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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격동의 시기는 4세기였다. 303년 대박해(Great Persecution)로 시작한 격동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등장과 함께 갑작스럽게 바뀐 기독교의 운명 속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로마제국을 손에 거머쥔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의 통일과 일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옛 종교를 물리치고 새 종교(기독교)를 선택한다. 그러나 기독교 진영 내부는 이미 기독론 논쟁으로 분열을 겪고 있었다. 이에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통일과 일치를 위해 선택한 기독교 진영이 '교리적 통일과 일치'를 이루는 것을 필수적인 일이라고 느끼게 됐다. 그래서 마련한 자리가 그 유명한 니케아공의회(325년)였다.

니케아공의회는 기독교인들에게 여러모로 의미 있는 공의회였다. 심한 박해를 받던 시절을 끝내고 제국의 종교로서 위상을 새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진영에서 갈등의 불씨가 된 '기독론' 논쟁을 본격적으로 드러내 놓고 시작한 공의회이기 때문이다. 대박해로 실제적 상처를 입은 주교들(눈이 하나 없다든지, 다리를 전다든지)은 황제의 초청으로 진행된 니케아공의회에 참석해, 황제가 베푼 만찬의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기독교의 평화, 또는 제국의 평화는 기독론 논쟁 때문에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아니,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가 된 이후 기독교는 아리우스 논쟁으로 말할 수 없는 격동의 시절을 맞이하게 됐다.

아리우스(Arius, 250/256~336)는 주교 아래 직급인 장로사제였다. 그만큼 정치적 기반이 강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기독론 이론은 당시 동방의 많은 주교에게 지지를 받았고, 그 주교들과 함께 세력을 형성해 자신의 주장을 기독교의 정통 신학에 관철하려 했다. 이에 반기를 든 인물은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주교인데, 그는 아리우스 기독론을 위험하다고 느꼈다. 위험을 넘어, 이단적 주장이라고 느꼈다. 알렉산더 주교 밑에서 성장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298~373)는 알렉산더 주교의 리더십 아래 아리우스 진영과 심한 대립각을 세운다.

우리는 보통 '아리우스' 또는 '아타나시우스'라는 이름만 접하기 때문에, 이들의 외모나 됨됨이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을 묘사하는 당시 문서들을 보면, 아리우스는 키가 크고 훤칠한 외모에 달변가였다. 또한 그는 음악 애호가인 데다가, 자신의 신학을 시로 읊어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재능이 있었다. 이것을 볼 때, 아리우스가 어떤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을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반면, 아타나시우스는 어린아이처럼 키가 작았다. 하지만 매우 똑똑하고 대담했으며, 사람들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한마디로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었다. 둘 사이의 나이 차이는 대략 40년 정도다. 이는 나중에 아타나시우스 신학이 아리우스 신학을 누르고 '정통'으로 자리 잡는 데 얼마간 영향을 미친 요소 중 하나다.

니케아공의회는 알렉산더 주교와 아타나시우스 진영의 승리로 끝났다. 물론 아리우스 진영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고, 그 이후 다른 공의회를 통해 니케아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이 뒤집어지지만, 그래도 니케아공의회가 맺은 결실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의의를 지니는 사건 중 하나였다. 아리우스의 주장과 알렉산더 주교의 주장(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기도 한)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채택된 용어가 있다. 이는 성경이 아닌 그리스철학에서 빌려 온 용어인데, 바로 '우시아'(ousia)였다.

한글을 쓰는 한국인이 고대 그리스에서 매우 논쟁적인 용어였던 '우시아'의 개념과 뉘앙스를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고대 그리스철학, 특히 플라톤 철학을 공부해 본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것인데, 플라톤 철학에서도 '우시아'라는 용어는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동시에 개념의 모호함 때문에 엄청난 논쟁을 불러왔다. '우시아'는 대체로 5가지 개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본질(essence), 본성(substance), 실체(reality), 존재(being), 양태(type)이다. 즉, 우시아는 어떤 개념을 우선 적용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게 하는 용어다.

'우시아'라는 용어에 담긴 복잡성 때문에 '우시아' 개념으로 기독론을 설명하고 기독론을 확정하려던 니케아공의회는 결국 기독교인 사이에 더 큰 논쟁을 불러왔다. 논쟁적 용어를 끌어들여 논쟁을 종식하려 했던 주교들의 패착이었다. 이것은 훗날 그리스어권(Greek)이었던 동방 기독교와 라틴어권(Latin)이었던 서방 기독교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갈라서는 데 영향을 끼친 원인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이었다.

