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수도사 서유기 + 그리스도교 동유기>(감은사) 서평을 제의받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6년 전 떼제(Taizé) 공동체에서 경험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대략 "11월, 쌀쌀함이 묻어나던 6년 전 이맘때 였다"라는 말로 시작하며 떼제에서 겪은 '정교회' 관련 일화를 읊으며 서평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수도 공동체, 떼제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며 마주했던 동방 교회 전통, 거대한 예배실 지하에서 발견한 미로 같은 공간 한쪽에 마련된 수많은 십자가와 이콘들, 냉기와 지하실의 축축함이 몇 개의 촛불로 밝혀지던 공간이 알고보니 동방 교회 전통 채플이라니! 동방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이 책 서평의 도입부로 안성맞춤 아닌가.

하지만 책을 읽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미지의 세계로 여겨지던 동방 교회 이야기를 13세기 동방 교회 수도사에게 직접 듣는 기회는 매우 소중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책 1부 '동방 수도사 서유기'를 우리말로 옮기고, 2부 '그리스도교 동유기'를 쓴 곽계일의 안내는 탁월하다. 그의 세심하면서도 흥미진진한 문장은 '동방'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밝히는 커다란 등불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이야기는 최대한 줄이고 역자·저자 곽계일의 문장을 소개하는 방향으로 서평을 진행하고자 한다.

<동방 수도사 서유기 + 그리스도교 동유기> / 곽계일 지음 / 감은사 펴냄 / 304쪽 / 1만 8000원
<동방 수도사 서유기 + 그리스도교 동유기> / 곽계일 지음 / 감은사 펴냄 / 304쪽 / 1만 8000원
1. 들어가며: 동방 너머의 동방 교회

"여기서 '동방'은 예루살렘으로부터 가까운 차례대로 근동과 중동 그리고 극동 지역을, '시리아'는 동방 그리스도교들이 성경과 예전과 신학 언어로 사용했던 시리아어를 가리킨다." (16쪽)

13세기 말, 몽골인 수도사 사우마와 그의 제자 마르코스는 서방으로 떠난다. 이들에게는 콘스탄티노플 비잔틴교회마저 '서방' 교회로 여겨진다. 오늘날 우리는 '로마'를 기준으로 로마가톨릭교회를 서방 교회로, 비잔틴교회를 동방 교회로 여기지만, 적어도 이 두 명의 수도사에겐 '라틴' 교회와 '헬라' 교회로 구분될 뿐 두 교회 모두 '서방 교회'다. 이들은 자연스레 동·서방의 기준으로 로마가 아닌 '예루살렘'을 제시한다. 이처럼 '동방 너머의 동방'에서 온, 모든 교회를 서방 교회로 여기는 이들은 오늘날 '앗시리아 동방 교회'라 불리는 전통에 속한다.

"양털로 만든 검정색 수도복"을 입은 이들은 왜 서방으로 떠난 것일까? 베이징과 예루살렘은 오늘날에도 결코 가깝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들은 700여 년 전, 대도(베이징)에서 예루살렘을 향했다. 이들의 욕망 근원에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뿌리, '예루살렘'이 있었다. 현대 독자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동방 너머의 동방 교회'라는 미지의 전통으로 향하듯, 이들은 자신들이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전통을 향해 '서방'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떠났다.

2. <동방 수도사 서유기>
사우마, 예루살렘 너머 서방으로 향하다

"만일 서방으로 순례를 떠난다면 거룩한 순교자들과 교부들의 성지를 순례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만유의 주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고 은혜로 우리의 순례길을 인도해 주신다면 예루살렘까지 갈 수 있지 않을까?" (41쪽)

동방의 수도사 사우마와 마르코스는 대도를 떠나 거룩한 순교자들과 교부들의 성지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리고 이 여정은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고 잠시 중단된다. 이들이 속한 동방 교회 총대주교가 있는 바그다드에 도착하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은 전쟁으로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제자 마르코스는 총대주교로 취임하게 된다. 그리고 수년이 흐르고 나서야 스승 사우마는 총대주교와 칸에 의해 서방 교회로 파견된다. 이 파견으로 동·서방의 전통이 조우하게 된다.

