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7시 반부터 10시까지 서너 개 방송사 뉴스를 시청하지만 졸지 않은 날이 거의 없다. 시사 유튜브 채널들은 불면증이 있는 내게 제일 좋은 수면제다. 거의 매일 조금 듣다가 잠에 빠져든다. 신문은 거의 보지 않는다. 글을 읽는 수고까지 들이기가 아깝다. 격한 말과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주장으로 가득한 뉴스들에 작은 호기심마저 사라져 버렸다.

대선 정국이 되면서 정도가 더 심해졌다. 언제부터인지 뉴스를 켜면 절반 이상은 대선 관련 뉴스다. 우리가 알아야 할 뉴스거리가 그렇게 없을까. 게다가 대선 뉴스라는 게, 거의 자극적 언사와 빈약한 분석으로 점철돼 있다. 이런 뉴스를 아직도 다섯 달은 계속 봐야 한다. 그 후에는 좀 달라질까.

그러던 중 두어 명의 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윤석열 씨가 무속 신앙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 의견을 묻는다. 별게 다 관심거리구나 생각했다. 호랑이띠인 나의 오늘 운세가 어떤지를 묻는다면 성의 있게 한번 찾아볼 텐데, 그의 손바닥에 쓰인 글자, 특정 부위 침술 요법으로 유명하다는 어떤 역술인 혹은 침술가와 친한지 문제가 나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윤 씨가 세상 돌아가는 걸 그들에게 물었는지 여부가 대선 국면에서 왜 그렇게 관심거리일까. 헛소리 작작해 대는 소위 정치 전문가라는 이들의 소리만큼이나 그들의 자문이 유해한 걸까. 그런 것을 분석하는 기사라면 가능하든 않든 신나서 조사도 해 보고 분석도 해 볼 텐데, 기자들은 그런 해석을 내게 기대하지 않는다.

내 주위의 많은 이가 생각하듯이 윤석열 씨는, 기대도 안 했지만, 생각보다 최악이다. 누구나 실언을 하지만, 저렇게 연일 설화를 일으키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그의 말은 습관적으로 뭔가를 주장하기 위해 엉뚱한 제3자의 존엄을 훼손한다. 그런 이가 스스로 '왕'이 되길 꿈꿨는지 혹은 그런 꿈을 부추기는 이가 있었는지, 아무튼 몸에 그런 흔적을 새겼다. 대통령을 왕으로 표상하는 것, 그것을 대놓고 남들이 보게끔 표식하는 것, 그 속에 내포된 욕망의 흔적을 해석하기는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을 분석할 만한 정치학·심리학에 두루 식견이 있는 전문가는 많을 것이다. 

그런데 윤석열 씨의 손바닥 글자와 침술 건을 굳이 기독교 신학자에게 묻는 의도는 무엇일까. 윤 씨가 무속 신앙에 기대고 있는 것을 비판해 주길 바랐는지 모른다. 물론 왕이라는 표식이 나의 비위를 거슬렀으니 비판할 수는 있겠다. 그런데 그 비판은 자칫 무속 신앙 전체를 향한 비하를 수반할 수 있다. 그러면 교회 비판에 열을 올려 왔던 나는 주류 교회의 신앙이 무속 신앙보다 사람들에게 미친 폐해가 적은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보기엔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큰 폐해를 끼친 신앙은 개신교 신앙이다. 물론 한국 개신교가 근대 한국에 미친 긍정적 영향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둘을 비교하는 것은 훨씬 복잡한 해석이 필요하다. 하지만 개신교와 무속 신앙 중 어느 것이 더 폐해를 끼쳤는지만 놓고 본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이 '개신교'라고 답할 수 있다. 

정치인 윤석열 씨가 교회를 '찾아갔다'
권력 향한 두 세력의 낯설지 않은 '동맹'

그렇게 심술나 있는 내게 다른 기자가 전화를 했다. 윤석열 씨가 한 대형 교회를 찾아가 예배에 참여한 것에 관해 물었다. 흔한 질문이긴 해도 내가 최근에 기자로부터 받은 전화 중 제일 반가웠다.