'우시아'라는 논쟁적 그리스어 용어를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기독론의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어떤 관계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예수, 이 둘은 도대체 무슨 관계인가?' 현대 기독교인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지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아마도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만큼 너무도 쉽게 기독교 신앙을 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과 예수가 어떤 관계인지를 아는 것일까?

유대교와 기독교는 공통적으로 유일신관(monotheism)을 따른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런데 유일신관이 기독론을 어렵게 한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데, 어떻게 우리는 예수를 '신'이라 말할 수 있을까?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면, 하나님이 두 분이 되는 것 아닌가? 그러면 유일신론이 아니라 다신론이 되는 것 아닌가? 기독론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독교 신학이고, 기독론에서 출발한 신론은 결국 삼위일체론(the Doctrine of Trinity)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아리우스 기독론을 이단으로 쉽게 정죄하지만, 4세기 당시에는 아리우스 기독론이 훨씬 더 우세했다. 아리우스를 쉽게 정죄하는 것은, 4세기까지의 기독교가 모두 이단이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이전의 기독교 신앙을 너무 쉽게 부정해 버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아리우스는 현대 기독교인보다 훨씬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세비우스도 아리우스 주장을 옳다고 여긴 주교들 중 한 명이었다.

니케아공의회에서 '우시아' 개념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과 예수의 '동일 본질'이었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호모우시우스'(homoousios)라고 부른다. 호모는 '같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우시아'는 본질(essence)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호모우시오스'라는 용어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과 예수가 '동일 본질'이라는 점, 즉, 예수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현대 신앙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지만, 이 문제에 깊게 들어가면 어떤 면에서 예수를 하나님과 같다고 말하는지 명확한 대답을 얻을 수는 없다.

무턱대고 '하나님과 예수는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이다'고 선포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데, 이를 사벨리우스주의라고 부른다. 하나님과 예수가 완전히 동일한 존재가 되어 하나님과 예수 사이의 구분이 없어지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렇게 되면 예수의 인격이라든지, 예수의 존재 자체가 부정된다. 이는 곧바로 영지주의적 생각으로 발전할 수 있고, 예수의 존재는 '하나님'이라는 본질에 완전히 묻혀 버리고 만다. 기독론이 양태론(modalism)으로 빠질 수 있다. 하나님이 예수라는 모드(mode)로 변환되어 이 세상에 나타난 것뿐이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제우스 이야기와 다를 바 없는 신관이다. 제우스가 인간 세계에 나타날 때, 모드를 바꿔서 나타나는 것처럼 된다.

하나님의 우선성과 유일신관(monotheism)을 지키기 위해 아리우스가 '합리적으로' 생각한 기독론은 '종속론'(subordination)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의 존재에 존재론적 차등을 두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그리스철학적인 생각이다. 그리스철학은 모든 만물이 '일자'(God)로부터 나왔다 생각했는데, 이런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존재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God)에게 종속된다. 하지만 아리우스는 여기서 신학적 진술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비록 하나님에게 종속된 존재이지만, 이 피조 세계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를 지니는데, 예수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adoption)된 존재이고,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으로 '고양'(promotion)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리우스도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아리우스는 예수의 신성이 예수 자체의 존재, 또는 예수의 본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신성이 부여됐다고 말한다. 그래서 아리우스 기독론을 '종속론'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과 예수 사이에 확실한 존재의 차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은 그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더 널리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리우스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한 것도 아니고, 예수가 예배를 받으실 합당한 하나님이라는 점을 부정한 것도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아리우스의 신학적 논증을 지지하는 아리우스파와, 아리우스의 생각을 이단적 신학이라고 정죄했던 반아리우스 진영(아타나시우스 진영)의 싸움은 4세기 내내 피 튀기는 전쟁으로 치달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계속해서 이 전쟁에 개입했고, 아리우스 진영의 우세와 열세가 번복됐다. 그 과정에서 아리우스 신학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공의회가 4번이나 열렸으며, 그 때문에 아타나시우스는 5번 유배 생활을 해야만 했다. 공의회가 열릴 때마다 두 진영 사이에서 음모·협박·폭력·죽음이 발생했다. 두 진영 간에 발생한 기독론 논쟁은 결코 평화롭게 진행되거나 정착된 일이 없었다. 엄청난 정치적 술수와 폭력이 개입됐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음과 질문을 던지게 된다. 왜 이들은 이 문제로 죽기 살기로 싸웠을까?

