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
하나님의 신음 소리,
예수의 탄식 소리를 듣고 있는가

2020년은 참으로 심각한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이다. 이때는 근본적 변화와 본질적 패러다임 전환을 촉구하는 하나님의 신음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결단의 시간이다. 이 소리는 기독교인만이 들어야 할 소리가 아니다. 전 세계 정치 지도자와 지식인에게 던지는 하나님의 진노하는 음성이기도 하다. 특히 기독교 신학자와 교회 지도자는 천둥 같은 하나님의 경고 소리를 들어야 한다. 신학이란 원래 인간의 부당한 고통 현장에서 자라는 나무요, 향기 나는 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억울한 고통이 켜켜이 쌓이는 역사 현실 속에서 하나님은 분주하게 일하신다. 그 속에서 터져 나오는 미세한 하나님의 신음 소리를 듣고, 그 뜻을 제대로 밝혀내는 일이 바로 신학자와 예수 따르미(Jesus-follower)가 먼저 감당해야 할 몫이다.

한국 신학은 우리 민족과 민중이 처절한 고난 현장에서 어떻게 헌신적으로 노력했는지 살펴야 한다. 지난 100여 년간 우리 민족과 민중이 겪었던 억울한 고통의 현실을 신학적으로 탐구해 신학적·신앙적 담론을 샘솟듯 쏟아 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감동과 울림을 주는 한국적 신학이 태동할 것이다. 한국 신학은 코로나19로 불안에 떨고 있는 이들, 특히 지극히 작고 고통당하는 민중들과 동고同苦하며 신음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그 미세한 탄식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절대 초월자 하나님이 인간 몸을 지니고 구체적 고통 현장으로 오셨다는 성육신의 깊은 뜻을 새로이 헤아려야 한다. 성육하시되 가장 억울한 민족과 민중의 삶 속으로 내려와 그들과 함께 아파하면서, 그들을 해방하는 메시아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한다. 더 나아가 '역사의 예수'뿐 아니라 '부활의 그리스도'가 행한 따뜻한 치유 속에서도 비움(kenosis)을 실천한 예수를 만나고 기뻐해야 한다.

한국 역사 속에서 확인해야 할
억울한 민족 고통과 민중 고통

2019년은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다. 100년 전을 살펴보면, 우리 민족과 민중이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잔인한 통치에 맞서 어떻게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대응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지난날 끊임없이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복음을 실천하는 감동적인 모습을 보여 줬다. 그 울림은 일제의 군사적 폭력성이 잔인했던 것만큼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당시 세계 강대국이 제국주의적 강점强占과 침탈에 혈안이 돼 약소국 민족과 민중을 무자비하게 착취·억압·능멸했던 사실에 비춰 보면, 그들의 저항은 더욱 복음적으로 다가온다.

청일전쟁·러일전쟁에서 잇달아 승리한 일본 제국주의는 서방 백인 국가들보다 더 위선적이고 위압적으로 한반도를 강점했고, 우리 민족과 전쟁하듯 헌병을 앞세워 총체적 탄압을 가해 왔다. 그때 우리는 최초의 동양 패권 국가로 등장한 일본에게 부당하게 고통받았다. 강점 10년 만에 우리 민족과 민중은 3·1 운동을 일으켰다. 일관성 있는 비폭력 평화 시위를 통해 우리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온몸으로 주장해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20세기 초 우리 조상들은 살신성인 정신으로 적극 저항해, 패권 국가 권력의 위선과 폭력성을 만천하에 폭로했다. 우리 민족은 1919년에 이미 선진적  문화민족이자 평화 애호 민족임을 세계에 드러내 보였다.

