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구권효 편집국장] 가끔 아무 생각 없이 예전에 제가 썼던 기사들을 찾아봅니다. 읽다 보면 그때 취재하고 기사 쓰며 고민했던 기억이 떠오르는데요. '오 신이시여, 정녕 이 기사를 제가 썼단 말입니까'…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애썼다는 생각이 드는 기사들도 있고, 한편으로는 괜히 썼나 싶을 정도로 아쉬운 기사들도 있습니다. (간혹 오타를 발견하면 몰래 고치기도….)

예전에 썼던 성폭력 기사들을 보면 아슬아슬합니다. '성폭력 보도 가이드라인'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던 시절, 좌충우돌하며 쓴 기억이 납니다. 지금 보면 '피해 사실을 필요 이상으로 구체적으로 묘사한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반성하게 됩니다. 자극적·선정적으로 쓰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그때는 어떤 기사를 쓰더라도 정확히 육하원칙에 맞춰 자세하게 써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직도 이 강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 지금도 쓸 때마다 고민합니다.

최근 남양주 ㄱ그룹홈 사건을 취재하면서, 사건 당사자들이 언론에 대응하며 기자들을 상당히 불신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사건은 이미 9월과 10월 두 방송사에서 보도가 됐는데요. 비판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사실이 아닌 내용이 방송됐다고 억울해했습니다. 언론사들이 애초에 프레임을 짜놓고 접근했다는 것이죠. 자신들 이야기를 그대로 들어 주는 곳도 없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도 언론을 불신하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건 피해자는 미성년자입니다. 그는 취재 당시에도 언론사 관계자들에게 존중받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방송도 자신이 부각되는 방식으로 나올 줄 몰랐다고 합니다. 모자이크와 음성변조도 자신을 아는 사람은 다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며 불편·불쾌해했습니다. 실제로 방송 이후 지인들에게 연락이 오기 시작했고, 그는 더 위축돼 한동안 숨었다고 합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느 정도 이해가 갔습니다. 언론사들이 원하는 '각'에 맞춰 취재·보도하는 관행은 비일비재하니까요. 물론 언론 보도가 당사자 마음에 꼭 맞는 형태로 나오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미성년자가 지나치게 부각되는 방식으로 방송을 제작하면 안 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들어 이야기를 듣는 동안 참 안타까웠습니다.

한국기자협회는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 권고 기준', '성폭력·성희롱 사건 보도 공감 기준 및 실천 요강' 등을 제정해 두고 있습니다. "언론은 성범죄 사건의 이해와 상관없는 범죄의 수법과 과정, 양태, 그리고 수사 과정에서의 현장 검증 등 수사 상황을 지나칠 정도로 상세히 보도하지 않는다", "언론은 미성년자 성범죄 사건을 취재, 보도하는 데 있어 미성년자의 인권에 미칠 영향을 세심히 고려해야 한다", "피해자가 실명 및 얼굴을 공개하거나 직접 피해 사실을 진술하는 방식보다는 피해자를 보호하기에 적합한 보도 방식을 고민하여야 한다"는 조항들이 있습니다.

'권고' 사항이기 때문에 어긴다고 해서 어떤 불이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아직도 많은 언론이 피해 사실을 선정적으로 묘사하고, 그런 내용이 제목으로 달리고, 그런 사진들이 버젓이 게재되는 것이겠죠. 하지만 이 가이드라인은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보도로 인한 2차 피해가 '실제'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언론은 이 가이드라인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성 인지 감수성이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면서, 언론사들의 이런 관행들도 많이 개선되기는 했습니다. 자극적·선정적이기만 한 보도들은 독자들의 비판 대상이 됩니다. 이제 잘 몰라서 그랬다는 말은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뉴스앤조이>도 늦었지만 몇 해 전부터 신입 기자들에게 의무적으로 성폭력 보도 가이드라인을 교육합니다. 제가 했던 실수들을 반복하지 않도록 말이죠.

가이드라인이 만병통치약은 아닙니다. 개개의 사건은 각각 복잡한 맥락에 있으니, 어떤 단일한 기준을 일괄적으로 적용하기란 현실적으로 힘듭니다. 취재하기 전 미리 공부하고, 보도할 때 고민하고 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노력하겠다'는 뻔한 결론이지만, 말로만 그치지는 않겠습니다. 그래서 몇 년 후 다시 찾아보더라도 좀 덜 부끄러운, 적어도 '그때 이런 고민을 했지'라는 흔적이 보이는 기사가 됐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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