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니체의 기독교 비판

"신은 죽었다(Gott ist tot)!"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가 기독교를 비판하며 선포했던 유명한 구절입니다.1) 그리스도인에게 이 구절은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이 구절은 흔히 무신론적 입장이라고 해석되기 쉽지만, 사실 하나님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더 이상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플라톤적 전통을 따라 내려오는, 우리가 흔히 선한 것으로 여겨 온 여러 철학적·도덕적·초월적 가치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2) 하나님이 죽어 버렸다는 사실, 세상에 어떤 초월적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니체는 이를 '허무주의'(Nihilismus)라고 부릅니다. '신은 죽었다'는 무시무시한 선포에 이어, 니체는 <안티크리스트 Der Antichrist>에서 본격적으로 기독교를 비판합니다.

<안티크리스트>를 읽다 보면 불편한 지점이 매우 많습니다. 니체의 기독교 비판은 적나라하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교회를 비아냥하고 조롱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는 "신약성경을 읽을 때는 장갑을 끼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3) 신약성경만큼 불결한 게 없다는 것이지요. 논리적·합리적 비판이라면 들어줄 만할 텐데, 이러한 비아냥은 듣기에 매우 불쾌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날선 비판까지도 눈물로 받아들이고 품으며 반성해야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니체는 기독교를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비판하지만, 그중에서 특히 "복음은 실천이다"고 말하는 그의 입장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니체는 복음을 "신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거리가 제거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4) 이러한 복음은 "하나의 새로운 실천"5)으로 이어집니다. 그가 이 새로운 실천이 무엇이라고 명확히 규정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 실천이 하나님 뜻에 따르는 일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니체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 짓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실천입니다.6) 구세주의 삶 역시 이러한 실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7) 그리스도가 죽은 이유도 인류에게 실천을 남기기 위해, 즉 인류가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지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8)

그러나 니체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복음적 실천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비판합니다. 그가 보기에 인류 역사상 그리스도인이었던 사람은 오직 예수 한 사람뿐입니다. 나머지 사람은 사실 "입으로는 항상 신앙을 이야기하면서도 항상 본능대로 행동"하는 "교활한 사람"에 불과합니다.9) 니체는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실천을 강조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합니다.10) 그는 더 나아가, 복음서를 인용해 복음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신랄하게 지적합니다. 마가복음 9장 47절은 "눈이 죄를 짓게 된다면 그 눈을 빼어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한 눈으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눈을 빼어 버리면서까지 주님의 계명을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한국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물론 앞선 복음서 구절이 눈으로 죄를 범하는 사람의 눈을 문자적으로 뽑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니체는 앞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이야기하면서, 뒤에서는 온갖 비리와 더러운 행동을 서슴지 않는 사람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교활한 인간", "노예적인 인간"에 불과합니다. 제가 이런 그리스도인의 구체적 사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여러분 머릿속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떠오를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역시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일지 모릅니다.

니체의 비판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약 2:26)이라고 말하는 성경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요? 어떠한 태도로 주님 명령을 따라 행동해야 할까요?

2. 칸트의 정언명령과 그리스도인의 실천

우리는 이 지점에서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를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칸트철학, 특히 칸트 윤리학과 종교철학은 기독교 신앙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칸트는 당시 기독교 교회와 계몽주의 철학자 양쪽에서 모두 비판받으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사유를 전개했는데, 이는 우리에게도 깊이 생각해 볼 거리를 제공합니다. 칸트의 정언명령은 "너는 해야만 한다"는 도덕적 명령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생각할 때, 정언명령의 특징을 함께 고려하면 매우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정언명령을 이해할 때는 가언명령과 비교하면 좋습니다. 가언명령이 조건적으로 선한 명령이라면, 정언명령은 무조건적인 도덕적 명령입니다. 칸트에 따르면, 모든 명령은 가언적(조건적)이거나, 정언적(무조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11)

그중 가언명령은 "다른 무엇인가를 위한 수단으로만 선한" 행위를 명령합니다. 이는 "네가 ~하고자 한다면, 너는 ~을 해야만 한다"는 조건문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이를테면, "네가 피아니스트가 되고자 한다면, 너는 피아노 연습을 해야만 한다"는 명령이 가언명령이지요. 이때 피아노 연습을 하는 것은 피아니스트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조건적으로 선한 명령이지, 무조건적으로 선한 명령은 아닙니다. 피아니스트가 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피아노 연습을 해야만 한다"고 명령하는 것은 선한 명령이 될 수 없는 것이지요.