2020년은 이른바 '해방' 75주년을 맞는 해다. 이 해방은 가슴 아프게도 민족 분단과 동족상잔의 씨앗을 뿌린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2020년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우리는 1945년 8월 15일이 진정한 해방의 날이 아님을 기억하고 분노해야 한다. 강점·착취의 36년 고통이 치유되지 않은 채, 우리 민족과 민중은 강점의 고통보다 더 아프고 억울한 민족 분단의 고통으로 빠져들었다. 그러기에 민족·민중의 고통이라는 엄연한 현실의 의미를, 한국교회 지도자·신학자들이 먼저 성찰하며, 새로운 각오로 신학 작업과 신앙각성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고통이 있는 곳에는 마땅히 신학적 성찰이 있어야 하고, 억울한 민족 고통과 민중 고통이 있는 곳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탄식 소리에 반드시 응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신학자들은 우리가 당한 고통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예수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새롭게 확인하고 전달해야 한다. 신학자들은 구조악 속에서 억울하게 내몰린 이들의 아픔, 지극히 작은 이들의 고통에 뜨겁게 공감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탄식 소리, 예수의 예언자적 질타를 들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 지도자·신학자들의 임무가 아니겠는가.

일제강점기 36년이 언뜻 보기에는 이미 오래전에 끝난 민족의 비극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늘까지도 친일·냉전 세력이 정치 주류 세력으로 남아 자유·평등·인권·정의·평화·복지를 지속적으로 훼손·파괴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60년 전 4·19 의거가, 40년 전 광주 민주화 운동이 활화산처럼 터져 나온 것이다. 한국 신학자들, 특히 윤리신학자들은 이 사건들을 신학적 성찰 대상으로 삼고, 지극히 작은 자와 꼴찌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앞장서야 한다.

나는 모든 후발 운동의 원류인 3·1 운동의 의미를 새롭게 살펴보고 해방·광복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 4·19 60주년, 광주 민주화 운동 40주년의 의미를 한국 기독교윤리학자들이 다시 성찰할 것을 촉구한다.

3·1 운동, 해방 광복 사건, 한국전쟁,
4·19, 광주 항쟁에 대한 신학적 성찰

1919년 서구 국가들은 사회진화론적 확신으로 약육강식의 국가정책을 잔인하게 실행하고 있었다. 강대국은 적자適者이기에 비적자인 약소국을 침략·강점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여겼다. 이때 백인 선진국의 주류 종교가 기독교였다. 제국주의 침략에 발맞춰 서구 교회들은 해외 선교 열풍을 진작했다. 국가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 교회 제국주의를 해외 선교라는 미명 아래 추진했다. 슈바이처가 신학 탐구를 일시 중단하고 아프리카로 의료 선교를 떠나기로 결단한 것도 당시 서구 백인 국가들이 기독교가 묵인한 사회진화론적 침략·수탈 정책을 자행한 데서 비롯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진화론의 약육강식 정책은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리라 외쳤던 이사야 같은 예언자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위와 같이 3·1 운동이 터져 나온 당시 세계에는 폭력이 만연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국가 간 벌어진 침략·강점 경쟁에서 비롯한 참화였다. 그들은 온갖 첨단 신무기를 동원해 반인륜적 세계대전을 치렀다. 이 전쟁이 끝난 뒤, 전승국들은 패전국 식민지를 분점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를 열었다. 우리는 이 회의와 3·1 운동 간의 관계에도 주목해야 한다. 당시 청년이었던 몽양 여운형과 우사 김규식은 폭력으로 병들어 가는 세계에 3·1 운동 정신을 알리고, 우리 민족 독립의 절박성을 당시 패권 국가들의 대표자들에게 직접 호소하려 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는 같은 해양 대국 미국과 내밀한 공조(가쓰라태프트협정)로 한반도를 손쉽게 강점할 수 있었다. 1910년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일제는 잔인한 폭력 통치를 감행했다. 큰 고통 속에서 10년을 버틴 우리 민족은 1919년 3월 초하루 마침내 전국적 저항에 나섰다. 계급·지역·종교·세대·성별 차이를 뛰어넘어 민족적 저항운동을 펼쳤다. 3·1 운동은 철저하게 비폭력 평화 정신으로 폭력 세력인 일제에 맞섰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거대한 울림을 줬다. 우리 후손들, 특히 예수 따르미들은 이 점을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기념해야 한다.