먼저 든 생각은, 누구나 그리 보았을 것 같지만 '윤 씨로서는 당연한 일을 했다'는 것이다. 교회는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정치적 압력 집단 중 하나다. 그러니 선거 때 어느 후보도 교회를 완전히 외면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그가 방문한 교회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사이즈의 교회다. 또 그와 정치적 궁합이 잘 맞는다. 특히 노년층의 지지를 많이 받고 있는 후보로서 모험할 일이 가장 적은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 시점이 무속에 친화적이라는 이미지가 막 생기고 있던 터다. 그러니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다.

문제는 교회가 정치적 압력 단체라는 세간의 인식에 관한 것이다. 많은 기독교 신자·성직자 중에는 교회가 절대로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역사상 기독교가 정치적 태도를 취하지 않은 경우는 매우 드물다. 심지어 기독교 신앙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와 바울은 당대에 가장 정치적인 종교인에 속했다. 그러니 종교의 비정치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기독교의 소수파 입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데, 교회를 정치적 압력 단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생각 이면이 중요하다. 이렇게 보는 이들의 대다수는 필시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해서 그들 중 다수는 일부 종교인들처럼 기독교는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곤 한다. 기독교 정당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가진 이들 모두가, 가령 독일의 메르켈 수상이 속한 기독교민주연합(CDU) 같은 정당에 대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조사된 바는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추정컨대 훨씬 다수는 나쁜 인상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많은 이가 '기독교 정당'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정치 세력화를 문제로 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한국에서 개신교의 정치적 활동이 사회의 민주적 변화에 걸림돌로 작동해 왔기 때문이겠다. 기독교는 너무나 자주 사회 공론장이 진지하게 형성되는 것에 흙탕물을 튀겨 왔다. 가령 무조건 장로가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강변하거나 기독교의 특권적 지위를 편파적으로 옹호하곤 했다. 또 공산주의자를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성소수자의 인권을 모욕하곤 했다. 나아가 종교 활동을 빙자해 사전 선거운동을 일삼는 등 불법과 탈법을 거침없이 자행했다.

개신교 주류파의 정치 행태를 보면 지나치리만큼 품격 없는 보수의 모습이 역력했다. 해서 한국 시민사회 다수는 개신교의 정치적 개입에 부정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선 후보 중 가장 먼저 윤석열 씨가 교회를 찾아갔다.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는 무속적 종교성에 대한 혐의를 벗겨 내기 위한 정치적 행보겠다. 교회로선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니 그런 방문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서로에게 필요한 일이고 정치 공학적으로 득이 될 일이다.

한데 이 정치적 대면 행위 속에는 미래 사회를 위한 대안 모색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모색에 기반해 정치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려는 어떤 언술도 오가지 않았다. 그를 맞이한 교회 목사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위기에 처해 있는 대중을 더 행복하게 할 만한 종교적 기획을 담은 당부의 메시지를 전할 생각도 없었던 듯하다. 하여 여기에는 단지 권력을 향해 돌진하는 두 세력의 동맹만이 보였다. 문제는 이런 게 그렇게 낯선 풍경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러니 한국 시민사회가 교회의 이런 정치 개입적 행보를 존중할 리 없다.

비판 사라진 종교는 '죽은 종교' 

이제까지 말했던 문제적인 기독교의 정치 세력화는 교회와 교단, 그리고 교회 연합 기구들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의 정치적 행보에 국한된다. 그들이 개신교의 가용 자원을 독과점하고 있으니, 그들의 정치 행위가 개신교의 정치 활동을 과대 대표해 온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자원이 없다는 것이 정치적으로 무력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소수파의 무기는 '비판'이다. 정치인 아무개와 종교인 아무개의 만남이 일으키는 정치 공학적 분석이 아니라, 정치적 비전의 부재를 지적하고 부실한 혹은 빗나간 비전을 분석·비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비판을 실천하는 저항 연합을 도모하는 것도 필요하다. 선거 정국은 그런 비판들이 소란스럽게 울려 퍼져야 생기가 나는 국면이다. 소란스럽지 않은 선거는 죽은 선거이고, 비판 없는 비난으로 점철된 선거 또한 죽은 선거다. 그리고 비판이 사라진 종교는 죽은 종교다.

다시 말하거니와 소수파의 생명력은 비판에 있다. 그럴 때 시민사회로부터 잠잠하라고 옐로카드 받은 교회의 정치 행위는 다시 소생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김진호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이사.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