[장면1] - 로마 라틴 교회 추기경단과의 만남

사우마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 추기경들은 교황 선출을 위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추기경단은 사우마를 환영함과 동시에 사우마의 '전통'을 물었다. "그대는 어떤 신앙고백으로 세례받았소이까? 어떤 그리스도교 전통을 따르시오? 로마 교황의 전통이오, 아니면 다른 전통이오?"(79쪽) 미지의 세계에서 온, 양털로 만든 검정색 수도복을 입은 존재가 눈앞에 있는 만큼 추기경단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이 질문을 통해 설정되는 미묘한 '경계'도 느껴진다. 이 경계에는 로마 교황의 전통과 그 밖의 전통으로 구분되는 선이 존재한다. 그러나 사우마는 이 경계선을 허물고 자신의 전통과 로마의 전통을 연결한다. 동방 교회 전통은 로마 교회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12제자인 '사도 도마'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교황 성하가 보낸 어떤 사람도 복음을 들고 우리 동방인들에게 온 적이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거룩한 사도들이 우리 지역에 와서 복음을 전했고, 오늘날까지도 그분들이 전해 준 그대로 받아 간직하고 있습니다." (79쪽)

곧 이어 추기경단은 사우마에게 신앙고백을 요구한다. 사우마의 신앙고백은 사실상 '신론'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삼위일체'와 관련된 부분에서 추기경단은 '필리오케'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성령은 내어 나오셨다고 했는데, 성부로부터만 나오셨다고 믿으십니까? 아니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셨다고 믿으십니까?"(82쪽)

사우마가 로마에 당도하기 200년 전, 로마 교황의 사절이 콘스탄티노플 성소피아성당에 찾아가 비잔틴교회를 향해 파문장을 던진 일을 생각하면, 이 질문에 서린 긴장감을 덩달아 느낄 수밖에 없다. 사우마는 한 개체의 기원은 하나일 뿐, 둘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며, 성자와 성령의 기원은 오직 성부뿐이라 답한다. 이에 추기경단은 여러 주장을 내세우며 신앙고백 논쟁을 이어 갔고, 결국 사우마의 "입을 다물게 막았다."(83쪽) 그러자 사우마는 다음의 발언을 끝으로 이 논쟁을 멈춘다.

"제가 머나먼 몽골 땅에서 이곳까지 온 목적은 신앙고백을 논하거나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교황 성하를 뵙고 교부들의 성묘를 순례하는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84쪽)

[장면2] - 제노바에서 생긴 일

사우마는 교황이 선출되는 것을 기다리며 서쪽으로 더 이동한다. 제노바에 당도해 맞은 사순절 첫 주간 토요일, 제노바 시민들은 사우마 일행이 사순절에 음식을 절제하지 않는 것을 보고 질문한다. "당신들은 왜 금식하지 않습니까? 어째서 모든 그리스도교도들이 따르는 전통에서 벗어나 있는 겁니까?"(88쪽) 사우마는 전통의 경계를 가르는 시민들의 질의에 '전통 너머의 전통'으로 답한다.

"우리 지역에 처음 복음이 전해졌을 때 우리 선조들은 믿음이 약한 나머지 오랫동안 금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자들은 토요일과 주일을 제외하고 40일 동안 금식하도록 정했습니다."(88쪽) 즉 사순절 기간이라도 토요일과 주일에는 금식하지 않는 것이 동방 교회에 전해진 최초의 전통이라는 것이다. 사우마는 이어서 파리에 들러 프랑시스의 필리프 4세와 대화를 나누고 파리대학을 견학하고는 교황이 선출된 로마로 돌아간다.

[장면3] - 로마에서 보낸 사순절과 부활절

사우마가 서방 전통과 조우하며 연출된 장면들은 줄곧 '전통의 경계'를 확인하게 했다. 같은 것보다는 다른 것을 먼저 발견해 내고 그 이유를 추궁하는 것이 인간 본성인가 하는 의문이 들 무렵, 사우마가 로마에서 보낸 '사순절'과 '부활절'은 일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사순절 넷째 주일, 사우마는 새로 선출된 교황 니콜라오 4세에게 제안한다.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성찬례를 집례하고 싶습니다. 교황 성하께서 우리 동방 교회가 사도들로부터 받아 지키는 전통 방식을 보실 기회가 될 것입니다."(96쪽)

교황은 수락했고 몽골인 수도사의 집례를 보기 위해 인파가 몰렸다. 성찬례가 진행되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졌다. "사우마가 집례하는 과정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언어만 달랐지 예식 자체는 똑같아!'라고 입을 모아 말하며 기뻐했다."(96쪽) 사우마 일행은 이후 부활절에 이르기까지 서방 교회의 전통을 '감격'으로 경험하고 성대한 선물과 성유물을 품에 앉고 교황과 입맞춤하며 동방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교회의 전통을 향한 사우마의 미지 세계로의 순례는 종료된다.