이에 반해 정언명령은 무조건적인 명령이자, 무조건적으로 선한 명령입니다. 정언명령은 다른 조건 없이 "너는 해야만 한다"는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도덕적 행동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행동해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도덕적 명령은 어떤 목적을 이루는 데 적합하기 때문에 선한 게 아닙니다.12) 만약 어떤 목적을 이루는 데 적합한 명령이 있다면, 그것은 조건적으로 선한 가언명령에 불과합니다. 도덕적 명령, 즉 정언명령은 그저 도덕적으로 행동하고자 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선합니다.13) 그래서 정언명령은 우리에게 의무로 주어집니다.14)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정언명령과 가언명령의 도식을 주님의 명령에 대입해 볼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정언명령이 아닌 가언명령으로 받아들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현세의 복을 조건으로 달고는 하죠. 하나님께서 믿는 신자를 축복해 물질적인 복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 - 이것이 바로 참된 복음을 왜곡하는 '번영신학'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만약 네가 현세에서 충분한 복을 받고자 한다면, 너는 주님의 계명을 따라야만 한다"라는 가언명령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정언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가언적으로 받아들인다면,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 뜻에 따라 산다고 하더라도, 모든 신자가 물질적 복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가언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사실 하나님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잿밥, 즉 물질적 축복을 더 사랑하는 자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원하는 만큼 물질적인 복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더 이상 하나님 계명을 따라 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가언적으로 받아들이는 번영신학은 니체가 비판한 "실천하지 않는 자", "교활한 자", "노예같은 자"를 계속해서 만들어 낼 것입니다.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겨야 할 주님의 계명을 물질적 복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꼴이니 말이지요.

정언명령은 결코 명령에 따른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단지 "해야만 한다"는 동기만을 고려할 뿐이지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계명을 대하는 태도도 그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의 명령이 모두 정언적이며, 다른 어떤 목적이나 순종의 결과를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두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우리가 계명에 따라 행동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어떤 결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주님 명령을 따라야만 하기 때문에, 주님 계명을 따르는 일이 성도의 의무이기 때문에 행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정언명령의 정신은 그리스도인의 나그네 정신과 일치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던 나그네 정신은 우리가 비록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머리는 저 하늘에 두고 있다는 강력한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단지 이 땅에 잠시 왔다 가는 나그네와 같습니다. 나그네는 물질적 복이나 많은 풍요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이 걸어갈 길,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결과와 상관없이 묵묵히 해 나갈 뿐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나그네 정신은 가언적이지 않고 정언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지요.

3.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과 기독교적 환대

그러나 칸트의 정언명령은 때로는 일종의 전체성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 전체성이 폭력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이를 '전체성의 폭력'이라고 부릅니다. 전체성은 특정한 이론 하나를 통해 세계 전체를 설명하려는 방식입니다. 어떤 이론 하나만으로 세계를 해석할 때, 우리는 그 이론의 한계로 세계 전체가 온전히 해석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성은 이론의 틀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타자'를 그 틀 안에 억지로 욱여넣으려고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큰 폭력성이 발생합니다.

이를테면, "너는 주일성수를 지켜야만 한다"라는 명령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물론 칸트가 이런 명령을 정언명령이라고 이야기한 적은 없습니다만, 그리스도인에게 주일성수는 다른 조건 때문이 아니라, 그저 '해야만 하기 때문에' 지키는 것에 더 가까우므로 정언적 형식을 가진 명령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일성수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특히 지금과 같은 팬데믹 상황에서는 주일에 휴식하며 교회에 나가기 어려운 사람이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명령은, 가난과 생존의 기로에서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주말에도 일해야 하는 사람을 '주일성수를 하지 않는 믿음 없는 사람'으로 정죄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주일에도 일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이 평가와 판단 앞에서 어떤 마음이 들까요? 이 계명이 매우 폭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을까요? 이것이 바로 레비나스가 말하는 전체성의 폭력입니다.

전체성의 폭력은 타자를 향한 감수성을 회복할 때 해결 가능합니다. 레비나스의 말로 표현하면, 이것은 '결코 나에게 환원되지 않는 무한한 타자로 이행하는 일'입니다. 이 무한한 타자를 향한 이행은 '얼굴의 현현'이라는 경험을 통해 가능합니다. 얼굴의 현현은 가난한 자, 병든 자, 다친 자 같은 타자의 얼굴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닥쳐오는 경험을 말합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자는 "낯선 이이며, 고아이며, 과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타자들에게 의무가 있습니다."15)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우리는 이러한 타자의 얼굴이 무작정 떠오르는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초콜릿을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초콜릿 공장에서 하루 16시간 일하는 어린아이가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본 뒤, 누군지도 잘 모르는 그 아이 얼굴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지하철에서 마주친 구걸하는 이의 얼굴이 유난히 계속 생각나는 경우가 그렇지요. 학교에 괴롭힘당하는 약한 친구의 얼굴이 떠올라 마치 그가 침울한 표정으로 내게 무언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얼굴의 현현입니다.