3·1 운동의 울림은 국내외로 번져 나갔다. 유관순을 주목해 보자. 그는 17세에 이화학당과 정동교회를 다니면서 현순 목사와 손정도 목사의 설교에 직·간접으로 감명을 받았다. 당시 적지 않은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억울하게 나라를 빼앗긴 슬픔 속에서 나라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함께 묶어 복음의 본질로 설파했다. 애신愛神은 곧 애국愛國이며, 폭력으로 나라를 빼앗긴 슬픔에서 나오는 애국심은 망국의 슬픔으로 아파하는 백성을 위로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고 가르쳤다. 이 사랑은 트럼프가 말하는 'MAGA'(Make America Great Again)와 같은 가해자 중심 애국심과는 차원이 다르다. 오히려 이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아가는 히브리 민족 아픔에 동참하는 사랑이었다.

17세 소녀 유관순은 자신을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이 폭력으로 빼앗긴 조국을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의 마음은 곧 하나님 마음이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성조기와 태극기를 함께 흔들며 한국교회와 한국 사회를 뒤흔든 태극기 부대는 유관순을 또 다시 욕보이고 슬프게 한다. 태극기 부대를 응원했던 한국교회 지도자 상당수는  3·1 운동의 감동적 울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스스로 자백한 셈이다.

유관순의 마음을 태극기 부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을 부추긴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동고심同苦心으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을 이해할 수 없다. 이제 한국 기독교윤리학자들은 절박성을 온 존재로 느껴야 한다. 한국 민족의 구체적 아픔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선교 활동과 주권 회복 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3·1 운동을 이끌었던 지도부를 보면 많은 교회지도자가 중심 역할을 했다. 그들은 한국적 출애굽 운동에 몸을 던졌다. 이상재·안창호·손정도·현순·김구·김규식·여운형 등이 눈에 띈다. 그들의 신앙은 관념적·추상적 인식이 아니었다. 살신성인·성육신, 자기 비움의 신앙적 실천에 온 존재와 삶을 던진 예언자적 행동이었다.

1919년 5월 4일, 3·1 운동의 울림은 북경대 학생들이 반제국주의 운동에 뛰어들게 하는 힘으로 작동했다. 그들은 일제가 오래전부터 중국 대륙 침략을 노리면서 한반도를 교량으로 삼았던 사실을 기억했다. 3·1 운동이 한반도 전역으로 퍼지며 전 민중적 저항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고, 중국 대학생으로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오체투지 뉘우침 고행 기도를 실천했다. 3·1 운동은 당시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추진한 간디의 비폭력 운동에도 큰 자극을 줬다. 간디의 수제자 네루의 옥중서신을 보면, 유관순 나이의 자기 딸에게 3·1 운동을 알리며 그 감동을 딸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써 있다. 또 파리강화회의에서 만난 김규식 선생이 프랑스로부터 해방운동을 추진한 베트남 청년 호치민에게 3·1 운동의 울림을 전한 사실이 최근에야 밝혀지기도 했다.

3·1 운동 정신은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참패한 후 비극적으로 굴절·왜곡·축소됐다. 일본의 패망으로 미군정시대를 거쳐 집권한 이승만 정부는 3·1 운동 정신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들을 소외시켰다. 게다가 친일 관료·부역자를 대거 중용해 3·1 운동 정신과 민주주의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친일 세력은 분단의 비극을 악용하며 정부 비판 세력을 친북·친공 세력으로 규정해 탄압했다. 이런 비극적 상황에서 3·1 운동의 동력은 민주화 인권 운동과 평화통일 및 정의 운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놀라운 역사적 연결이다.

분단 상황에서 남북 간 벌어진 열전과 냉전은 우리 민족·민중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를 안겨 줬다. 그 상흔이 우리 제도·관행·의식·정서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 왔다. 게다가 친일·반공 세력은 제1공화국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정치 지형을 주도적으로 왜곡해 왔다.