3. <그리스도교 동유기>
복음, 동방 너머의 동방으로 향하다

이쯤 되면, <그리스도교 동유기>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1부 <동방 수도사 서유기>가 대도에서 서방 세계로 향하는 이야기라면, 2부 <그리스도교 동유기>는 예루살렘에서 동방 세계로 향하는 이야기다. 1부가 사우마의 기록을 토대로 후대인들이 편집한 것(시리아어)을 번역한 것이라면, 2부는 곽계일의 저서로 그 자체로 완결된 연구서이자 1부에서 제시된 사우마의 이야기를 보충해 주는 설명서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어떻게 바그다드에서 북경에 이르는 광활한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일까? 그 시작 포인트는 바로 예루살렘이다.

[Point1]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대도로 향했는가

"사도들이 흩어져 살기 시작한 땅끝은 그렇게 하나님이 거하시는 새 예루살렘이 되었다." (118쪽)

전통을 묻는 질문에 추기경단의 질문에 사우마는 "사도 도마와 그의 제자 앗다이와 마리"(78쪽)를 언급한다. 이들은 '땅끝'으로 향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 동쪽으로 향했다. 사도 바울이 서쪽으로 떠난 것처럼 말이다. 특별히 예수 사후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오순절 사건을 보면, 당시 동쪽에서 온 바대인·메대인·엘람인 등을 언급한다. 이는 1세기 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인 회당 분포 목록(144쪽)과 겹치는데, 동방에 존재하는 수많은 회당을 중심으로 그리스도교가 전파됐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비잔틴교회 전통의 근원이 이레네우스-폴리카르포스-사도 요한으로 거슬러 올라가듯, 바그다드 동쪽으로 펼쳐치는 '동방 너머의 동방 교회' 전통도 사도 도마와 사도행전 속 70인의 제자들의 이름에 맞닿는다. 과연 이러한 전통이 13세기의 몽골인 사우마에게 잘 연결될 수 있었을까?

[Point2] 동방 너머 동방의 전통

이를 위해 익히 잘 알려진 기념비 하나를 살펴보자. 이 기념비는 781년에 세워진 것으로 '대진경교유행중국비'라는 이름을 갖는다. 대진사에 건립된 이 경교 기념비 전면에는 삼위일체론과 기독론 등 신론 중심의 가르침이 담겨있고 측면에는 77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곽계일에 따르면 이 77인 중 "아홉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총대주교와 마찬가지로 승, 곧 검정색 수도복 '에스키마'를 입은 금욕과 금혼의 수도사들이었다."(161쪽) 이미 8세기 말 당나라에 검정 수도복을 입은 수도사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당나라 황실은 이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더욱이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161쪽)

대진경교유행중국비. 사진 출처 NAVER 지식백과
대진경교유행중국비. 사진 출처 NAVER 지식백과

동방 세계에 펼쳐진 그리스도교의 위세는 이후 더욱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잘 알려 주는 것이 14세기 동방 교회의 역사가 암루의 기록이다. 암루는 14세기 당시 동방 교회에 최소 27개의 대교구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다른 기록에서도 확인되는데, 동방 교회 14세기 당시 시리아 전통의 동방 교회에는 1명의 총대주교와 27명의 대주교, 200명의 주교가 있었다.(158쪽) '미지'의 세계로 여겨지던 동방 교회의 터전에서 그리스도교는 이미 '주지'의 것 이었다.

[Point3] 일치성과 다양성: 총대주교와 주교들, 그리고 성찬

과연 이들은 오랜 시간 예루살렘에 맞닿은 하나의 전통을 유지하며 일치를 이룰 수 있었을까? 동시에 광활한 지역에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민족들의 상황의 다양성을 고려할 수 있었을까? 그 중심에는 총대주교와 주교, 그리고 대주교가 있었다.

