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얀마 시민들이 대규모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군대와)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예측이 많은데,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생길지 걱정됩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먼저 가신 5월 영령들, 희생된 미얀마 영령들, 함께 싸우다 돌아가신 세계 영령들께 묵념 올리겠습니다."

[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미얀마 군의 날'인 3월 26일, 광주아시아여성네트워크 황정아 대표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 속 광주시민 50여 명이 5·18민주광장 앞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날 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네 번째 '딴봉띠 집회(냄비 등을 두드리며 악귀를 쫓는 미얀마 풍습으로, 군부에 저항하는 의미를 담았다 - 기자 주)'가 열렸다.

광주시민들은 '광주 오월은 미얀마 민중과 연대한다'는 피켓을 들고 집회에 참여했다. "미얀마 민주 투쟁을 지지한다", "미얀마 군부는 즉각 퇴진하라", "미얀마 민중들과 함께하겠다"는 구호를 미얀마어로 외쳤다. 미얀마 군 총사령관 민 아웅 흘라잉의 사진을 밟는 퍼포먼스도 진행했다. 참석자들은 양은 냄비와 꽹과리 등을 두들기며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개입을 촉구했다.

미얀마 유학생 마웅 씨는 지난 일주일 동안 현지에서 벌어진 일을 설명했다. 그는 "미얀마 군대가 매일 밤낮없이 시민을 고문한다. 고문으로 죽은 사람은 코로나로 죽었다고 발표한다. 군부가 석방한 죄수들은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며칠 전엔 주택을 수색하던 군인들이 아버지 무릎에 앉은 7살 아이를 죽였다"고 말했다.

3월 26일 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딴봉띠 집회에 참석한 광주시민들이 미얀마 군 총사령관 민 아웅 흘라잉의 사진을 밟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3월 26일 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딴봉띠 집회에 참석한 광주시민들이 미얀마 군 총사령관 민 아웅 흘라잉의 사진을 밟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딴봉띠 집회를 기획한 황정아 대표는 5·18민주화운동 세대이자, 광주에서 오랫동안 여성운동을 해 온 '올드 페미니스트'다. 그는 <광주 여성>(후마니타스)을 기획하는 등 5·18민주화운동에서 지워진 여성들의 목소리를 발굴했다.

황정아 대표는 미얀마에서 1년간 거주한 경험을 계기로 미얀마 내 실향민 여성들과 2017년부터 연대해 왔다. 황 대표는 미얀마에서도 가장 열악한 상황에 놓인 소수민족 여성들이 전쟁과 폭력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도록 도왔다. 스스로 생계비를 벌 수 있도록 재봉, 버섯 재배 기술도 교육했다.

그러나 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2월 이후 황 대표가 진행하던 모든 프로젝트는 멈췄다. 미얀마 활동가들은 밤마다 참혹한 사진을 보내 왔다. 도울 수 없어 답답하던 마음도 잠시, 그동안 받은 사진을 모아 미얀마 상황을 알리는 사진전을 열었다. 사진전에서 모금한 돈은 지원이 필요한 현지 활동가들에게 전달했다. 미얀마 군부가 3월 초부터 현지 딴봉띠 집회를 금지하자, 황 대표는 "미얀마를 대신해 광주에서 시위를 이어 가자"며 3월 8일 광주에서 첫 번째 딴봉띠 집회를 열고 지금까지 연대해 오고 있다.

미얀마를 향한 연대의 끈을 이어 가고 있는 황 대표를 3월 26일 광주 동구 전일빌딩245에서 만났다. 군부 쿠데타 발발 이후 미얀마 소수민족 여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현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들을 수 있었다.

광주아시아여성네트워크 황정아 대표는 3월 8일부터 광주 5·18민주광장 앞에서 미얀마 민주주의를 응원하는 딴봉띠 집회를 진행해 왔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광주아시아여성네트워크 황정아 대표는 3월 8일부터 광주 5·18민주광장 앞에서 미얀마 민주주의를 응원하는 딴봉띠 집회를 진행해 왔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2017년 광주아시아여성네트워크 출범
IDP 여성 트라우마 치유, 자립 지원
미얀마 여성의 자생력·주체성 발견
군부 쿠데타로 현지 궁핍 극심해져

황정아 대표는 2016년 광주 지역 여성 단체 대표에서 물러난 후 떠난 미얀마 봉사 활동에서 '국내 실향민(Internally Displaced Persons·IDP)' 여성들을 만났다. 민족 간 내전이 잦은 미얀마에는 해외 난민 외에도 100만 명에 달하는 IDP가 있다. 이들은 열악한 캠프에서 지내며 각종 폭력에 노출되고, 지역 원주민으로부터 차별·배제를 받고 있었다.