이런 주류 정치 세력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 노동운동, 인권 운동, 여성운동, 환경 운동과 평화통일운동이 오늘까지 쉼 없이 지속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 민중의 아픔은 친일 냉전 권력 때문에 더욱 깊어지고 민족 고통도 분단 고착으로 더욱 심화했다. 4·19, 한일 협정 반대, 6월 민주 항쟁, 광주 민주화 운동 그리고 촛불 시민 혁명 등은 3·1 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민족 고통과 민중 고통을 극복하고 나라의 평화와 민주화를 위해 터져 나왔다. 억울하고 부당한 현실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려는 아래로부터의 시민 변혁 운동이 살신성인 정신의 힘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이것은 샬롬의 하나님이 친히 이끄신 운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한국 신학자, 특히 기독교윤리학자들이 하나님 주권과 사랑에 기초한 평화와 공의의 새 질서를 세우기 위해 예언자처럼 외치며 앞장설 때다.

예수의 원수 사랑과
코로나19 이후 한국교회가 할 일

예수의 원수 사랑은 매우 급진적 명령이다. 이 명령이 갖는 복음의 급진성을 주목해야 한다. 이 문제에 관련해 존 도미닉 크로산이 강조한 윤리적 종말론(Ethical eschatology)을 잠시 언급하려 한다. 크로산은 유대교 신은 폭력의 신이고, 기독교 신은 사랑의 신이라는 이분법적 이해가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모두 폭력적 신과 비폭력적 신을 함께 강조해서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그 신과 신의 백성이 당시 패권 국가의 폭력적 억압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크로산은 순교적 적극 저항으로 강대국에 용기 있게 맞선 마카비 운동에 주목했다.

이를 우리 역사에 적용해 본다면, 유관순식 저항은 폭력적 패권 국가 일본에 대한 순교적 저항 또는 살신성인적 비폭력 저항이었다. 순교적 적극 저항은 결코 저항자의 약함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종의 선제적 원수 사랑의 실천에서 나온 강력한 저항으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비전에도 분명히 나타나는 용기 있는 선택이다. 나는 이를 악한 가해자의 발악發惡에 대한 피해자의 발선發善의 대응이라고 명명한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예수의 선택(롬 12:21)이야말로 구조악에 대응하는 발선이다. 증오의 힘으로는 결코 악한 세력을 이길 수 없다. 악을 악으로 이기는 일은 진정한 이김이 아니라 악의 졸개로 전락하는 실패의 본보기일 뿐이다.

조국 분단 이후 남북 관계를 악화시켜야만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친일 냉전 지배 세력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를 널리 알리고 깊이 깨우쳐야 한다. 기독교 민주 인권 세력은 남북의 비극적이고 적대적인 공생 관계를 악용해 반민주적 독재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국가 폭력에 끊임없이 저항한 세상의 빛과 소금이었다. 우리는 이 역사적 사실을 적극적으로 재평가해야 한다.

한국 신학자들은 21세기 한반도 주변국이 어떻게 다니엘 꿈에 나타난 여러 괴수처럼 우리 역사에 관여하려 하는지 면밀하게 성찰하고, 그 괴수적 행태를 복음의 관점으로 용기 있게 밝혀내야 한다. 먼저 우리민족이 전범국이 아님에도 어떻게 국토 분단의 징벌을 받게 됐는지 질문하고 그 부당함을 외쳐야 한다.

