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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무엇인가? 동일한 질문을 수십 년 전부터 던졌지만 아직도 하는 것을 보면 답을 찾지 못해서일 것이다. 어쩌면 답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의 몸'이니 '진리의 터'이니 하는 식의 답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정의된 교회와 '살아 내는 교회'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 간극이 얼마나 큰지, 마치 딴 세상 같다. 신앙생활이란 고백과 실천 사이에서 서 있는 것이 아닐까. 성경에서 제시한 교회는 '천국' 내지 '완전한 공동체'로 보이지만, 실제 교회는 경쟁과 반목, 시기와 질투가 난무하는 '정글'이다. 교회는 원래 그런 곳일까?

<기꺼이 불편한 예배>(이레서원)의 부제 '환대와 우정을 나누는 예배 공동체'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교회 공동체는 '환대하는 공동체'이며 '우정을 나누는 예배 공동체'다. 저자는 이 책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 책은 완벽한 공동체의 이야기가 아니며 예배에 대한 학문적인 내용을 다룬 글도 아니다. 다만 한 예배자의 고민과 여정을 담은 글이자,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이 아닌 여전히 험난한 길을 걷고 있는 나그네의 이야기다. 하지만 나그네는 이제 새로운 소망을 품고 있다." (9쪽)

<기꺼이 불편한 예배 - 환대와 우정을 나누는 예배 공동체> / 김재우 지음 / 이레서원 펴냄 / 192쪽 / 1만 1000원
<기꺼이 불편한 예배 - 환대와 우정을 나누는 예배 공동체> / 김재우 지음 / 이레서원 펴냄 / 192쪽 / 1만 1000원

저자는 예배 인도자이며 미국 조지아주 클라크스턴에 아내와 함께 선교사로 사역 중이다. 클라크스턴은 다양한 이주자·난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특이성과 다양성이 도리어 평범성이 되는 곳에서 바라본 교회는 어떤 모습일지 사뭇 궁금했다.

과거 유럽 선교사들이 아프리카 선교를 할 때 여성들에게 속옷을 입으라고 해서 큰 충돌이 일어난 적이 있다고 한다. 그 지역에서 여성들이 속옷을 입는다는 것은 창녀가 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복음과 문화를 구분하지 못했던 시대의 실수다. 하지만 복음과 문화를 엄격하게 구분할 수도 없다. 진리는 시대와 문화, 그리고 민족 안에 임하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을 때 당시 문화의 옷을 입으셨던 것처럼 모든 예배는 동시 문화의 옷을 입는다. 어디서 누구와 예배하든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예배가 성경적인 예배라고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문화의 옷을 입지 않는 성경적 예배는 존재하지 않는다." (22쪽)

저자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언급한다.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오셨고, 유대 문화 안에서 활동하셨고, 유대인의 언어로 설교하셨다. 게다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사셨다. 문화도 민족도 언어도 다른 2000년 전 인물을 우리는 구주로 믿고 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이들이 어디 한국 사람들뿐이겠는가. 복음은 문화의 옷을 입고 있으나 또한 문화를 초월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언제나 이러한 딜레마를 안고 있다.

진정한 예배는 문화의 옷을 입으면서도 문화를 초월해야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잘 기획된 예배가 아니라 참된 예배자"(30쪽)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적인 것'의 편견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하나님을 갈망할 때 "주의 영광과 경이로움을 보게"(33쪽) 된다. 백인들에게 예수님은 백인으로 보이지만, 흑인들이 보는 예수님의 얼굴은 검다. 구한말 기독교를 전래받은 조선 사람들은 예수님을 갓을 쓴 양반으로 인식했다. 운보 김기창은 이러한 정서를 반영해 갓을 쓴 예수님을 그렸고, 한복 저고리를 입은 마리아를 그렸다. 예수는 유럽에서만 예수님이 아니다. 동양에서도 아프리카에서도 여전히 예수님이시다.

서로 다른 언어·문화·세계관을 지닌 이들이 함께 모여 예배한다면 어떨까? 당연히 불편할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결코 편하지 않다고 말한다. 다양한 나라 출신이 모여 예배하니 다양한 나라의 언어로 노래를 부른다. 어느 날은 아랍어로 된 찬양이 있었다. '알라'는 아랍어로 '하나님'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지만, 9·11 테러 이후 반아랍 정서가 굉장히 강해져 있는 미국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었다. 하필이면 그날은 미국이 정한 애국 주일이었다고 한다. 결국 한 팀원이 교인들에게 '알라'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한 뒤 함께 찬양을 부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 책은 정교한 신학적 내용을 다루지는 않는다. 저자의 소개 글처럼 지금 여기의 삶을 담고 있다. 문화가 다른 예배자들의 이야기, 난민에 대한 에피소드 등을 담고 있다. 사실 난민은 가난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저자의 물음에 뜨끔했다.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처한 이들을 향한 선입견을 버려야"(114쪽) 한다. 우리는 우리의 문화에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약속 시간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특권"(162쪽)이란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환대하기 위해서는 인내와 용기가 필요하다. 환대에 대한 글을 인용하여 책 소개를 마친다.

"환대는 우리를 낯선 곳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환대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에게 베풀다가 나의 가장 귀한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환대는 분별력과 지혜, 숙련된 기술과 경험을 필요로 한다. 또한 그 이상의 용기도 필요하다. 상처받을 용기, 아무것도 돌려받지 않아도 괜찮을 용기, 오히려 오해와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 처할 용기." (188쪽)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정현욱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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