황 대표는 5·18민주화운동 세대로서 여성들의 트라우마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 전쟁·폭력 트라우마 회복, 거주 시설 제공, 생계 지원이 절실하다고 느꼈다. 한국에 돌아온 2017년, 광주아시아여성네트워크를 발족하고, IDP 여성의 역량을 강화하는 '룰루랄라 치치킹킹'과 자립을 지원하는 '재봉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현지 문화를 해치지 않고도 IDP 여성이 자립할 수 있게 돕는 방법을 고민했다. 마침 광주를 찾은 한 미얀마 여성 활동가에게 어떻게 하면 자국 문화를 존중하며 도울 수 있는지 끊임없이 물었다. 황 대표는 "속도나 성과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니 수혜자 입장을 고려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미얀마는 성교육할 때 한국처럼 여성과 남성이 같은 자리에 있기 어려운 문화다. 그래서 처음에는 여성 활동가를 대상으로 성교육을 했다. 이후 분위기가 개선돼 여성·남성이 같이 받게 했다. '재봉틀 프로젝트'도 재봉틀만 갖다 준다면 쉽게 팔아 버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재봉틀을 활용할 수 있도록 기술을 가르치고, 생계비·강사비를 지원했다. 성과가 아니라 사람들 속도에 맞추니 적은 돈으로도 수혜자 입장을 최대한 고려할 수 있었다."

자존감이 낮던 IDP 여성들은 교육을 받고 각 지역으로 돌아가 교육 주체가 됐다. 이들은 청소년, 캠프 주민, 타 단체 활동가를 교육하는 등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캠프 내에서 폭력을 가하는 남성을 제재하는 자치 조직을 꾸리거나, 캠프 규율을 만들고 관리하기도 했다. 황 대표는 "미얀마 소수민족 여성들은 단순히 피해자가 아니라 주변 아이·여성을 돌보는 주체적인 존재"라고 말했다.

현재 IDP 여성들은 쿠데타 이후 모든 노동이 중단돼 생계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황정아 대표는 현지와 연락을 이어 나가며 모금액을 전달한다. 그는 "지금 미얀마는 100만 원이 너무 간절하다. 군부가 해외 자금의 유입을 차단한 상황이라 큰돈을 부치는 건 불가능해 현지 활동가 개개인을 통해 송금한다. 우리처럼 작은 단체, 풀뿌리 운동 단체의 역할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미얀마 사태 장기화 우려되지만,
자발적 시민 연대로 결국 승리할 것"
"시위 끝난 후에도 연대 기억 간직해야"

황정아 대표는 미얀마 민주화 시위가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 모든 활동을 하는 데 혼자 힘만으로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의 곁에는 광주아시아여성네트워크 이희영 활동가가 있다. 호남신학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인 이 활동가는 황 대표와 세대·종교는 다르지만, 같은 광주시민으로서 제3세계 여성과 연대하고자 하는 마음이 통해 함께하게 됐다.

두 사람은 미얀마 사태가 장기화할 수 있지만, 시민들의 자발적인 연대로 결국 승리할 것이라고 했다. 황 대표는 "지난 24일 침묵시위를 하는데 미얀마 전역이 일시 정지했다. 어떤 나라 사람들도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거다. 그 모습을 보며 '종국에는 이 사람들이 이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희영 활동가는 "현지인들과 대화해 보니, 50년의 군부 정권을 다시 겪느니 차라리 5년의 전쟁을 하겠다는 각오로 임하고 있더라. 지금 미얀마 시민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미얀마가 역사적으로 소수민족 문제 해결이 쉽지 않은데, 민주화 시위에서 소수민족과 버마족이 한마음으로 연대한 경험을 잘 지키고 기억하면 좋겠다. 시위가 끝난 후 이 문제를 함께 해결했다는 연결된 감정을 가지고 그 다음을 펼쳐 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고 했다.

미얀마 민주화 시위를 지켜보는 한국인들에게도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는 "5·18 이후 갈등이 해결되지 않은 이유는 소수의 목소리가 과대 대표됐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운동의 주역으로 만들고 권력화하는 과정이 있었다. 지금 미얀마 민주화 시위에는 모든 시민이 자발적으로 함께하고 있다. 시위가 끝난 후 미얀마에서 같은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광주아시아여성네트워크 황정아 대표와 이희영 활동가는 5·18민주화운동 기억을 갖고 살아가는 광주시민으로서 미얀마 민주화 시위가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광주아시아여성네트워크 이희영 활동가와 황정아 대표는 5·18민주화운동 기억을 갖고 살아가는 광주시민으로서 미얀마 민주화 시위가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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