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는 교계 현안에 대한 20~30대 청년의 이야기를 꾸준히 담아내기 위해 '2030이 한국교회에게'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 편집자 주

일전에 교회 사람들과 '라이어 게임'을 한 적이 있다. 구성원 중 랜덤으로 '라이어'를 정하고, 라이어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같은 키워드를 공유한다. 이제 사람들은 순서대로 키워드를 설명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라이어는 해당 키워드를, 나머지는 라이어가 누구인지를 맞추는 게임이다. 첫 판 키워드로 '사진사'가 나왔고, 함께 있던 목사는 이 키워드를 이렇게 설명했다. "교회에서는 이 직업의 노동 가치를 좀 후려치는 경향이 있어요." 나는 반만 맞았다고 생각했다. '맞는 말이긴 한데, 한국교회가 후려치는 노동이 과연 저것뿐일까?'

흔한 교회 반주자: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흔한 교회 반주자: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한국교회는 기묘할 정도로 능숙하게 노동력을 착취한다. 여기에는 상대의 능력을 교회가 활용 가능한 자원으로 전제하는 사고방식이 작동한다. 그 정체 모를 당당함 앞에서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어...어어?' 하다가 알뜰살뜰하게 차출돼 버리기 십상이다. 특히 예체능·미디어 계열에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자주, 쉽게 후려침을 당한다. 보통 중학생, 심하면 그보다 어릴 때부터 악기를 조금이라도 다룰 줄 아는 교인은 찬양팀 혹은 반주 '봉사자'로 불리며 예배를 '섬기'거나 특송을 '드리'게 돼 있다.

'내가 악기 좀 다룰 줄 안다' + '부모님이 목회자·선교사 혹은 교회 내 중직을 맡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찬양 반주 봉사는 웬만해선 피할 수 없는 십자가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없다. 주일예배가 익숙해지고 나면, 금요 철야, 수요 예배를 거쳐 어느 순간 새벽 예배 시간 졸린 눈 비비며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당신을 보게 될 것이다. 세간에서는 이걸 '문간에 발 들여 놓기 기법'이라고 부른다.

그런가 하면 사진을 찍거나 영상을 편집할 수 있는 사람은 교회의 '디지털 사관'으로 일하게 된다. 실용음악 전공자는 방송실 엔지니어로 일한다. 디자이너(혹은 디자인 툴 사용자)는 각종 행사 포스터와 주보, 여타 디자인을 도맡아 한다. 유감스럽게도 담임목사의 미적 감각에 맞춰진 한국교회 디자인은 전공자의 피·땀·눈물과 상관없이 조별 과제 PPT에 등장하는 '보노보노' 신세를 면하기 힘들다.

솔직히 이 정도까진 아니긴 합니다만....
솔직히 이 정도까진 아니긴 합니다만....

게다가 프리랜서·학생이라면 후려침의 강도·빈도는 배가된다. 한국교회는 프리랜서가 말 그대로 모든 시간이 '프리'한 사람인 줄 알고, 언제든 '프리(무료)'로 활용 가능하다 여긴다. 학생은 또 학생이라고… 아무튼 시간이 많다고 여긴다. '내가 프리랜서·학생이다' + '악기·사진·영상·엔지니어·디자인을 골고루 할 줄 안다?' 진심으로 조언하는데 어서 도망치길 바란다. 

교인들 상황이 이런데 '사역자'의 노동이라고 후려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오늘날 (전임을 제외한) 사역자는 두 가지 지점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 노동자에 가깝다.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그보다 낮은 임금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사장님, 정말 이것까지 해야 하나요?'에서 온갖 '이것'을 도맡아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오죽하면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 넣을 수 있는 유일한 직업군이 '전도사'라고 하겠는가.

사역자는 찬양 인도자, 설교자, 운전 기사, 상담가, 비서, 행정 사무직을 겸한다. 이 중에서 할 수 있는 걸 골라서 하는 게 아니다. 할 수 없는 건 '배워서' 해내야 한다. 더군다나 상술한 '이것'들은 평소에 하는 일일 뿐이다. 고난주간·부활절·추수감사절·성탄절 같은 교회 절기는 물론이고 전도 축제, 수련회, 바자회 같은 각종 행사 때마다 콘텐츠 기획자, 편집자, 진행 요원 등 여러 직업을 오간다. 도대체 사역자로서 성경 읽고 기도할 시간이 있을까 싶지만, 하나님께서는 행위를 떠나 마음의 중심을 보실 테니 일단 괜찮다고 하자.

목사님, 정말 이것까지 해야 하나요?
목사님, 정말 이것까지 해야 하나요?

이런 뒤틀린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기란 쉽지 않은데, 점주(담임목사)를 비롯해 '너, 여기서 목회하기 싫으냐'고 협박(?)하며 언제든 계약 해지를 통보할 수 있는 본사(교회·교단)가 굳건히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신학대학원생으로 이루어진 파트타임 사역자들은 '학문 영역'과 '직업 영역'에서 이중으로 대학원생 신세를 면하기 힘들다. 일반 대학원생이야 작년 태영호 의원(국민의힘 서울 강남구갑)이 발의한 '근로기준법 일부 개정 법률안'에서 비로소 '사람'으로 인정받았다지만, 대학원생 제곱의 삶을 사는 사역자들 처우가 어떠할지는 알 수 없다.

