칸트(1724~1804).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흥미로운 점은 윤동주에게서도 이 이율배반이 자주, 반복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 '서시'를 살펴봅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1941. 11. 20.)3)

저는 '서시'를 크게 1~4행과 5~9행 두 부분으로 구분하여 읽고 싶습니다. 먼저 전반부를 살펴봅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부분에서 윤동주가 실제로 어떤 부끄럼이 없기를 바랬는지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매우 높은 차원의 도덕적 반성, 이상적인 자기 모습, 혹은 자신이 그토록 추구했던 이상적인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한한 인간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을 수 있는 높은 도덕적 경지에 이르는 것, 혹은 이상적인 자기 모습이나 추구하는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사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이를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결코 자신의 생에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지점으로 이해합니다.

우리가 '서시'의 전반부를 '인간의 한계로 인한 도덕적 이상의 실현 불가능성'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위에서 언급한 실천이성의 이율배반 중 '반정립 명제'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은 윤동주의 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시는 '팔복', '무서운 시간', '바람이 불어' 등입니다. 지면상 여기에서는 '팔복'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팔복', 1940. 12. 추정)4)

시인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팔복'은 마태복음 5장 3~12절을 패러디한 시입니다.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행인데, 성경 원문의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가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로 변형된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윤동주의 '팔복' 육필 원고를 보면, 이 마지막 행은 "저희가 슬플 것이오" →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것이오" → "저희가 오래 슬플 것이오" →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의 과정을 거쳐 수정됐습니다.5)

저희가 슬플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그래도 위로함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오래 슬플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영원히 슬플 것이라고 고쳐 쓴 시인의 심정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이 근본적인 절망의 상태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사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상태, 즉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깨달은 상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윤동주의 작품들은 결코 '유한한 인간의 본질적 한계'로 인한 괴로움과 절망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절망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서시'의 첫째 부분과 대조를 이루는 둘째 부분입니다. 이 시의 화자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단계에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높은 단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나오는 고백이 바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는 결심인 것입니다. 이는 위에서 설명한 실천이성의 이율배반 중 '인간은 도덕적인 선을 실현하고 완성시켜야 한다'라는 '정립 명제'를 연상시킵니다. 이는 '길'이라는 윤동주의 시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잃어버렸습니다. /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 길에 나아갑니다. //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 내가 사는 것은, 다만, /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길'의 일부. 1941. 9.)6)

'길'에서 화자는 "무얼 어디다 잃어버렸는지 몰라 /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 길에 나아가"고 있습니다. 화자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화자는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있는 길을 끼고서 "아침에서 저녁으로 / 저녁에서 아침으로" 쉴 새 없이 걷고 있습니다. 화자는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돌담을 더듬다가 공연히 눈물짓고, 위를 올려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화자가 무엇인가를 잃어버려 부끄러움을 느끼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가 '서시'와 두 달 정도 간격을 두고 쓰여졌다는 점에서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의 정서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화자는 이 길이 "풀 한 포기 없는" 길임에도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기 때문에", "잃은 것을 찾는 까닭에" 계속해서 이 길을 걷는 삶을 살아간다고 고백합니다. 화자가 "풀 한 포기 없는 길"을 이렇게 끊임없이 걸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우리가 위에서 설명한 이율배반의 '반정립', 즉 불가능성의 정서에도 불구하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기로 결단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러한 이율배반의 상황에서는 "나한테 주어진 길"을 아무리 걸어간다고 하더라도 무너지고 또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죄된 본성과 유한한 한계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실현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노라고 결단할 수 있는 그 원동력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칸트가 설명하는 '종교적 희망'일 수 있습니다. 칸트의 희망은 결코 도덕성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마치 언젠가는 이 도덕적 이상이 실현될 것이라고 여기는 '믿음'에서 비롯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이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사례는 바로 '별 헤는 밤'입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 가슴 속에 하나둘 새겨지는 별을 /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 별 하나에 추억과 / 별 하나에 사랑과 / 별 하나에 쓸쓸함과 / 별 하나에 동경과 / 별 하나에 시와 /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랜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 별이 아슬히 멀 듯이, // 어머님, /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 내 이름자를 써보고, /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별 헤는 밤', 1941. 11. 5.)7)