독일이 분단된 것은 히틀러의 반인륜적인 범죄를 승전국들이 올곧게 묻고 그에 상응하는 정의로운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36년간 우리를 잔인하게 강점 통치했던 일본은 통일 국가를 유지하고, 나아가 경제 대국으로까지 성장했는데, 왜 억울하게 고통받은 한반도는 분단이라는 부당한 징벌 조치를 당했는지 한국 지식인들이 솔선하여 당당히 따지고 물어야 한다. 이는 국제 정치적 질문일 뿐 아니라 신학적 질문이자 신앙적 저항이기도 하다. 일본을 크게 키워 또 다른 패권 국가로 떠오르는 소련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세계 지배 전략과 맞아떨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후유증으로 미국에서는 매카시즘이 광란적 냉전 공포정치를 펼쳤으나 몇년 후 곧 사라졌다. 그런데 한국 매카시즘 정치는 지난 70년 간 지속돼 왔다.한국 지식인들은 이 비극적 사실을 널리 알려야 한다. 한국 신학자들은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며, 복음의 본질에 부합하는지 진지하게 성찰하고 따져야 한다. 아직도 한국교회 안에서 펼쳐지는 매카시즘적 공세에 교회 지도자·신학자들이 계속 침묵해도 좋은지 회개하는 심정으로 성찰해야 한다. 

나는 예수 당시 거리사 지역 정신병 환자의 자해가 억압적인 강대국 '귀신'의 폭력이라고 해석한다. 오늘날 이런 불쌍한 존재들이 한국교회 안팎에도 있다고 한다면, 신학자들은 마땅히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 그 악령을 돼지 떼에게 전가하는 처사는 21세기 상황에서는 동물 학대이자 타인의 재산을 파괴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바이러스를 유발하는 어리석은 짓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주는 충격 앞에 한국교회와 한국 신학계가 내놓아야 할 대안은 무엇일까. 첫째, 창조주는 6일 창조 작업을 마치고 매우 만족하셨다. "매우 좋구나" 하고 감탄하셨다.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식물을 먹거리로 주셨기 때문이다. 식물은 놀라운 특징을 지닌다. 다른 생명체에게 먹히지만 그 생명은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왕성하게 자라고 번진다. 땅에는 식물이 자라게 하는 영양소가 무진장으로 저장돼 있다. 이것은 창조의 신비다. 더 중요한 특징은 풀과 열매를 주식으로 먹는 생명체들 간에는 먹거리 때문에 결사적으로 다투는 일이 없다는 점이다. 힘센 코끼리가 약한 토끼나 다람쥐와 먹거리를 놓고 살벌한 경쟁을 하지 않는다. 서로 친구·가족처럼 함께 식물을 나눠 먹는다. 생명체의 몸집·힘의 크기와 관계없이 공생하며 다른 생명체를 존중하며 공동 식사를 하기에 그곳에는 샬롬이 이슬처럼 내리고, 분배적 정의의 따스함이 강물처럼 흐른다. 그와 같은 평화스러운 생태계를 친히 확인하고 창조주가 감탄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창조질서가 인간의 악함으로 깨졌다. '악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하는 질문은 신학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신학적 응답이 나와야 한다. 사회과학자 제임스 스콧은 저서 <농경의 배신>을 통해 이 문제에 응답했다. 농경문화에서 인류 문명이 탄생했다면 이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스콧은 이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해석한다. 그는 인류 문명이 농경으로 가능했다손치더라도 이는 인간을 길들이려는 권력 주체의 사기적 사건이라고 한다. 영어 'civilization'(문명)이나 'culture'(문화)는 모두 땅을 기경하는 작업과 연관된다. 이를 통제하는 주체는 국가 권력이다. 국가의 전일적 통제가 땅을 길들이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자연의 풀과 열매를 직접 음식으로 따먹는 그 모습을 보고 감탄하셨다는 창조 설화의 메시지는 무슨 의미를 지닐까. 21세기는 환경오염과 기후변화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그렇기에 오늘날 인류에게 창조주의 감탄은 매우 깊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스콧은 중앙집권화·상품화한 인류가 자연의 비극을 극복하려면 신자유주의적·산업자본주의적 삶을 근본적으로 변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연은 인간에게 길들여지는 대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은 환경을 파괴하지 않고 자연을 이웃으로 존중하는 새로운 문화와 사회구조를 만들어 가야 한다. 권력도 끊임없이 자연과 인간을 함께 길들이려는 탐욕에서 해방돼야 한다.