얼굴의 현현은 결국 타자의 얼굴입니다. 타자의 얼굴은 "얼굴의 벌거벗음 속에서 가난한 이와 낯선 이의 궁핍을 내게 제시"합니다.16) 또한 "자신의 벌거벗음 속에서, 즉 자신의 비참함과 배고픔 속에서 어떠한 이미지로도 매개되지 않은 채 대면의 올곧음 자체로서, 현현으로 환원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을 현시"합니다.17) 이 궁핍한 얼굴의 현현은 우리에게 윤리적으로 행동할 것을 명령합니다.18) 타자의 얼굴은, 역설적으로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 저항할 수 없는 가능성 때문에 우리에게 윤리적으로 행하라는 도덕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19) 이 얼굴의 명령은 "나의 자유를 의문시하는 것이자 내게 책임을 요구하는" 부름이고, "나를 에워싸는 소유를 벗어던지도록" 만듭니다.20) 레비나스는 우리가 이 얼굴의 명령과 마주하고 그에 따라 윤리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무한한 타자를 향해 이행하는 참된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무한한 타자를 향한 이행은 전체성이 저지르는 폭력을 거부하는 작업입니다. 주류의 논의에 들어오지 못했던 타자의 타자성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각각의 타자가 자기 주체성을 발휘하며 살아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작업입니다. 무한한 타자를 향해 이행하는 도덕적 주체인 우리는 타자를 나와 동등한 이가 아닌, 우리에게 명령하고 질책하는 주인으로 섬길 때 비로소 그와 동등해질 수 있게 됩니다.21)

어쩌면 한국교회는 타자의 얼굴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높은 교회당 건물을 세우면서 우리끼리만 선대하며 신앙생활해 왔습니다. 내부 결집을 위해 반동성애·반공 등을 내세우며, 함께 연대하고 포용해야 할 타자에게 기독교 교리라는 전체성의 폭력을 서슴없이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우리에게 전체성의 폭력을 휘두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아와 과부 같은 타자를 돌보라고 명령합니다(신 14:29; 24:19, 시 146:9, 사 9:17, 렘 22:3, 슥 7:10, 약 1:27 등).

우리 믿음과 교리를 지키는 일은 매우 소중하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타자를 돌보는 일의 중요성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기독교 교리의 틀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타자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들을 향해 전체성의 폭력을 자주 휘둘렀습니다. 어쩌면 우리 믿음과 신앙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탑을 세워 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는 타자를 어떻게 환대하고 연대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성경적 가르침입니다.

정제기 / 지방대 철학과 대학원생. 공부와 생계를 병행하기 위해 파트타임 노동자로도 살아가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소속 교회 신자로, 철학적 입장과 신앙고백의 일치를 모색하며 탐구하고 있다.

1)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안성찬, 홍사현 역, 책세상 니체 전집 12권, 200쪽.
2)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이서규, '신의 죽음과 허무주의 그리고 위버멘쉬', <니체연구>, 제8집, 2005를 참조할 것.
3) 프리드리히 니체, <안티크리스트>, 박찬국 역, 아카넷, 2015, 112쪽.
4) <안티크리스트>, 81쪽.
5) <안티크리스트>, 81쪽.
6) <안티크리스트>, 81쪽.
7) <안티크리스트>, 82쪽.
8) <안티크리스트>, 85쪽.
9) <안티크리스트>, 93쪽.
10) <안티크리스트>, 96쪽.
11) 임마누엘 칸트, <도덕형이상학 정초/실천이성비판>, 김석수, 김종국 역, 한길사, 2019, 62쪽.
12) <도덕형이상학 정초/실천이성비판>, 32쪽.
13) <도덕형이상학 정초/실천이성비판>, 32쪽.
14) <도덕형이상학 정초/실천이성비판>, 36쪽 이하를 참조할 것.
15) 에마뉘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김도형, 문성원, 손영창 역, 그린비, 2018, 320쪽.
16) <전체성과 무한>, 316쪽.
17) <전체성과 무한>, 295쪽.
18) <전체성과 무한>, 297쪽.
19) 강영안, <타인의 얼굴>, 문학과지성사, 2013, 148~149쪽.
20) <전체성과 무한>, 317쪽.
21) <타인의 얼굴>, 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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