이쯤 되면 한국교회가 후려치는 대상의 특성이 조금 드러난다. 대체로 항의하기 어려운 수많은 '을'들이 한국교회 노동시장 저변을 아틀라스처럼 떠받치고 있다. 그리고 그 아틀라스의 신체 대부분은 '청년'이라 불리는 집단으로 이뤄져 있다. 한국교회의 지독한 청년 사랑은, 그것이 나름대로 '성경적'이어서 더욱 무섭다.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는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시 110:3)의 이미지는 한국교회가 청년에게 품은 집착광공스러운 기대를 정당화한다.

청년은 앞서 말한 교회 노동에 헌신해야 함은 물론이고 세상에서도 성공을 이뤄 사회적·문화적 자본으로 하나님의 이름을(갑자기?) 드높여야 한다. 또 '남녀' 간 건강한 교제를 통해 가정을 이루고 믿음의 후손을 재생산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심지어 '일부' 교회는 청년들을 미인계에 동원해 전도를 시도하기도 하는데….

뭐 그렇다. 정말 '일부'이길 바랄 뿐이다. 여하간 이런 가부장 시댁 같은 교회의 바람 앞에 어떤 청년은 전심으로 순응하거나, 조금 짜치지만(?) 하나님을 봐서 마지못해 순응하곤 한다. 끝내 순응하지 않는 청년은 한국교회가 규정한 '신실함'이라는 정상성 바깥으로 쉽게 밀려난다.

아, 하늘 상급 따윈 됐고요....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 중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교회 일은 일종의 봉사 아닌가? 멀쩡히 오랫동안 봉사하는 분도 많은데, 이걸 착취라고까지 말하는 건 심한 것 같다!' 맞다. 마음에서 우러난 봉사와 헌신을 이어 온 분들이 일구고 지켜 온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노동 착취는 미담에나 등장할 법한 그런 '봉사 정신'과 결이 다르다.

첫째로, 여기서 말하는 착취는 일종의 강요된 헌신이다. 기표를 문자주의적으로 읽는 경향에 힘입어, 한국교회는 자발적이든 아니든, 당사자의 생각이 어떻든, 일단 '섬김'으로 부르면 그게 그냥 섬김인 줄 안다.

둘째로, 한국교회는 신앙이라는 모호한 특성에 힘입어 '착취'와 '섬김'의 경계를 교묘히 흐린다. 전자가 노동과 그에 따른 대가에 기반한 '세상적'인 말이라면, 후자는 타에 모범이 되는 믿음·헌신과 그에 따른 대가(하늘에 받을 수 있게 '어음'으로 끊어 준다)에 기반한 '교회 방언'이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전자를 시켜 놓고 자꾸 후자라고 말하는 데 있다. 이 정도 교묘한 논리는 갖춰 줘야 목회자 노조 설립을 두고 "교회를 사업장으로 착각하고 있다"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제껏 노동력을 착취당해 왔지만 이를 인지하지 못했거나, 또는 착취 자체를 인정하길 거부하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확실히 교회는 여느 '사업장'보다야 공동체에 가까운 모습이고, 그만큼 단순한 경제 관계를 넘어선 친밀성이 작용하기 쉽다. 그러니 한국교회의 노동 착취란 어느 순간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라, 사후에 발견되고 불려졌을 뿐이다. 심지어 그 친밀성 때문에 이미 착취 관계라는 사실을 인정한 뒤에도 이를 쉽게 끊어내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사실 한국교회의 노동문제를 논의하려면 앞서 말한 '친밀성' 말고도 다양한 현실적 상황과 이해관계가 함께 고려돼야 한다. 한국교회에 미흡한 노동 기준과 지침, 과도한 목회자 공급, 인력과 자금의 부족 등. 현실 노동도 그렇지만 한국교회의 노동 착취 문제는 더 복잡한 결이 얽히고설켜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교회는 어떤 측면에서는 분명 '사업장'이고, 따라서 사실 그대로의 착취를 착취라 부르지 못할 이유도 없다.

나 역시 교회에서 맡아 온 일이 있고, 그 모든 것이 늘 오롯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한국교회가 '을'들에게 무언가를 맡겨 놓은 듯이 굴지만 않아도, 이런 현실이 조금은 나아지리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교회 내 노동 착취의 현실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무언가를 부탁할 때는 그에 걸맞는 태도를 보이는 게 당연한 에티켓이다. 기본도 못하고 있으니 '한국교회 노동 현실을 타파할 대안' 따위는 조금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하고, 적어도 그간의 노동을 믿음과 헌신, '하늘 상급' 같은 말들로 퉁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심정용 / 포항의 한 미션스쿨을 다니면서 한국 개신교의 매운맛을 집약적으로 맛봤다. 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노동한다. 다행히 입맛에 맞는 교회를 찾아서 다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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