코로나19는 자연을 길들이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확신해 온 인간에게 근본적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자연을 길들이거나 파괴해 온 반자연 정책을 되돌아보며 자연과 인간 간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한다. 인간 중심 자연관은 이제 자연 존중 자연관으로 변해야 한다. 특히 예수 따르미들은 자연이 우리 이웃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신음 소리가 감탄의 찬사로 바뀌게 해야 한다.

자연 파괴로 삶의 터전을 잃은 야생동물들은 먹거리를 찾아 인간 거주지에 침입한다. 이 과정에서 야생동물을 숙주로 삼았던 병균이 인간을 숙주로 삼게 됐다. 코로나19의 전파력과 치사율이 이전의 인플루엔자바이러스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면, 앞으로 자연 훼손은 더 큰 재앙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혹자는 코로나19가 인간 종말의 불길한 징조라며 걱정한다. 이전에는 핵전쟁으로 인간이 멸종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바이러스가 인류 멸망의 위험일지 모른다고 두려워하게 됐다. 우리는 핵 억제력 확보보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억제력 확보가 더 어렵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바이러스의 변이 능력은 비상하기 때문이다. 인류가 코로나19를 이길 백신을 개발한다고 해도 바이러스가 백신을 격파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면, 핵전쟁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영리하고, 무서운 바이러스 전쟁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이 '새로운 정상성'이 될까 두렵다.

둘째로, 창조주의 탄식을 유발시킨 적자 세력의 갑질 행위를 종식하는 일에 예수 따르미들이 모범적으로 앞장서야 한다. 원초적 창조질서의 샬롬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간절하게 꿈꿨던 이사야의 비전에 주목해야 한다. 이사야 11장 5-11절을 보면 매우 감동적인 새 질서가 등장한다.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죽여 먹지 않고, 식물을 함께 나눠 먹는는 매우 감동적 장면이다. 만일 육식동물 중 최강 적자인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면(이사야 11장 9절) 그때 비로소 창조질서는 원래 아름다운 모습이 될 것이다. 창조주를 감탄케 했던 감동적인 공생의 모습이 되살아날 것이다. 그때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들의 새끼들이 애인처럼 함께 눕게 될 것이고, 젖 먹는 아이가 독사와 악수하며 평화롭게 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글의 갑이 정글의 을과 가족처럼 상생하는 새 질서의 하나님나라가 아니겠는가!

셋째로, 우리가 자연을 이웃이자 벗으로 존중하는 새로운 문화를 주류 문화로 만들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기후변화와 천재지변도 관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을 길들여야 한다는 개발 중심적 사고를 버리고, 기후변화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트럼프식 사고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넷째, 트럼프식 패권주의와 인종주의 정책과 결탁하면서 21세기판 십자군 전쟁을 부추기는 듯하는 오늘날 미국 정부의 정책을 예수 따르미들은 반복음적 폭력으로 규정하고 거부해야 한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한미 동맹의 우산 아래서 성서를 높이 들고 십자군식 탄압을 주도하는 트럼프식 인종주의 정책을 단호하게 배격해야 한다.