"일치성의 상징이 언제나 단 한명이었던 총대주교이고 다양성의 상징이 여러 민족과 언어와 지역 출신의 주교였다면, 일치성과 다양성을 이우르는 상징은 대주교였다."(159쪽)

동방 교회 사제들에게 결혼은 열려 있었지만 주교좌 승계는 언제나 독신 수도사들만 가능했다. 수도사들이 이어 가는 주교좌는 각 지역 전통들이 주교에 의해 보존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일치의 상징으로 총대주교를 삼았으며 대주교를 가교 역할로 바라봤다. 일치성과 다양성의 균형은 수도사들에 의해 승계되는 주교제에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일치성의 상징이자 실제적인 중심으로 하나의 축을 더 세웠다. 바로 '성찬'이다.

"한 교리, 한 믿음, 한 신앙고백, 그리고 한 예수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나눌 수 있도록 일체화시킨 상징이 있다면 바로 성찬이었다."(151쪽) 이들은 성찬을 통해 다양한 전통 너머에 있는 또 전통의 근원, 예수에게로 다가갔다. 13세기의 다양성의 상징인 몽골인 수도사 사우마에 의해 집례된 일치의 상징, 성례의 배경에는 이러한 유구한 전통이 깃들어 있었다.

4. 나가며: 전통 너머의 전통 이야기

두 이야기가 엮인 한 권의 책 <동방 수도사 서유기 + 그리스도교 동유기>는 동·서방을 교차시키며 '전통'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아마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반응하지 않을까 싶다. 먼저 사우마를 통해 전해지는 미지의 세계에 생경함을 느낄 것이다. 독자들의 신학적·신앙적 전통은 대체로 서방 라틴 교회에 닿아 있을테니, 누군가는 사우마에게 '필리오케'에 대한 해명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도 누군가는 서방 라틴 교회의 모습을 오만하게 평가하며 전통의 경계를 '묻고', '평가'하던 자신을 성찰할 것이다.

이렇게 전통이 품어내는 다양성에 대해 반추할 때쯤, 사우마가 제시하는 '사도로부터 이어져 오는 전통'과 '성찬'으로 이뤄지는 '일치의 현장'을 통해 전율을 느낄 수도 있다. 이 책이 던지는 '전통'이라는 키워드 속에는 다양성에 대한 고뇌와 일치를 향한 끈질긴 노력이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곽계일이 2부를 시작하며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켈수스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다양성과 일치 속에서 전통을 고민한 것은 초기 교회부터 이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 수가 늘어나자 자기들끼리 논쟁하면서 여러 분파로 갈라져 나갔다. 그럼에도 한 이름만 중심에 붙들고 있다면 누구와도 연합을 이룬다. 이들이 부끄러운 줄 알고 속히 버려야 할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다." (116쪽)

켈수스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순적인 모습을 비판하고 싶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비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연한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운 것이었다. 땅끝으로 퍼져 수많은 '미지'와 '다양성(분파)'를 만들어 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전통 너머의 전통' 안에서 그 누구와도 연합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곽계일은 독자들에게 '주지'와 '미지' 사이에서 '전통'을 고민할 것을 요구한다.

"13세기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다가 또다시 땅끝으로 흩어지게 된 그리스도교가 재차 확인한 것도 다름 아닌 자신의 태생적 존재 방식, 곧 일치된 주지에서 다양한 미지로 나아가며 미지를 통해 주지를 재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존재 방식이었다." (281쪽)

사우마가 오늘날 우리에게 다가와 성찬례를 제안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전통 너머의 전통 아래에서 일치를 이룰 수 있을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낯선 것'이라면 일단 밀어내기 바쁘고, '땅끝'을 바라보며 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딛기보다는 더욱 나은 안정감을 도모하는것에 익숙하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가르친 자기 부인은 이 안정감에서 벗어나 주지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한 발자국 내딛는 것이 아닐까? 사우마가 그랬듯이 말이다.

김영환 / 스물 다섯에 죽어서 여든에 묻힌다는 말이 크리티컬하게 다가오는 스물 아홉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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