이 시의 근본적인 정서는 '그리움'입니다. "별"은 화자가 추구하는 희망을 상징합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이 희망이 곧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을 것처럼 여기지만, 그러나 이내 이 별을 끝까지 다 세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맙니다. 밤하늘의 별이 빛나는 것처럼 아름다운 이상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에 금방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에, 또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에 다시금 별을 셀 수 있음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나'의 희망은 별에 "추억·사랑·쓸쓸함·동경·시·어머니"라는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보는 행동을 통해 보다 강하게 구체화됩니다. 그러나 이 별들과, 별들에 붙인 이름들은 "별이 아슬히 멀듯이"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말"들 중 '나'가 가장 강하게 그리워하는 감정을 담아 부른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은 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별 헤는 밤'에서 드러나는 희망이 칸트의 희망과 매우 유사한 특징을 갖는 첫째 이유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납니다. '나'가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이름 붙인 별은 윤동주의 희망을 상징하지만, 그러나 이 희망은 "북간도"와 같이 아주 먼 곳에 있을 뿐입니다. 물론 북간도는 실제로 존재하는 지명이며, 윤동주의 고향이라는 점에서 물리적으로 도달 가능한 장소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별 헤는 밤'의 화자가 처해 있는 현재 상황에서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먼 장소라는 점에서 "별이 아슬히 멀듯이" 멀리 있는, 닿을 수 없는 희망, 실현 불가능한 희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실현 불가능한 희망, "아슬히 멀리 있는"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라는 대목에서 잘 드러납니다. 현실에 대한 부정을 통해 자신의 이상이 결코 실현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깊게 인식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나'는 그 이상을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가 그 실현 불가능한 이상을 여전히 희망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은 비록 차갑고 고통스러울 뿐인 기나긴 겨울이지만, 이 겨울도 언젠가 지나가리라는 희망으로, 그리고 나의 별에도 결국에는 봄이 오리라는 희망으로, "내 이름자 묻힌" 무덤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드러납니다.

나오며: '가능성의 가능성',
'불가능성의 불가능성'을 넘어

이러한 희망을 통해 이율배반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윤동주만의 독특한 힘이 발생합니다. 윤동주의 희망은 '가능성의 가능성'처럼 당연한 것을 향한 희망이 결코 아닙니다. 그의 희망은 '불가능성의 불가능성'을 노래하며 허무주의(Nihilismus)로 빠지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희망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칸트적입니다. 윤동주의 작품에서 이러한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희망하는 모습은 '쉽게 쓰여진 시'에서도 살짝 드러납니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쉽게 쓰여진 시' 일부, 1942.)8)

여기서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라는 대목은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나'는 결코 등불을 밝혀 어둠을 '환하게' 밝힐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어둠을 조금 내몰고"라고 말할 뿐입니다. 이는 '나'가 아무리 노력해 등불을 밝힌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어둠을 극복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불가능성의 인식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윤동주가 그리는 희망은 바로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에서 드러납니다. 어둠을 밝히는 것은 결국 빛입니다. 어두운 밤을 환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결국 도래하고야 말 아침입니다. '나'는 어두컴컴하고 암울한 "밤"의 시기를 보내고 있고, 아무리 노력해서 등불을 밝힌다고 하더라도 고작 "어둠을 조금 내몰" 수 있을 뿐이지만, 최후에 다가올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나'는 아침이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고 밝은 빛을 온 세상에 비추게 되리라고 긍정적으로 희망합니다.

윤동주 작품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모습은, 제가 칸트신학적으로 해석하는 하나님나라와도 매우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흔히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닌(Already, but not yet)"이라는 말로 설명됩니다. 하나님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임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는 것이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나라 완성을 위해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는 아무리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심지어 죽는 날까지 노력해도 하나님나라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정말로 완성될 수 있는 것인지를 우리는 이론적·객관적으로 결코 증명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 때문에 하나님나라는 누군가에겐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공허한 가상과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추구하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수없이 넘어지고 쓰러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나라의 완성이 도대체 임하기는 하는 것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희망합니다. 결코 경지에 도달할 수 없음에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을 정도로 엄격한 완성의 길,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기로 결정하는 '인간 윤동주의 주체성'처럼 말입니다.(계속)

정제기 / 지방대 철학과 대학원생. 공부와 생계를 병행하기 위해 파트타임 노동자로도 살아가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소속 교회 신자로, 철학적 입장과 신앙고백의 일치를 모색하며 탐구하고 있다.

1) Kritik der reinen Vernunft, A420-421=B448.
2) 실천이성의 이율배반에 관한 포괄적 정의는 제 이전 선행 연구인 '근본악과 희망의 문제 - 칸트의 <종교론>을 중심으로'에서 주장했던 제 논지를 재구성해 설명했습니다.
3) 권영민 엮음, <윤동주 전집>, 문학사상사, 2017, 14쪽에서 인용. 이 글에서 윤동주의 원문을 인용할 때는 이 책에서 직접 인용했습니다.
4) <윤동주 전집>, 87쪽 
5) 홍장학, <정본 윤동주 전집 원전 연구>, 문학과지성사, 2004, 287, 손호현, '윤동주와 슬픔의 신학', 113쪽에서 재인용.
6) <윤동주 전집>, 104~105쪽 
7) <윤동주 전집>, 106~107쪽 
8) <윤동주 전집>, 1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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