나가며 :
불트만과 슈바이처를
60년 만에 다시 읽고 느낀 소회

대학에서 당시 세계적 성서신학자로 알려진 루돌프 불트만의 책을 힘겹게 읽었다. 그때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 초대교회의 실존적 상황과 개인의 실존적 처지에서 복음서를 읽어야 한다는 그의 입장은 어느 정도 이해할 듯 했다. 그런데 왜 비신화 또는 탈신화해야 복음서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지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60년이 지난 지금 새롭게 읽어 보았다. 지금에야 비로소 '아하,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성서 해석이 일종의 가현설적 한계에 갇혀 있었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가 당시 독일 전체주의의 악마적 현실을 가볍게 여겼다고 생각했다. 그가 히틀러의 악마적 정치 앞에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성서 연구 방법론에서 비롯된 결과임을 깨달았다. 침묵을 지켰던 스승 불트만에게 불만을 가진 제자들이 1950년대에 와서 비로소 역사적 예수 탐구를 다시 시작한 일을 이제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왜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친일·냉전 세력에 동조하고 분단을 고착화하는 이가 적지 않은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혹시나 가현설적 신앙·신학에 빠져 있기 때문은 아닐까. 100년 전 3·1 운동 정신으로 빼앗긴 조국을 되찾으려 했던 믿음의 선배들, 몽양, 우사, 도산, 백범, 해석(손정도)의 헌신에 경의를 표한다. 3·1 운동의 비폭력 평화 정신이 원류가 되어 온갖 민주화 운동, 평화운동, 인권 운동, 환경 운동에 예수 따르미들이 헌신적으로 참여해 온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1950년 중반에 감명 깊게 읽은 또 다른 책은 슈바이처의 자서전과 역사적 예수 탐구에 관한 책이었다. 이 책도 60년 만에 다시 읽으니 깨닫는 바가 크다. '윤리적 종말론'의 현대적 적합성, 다시 말해 구조악이 정치·사회·경제적 적자適者에 의해 정당화되는 상황에서 윤리적 종말론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비폭력 저항에 영감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3·1 운동을 비롯해 2017년의 촛불 시민 혁명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 비폭력 평화운동을 이해하는 데도 윤리적 종말론은 매우 적절하다.

윤리적 종말론은 역사에서 부당하게 피해를 입은 민족에게 끊임없이 감동적 울림을 주는 순교자적 희생과 헌신을 부각한다. 일제강점기에 순교자적 삶을 살았던 선배 그리스도인의 삶은 흠모할 만하다. 몽양·우사 등의 살신성인적 삶은 오늘날 예수 따르미들에게 좋은 길잡이다. 몽양은 승동교회 조사였고, 우사는 새문안교회 장로였다. 지금 두 교회는 과연 몽양의 신앙과  우사의 신학을 계승·유지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만일 2020년 몽양이 승동교회에, 우사가 새문안교회에 다시 온다면, 그들이 과연 뜨거운 환영을 받을 수 있을 것지를 염려된다.

슈바이처는 예수가 최후의만찬에서 강조한 것은 사사화·추상화한 속죄론이 아니라고 했다.폭력적이고 위선적인 권력에 의해 죽임당하는 길을 스스로 선택한 순교자적 결단을 제자들만은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고 했다. 성만찬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던진 메시지가 특히 속죄론 교리가 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지나치게 정신화·보편화한 나머지, 예수의 속뜻을 왜곡한 것은 아닐까.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는 죄를 구조악에서 분리하고 개인의 일탈 행위만을 죄악의 본질로 부각해 온 것은 아닐까. 구조악은 이 같은 죄악의 사사화·정신화를 통해 악에 대한 저항 동력을 감퇴시키고 비폭력 평화 저항의 길을 좁게 만들지 않았는가. 일탈 행위만을 죄로 보는 교회는 구조악의 사탄적 활동 범위를 넓혀 주고 중립이라는 미명하에 침묵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종교 기득권의 행태는 결국 악을 방조하게 된다. 이것이 개인 속죄론의 역기능 아닐까.

코로나19 이후 시대를 맞아 우리 신앙·신학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창조주의 탄식 소리 대신 감탄의 음성이 들려와야 한다. 하나님은 선하시기에 죄악 덩어리인 인간이 될 수 없다는 반성육신적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수가 겟세마네에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한 당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늘날 깊이 되새겨야 한다. 예수가 말한 시험은 폭력으로 악을 이기려고 몰래 칼을 품고 있던 베드로가 빠진 시험 아니겠는가. 폭력을 폭력으로 이기려 했던 유혹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칼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님의 준엄한 경고가 나오게 된 것 아닌가. 우리는 오늘날 이 말씀이 감동적 울림으로 번지게 해야 한다.

한완상 / 전 통일부총리, 새길교회 신학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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