예수는 누구인가를 물으면, 기독교인들은 대개 예수가 누구인지를 규명하는 다음과 같은 용어를 늘어놓을 것이다. △하나님 △왕 △주님 △말씀 △지혜 △빛 △길 △진리 △부활 △목자 △문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Mediator) △우리 신앙의 사도 △인생의 대가 △친구 등…. 모두 예수가 누구인지를 규명하는 아주 '은혜로운' 용어다. 문제는 이 용어들을 깊이 묵상해 보면, 예수가 누구인지를 규명하는 이 용어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예수가 하나님인데 어떻게 중보자(Mediator)가 될 수 있는가? 하나님이면 그냥 하나님이지, 어떻게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중보자가 될 수 있는가? 이렇듯, 우리는 해결하기 쉽지 않은 질문을 안고 있다.

이 질문에 대해 아리우스 논쟁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본 유대인 학자 루벤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통찰을 보여 준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예수가 이 모든 것들을 다 갖추기를 바랐지만, 실제에 있어 니케아신조를 신봉하는 기독교인과 아리우스파 기독교인들 사이의 분열은, 힘 있고 의로운 통치자를 보다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사랑을 고취시키는 친구가 보다 필요했던 사람들 사이의 대략적인 구분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였다." [루벤슈타인,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 194쪽]

루벤슈타인의 진술은 이런 뜻이다. 사람들은 자기 삶의 맥락에서 어떤 신적 이미지가 필요하느냐에 따라 신학을 전유한다.

우리는 대개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싸움을 '진리에 대한 싸움'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종교의 이름으로 싸움터에 나서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욕망을 '진리'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지 않고 진리를 위해 싸운다고 생각한다. 물론 진리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진리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진리를 전유하는 인간들의 방식은 '진실하지' 않다. 인간은 자신의 뜻 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주 쉽게, 자기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삶의 맥락에서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하는 방향으로, 또는 자기 자신의 욕망을 가리는 방향으로, 또는 자기 자신의 죄를 가리는 방식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신학을 선택하게 돼 있다.

내가 보기에 현대 한국 개신교에서 일고 있는 '동성애 반대'도 같은 논리로 전개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 신앙관은 '복음주의'라고 불리는데, 정작 그들은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라고 스스로를 치켜세우면서 현대 복음주의가 어떤 경로를 통해 발흥했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현대 복음주의의 뿌리는 '복음서’'에 있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이 복음주의를 헷갈려 한다. 현대 복음주의의 뿌리는 근대 자본주의에 있다. 근대 자본주의의 기독교화가 바로 현대 복음주의다. 그렇기에 자본주의가 현대사회에 낳고 있는 문제점(병폐)을 한국 개신교가 동일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 복음주의 개신교는 자본주의가 보여 주는 못된 짓들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다. 공간의 점유를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요소가 한국 복음주의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자본주의는 유물론을 근간으로 하는데, 자본주의의 요소를 받아들여 발전한 현대 복음주의 교회는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 유물론적 세계관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교회 성장, 무리한 건축, 선교지 확장 등은 공간 확장을 목표로 삼는, 즉 시장(공간) 확장을 목표로 삼는 자본주의의 특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결과다. 교회 세습도 마찬가지다. 자본의 세습이 문제가 되고 있는 요즘, 한국 복음주의 교회들도 교회 세습을 통해 자본주의의 병폐를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다.

온갖 부정한 일을 저지르면서 자신들의 부정함을 가리려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고 자신들의 의로움을 증명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 복음주의 교회권에서 결사반대하는 '동성애 문제'는, 진리 논쟁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추악한 죄를 가려 보려는 술수에 불과하다. 그들은 '성경은 동성애를 죄라고 한다'고 말하며 성서의 진리를 수호하는 것처럼 자신들을 위장한다. 그러면서 성경에서 죄라고 말하고 있는 다른 모든 죄의 항목을 아무렇지도 않게 범하면서 산다. 그들은 '동성애 문제'를 들고 표면적으로 격렬하게 싸우면서 자신들을 기독교의 진리를 지키는 투사인 것처럼 포장한다. 그들은 죄인이 아니라 진리를 지키는 의인이다. 이렇게 그들은 자기 자신의 추악함을 가린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반드시 의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은 진리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종교적 신념에 갇히면, 자신이 진리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 보면, 그 싸움은 진리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맥락에서 자신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또는 자신의 죄를 가리기 위한 방편으로 진리를 남용(abuse)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리우스 논쟁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많지만, 한 가지만이라도 반드시 배웠으면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진실하게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언제나,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반드시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자기 죄를 가리는 수단이 되거나 자기에게만 이익이 될 뿐이라면,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폭력과 죽음을 불러온다면, 막힌 담을 허무시고 우리 모두에게 평화와 생명을 가져다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불쌍한 한 인간으로 남을 것이다. 예수는 그렇게 불쌍한 한 인간이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시다.

장준식 / 미국 실리콘밸리 세화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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