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성령으로 가득하여 요단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그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그 기간이 다하였을 때에는 시장하셨다. 악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은 빵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그랬더니 악마는 예수를 높은 데로 이끌고 가서, 순식간에 세계 모든 나라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서 악마는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 이것은 나에게 넘어온 것이니,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준다. 그러므로 네가 내 앞에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그래서 악마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해서,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다' 하였고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였다.' 악마는 모든 시험을 끝마치고 물러가서, 어느 때가 되기까지 예수에게서 떠나 있었다(누가복음서 4:1-13)."

저는 왜 갈릴리 청년 예수가 광야로 갔을까를 일찍이 성찰해 보고 싶었습니다. 거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너무나 쉽게, 너무나 시끄럽게 하나님을 입에 올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술적 하나님 불러내기가 저를 몹시 괴롭혔습니다. 광야로 달려가 사탄과 사투하며 예수가 그곳에서 확인했던 하나님과 한국교회의 신자들이 불러내는 하나님이 너무 다른 것 같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예수를 유혹했던 마귀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교묘하고 음흉하지만 퍽 효과적으로 가짜 뉴스를 마음 놓고 생산·유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 밤낮 심각하게 사탄과 논쟁하며 확인했던 하나님의 모습은 당시 유대 율법주의의 하나님과 달랐고, 당시 세계 패권 국가인 로마의 신과도 확연히 달랐으며, 지금 한국교회 안에서 부각되는 하나님과도 매우 다릅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가 하나님 찾기, 하나님 뜻 확인하기, 그리고 자기 정체성 찾기를 위해 조용히, 그러나 경결하게 광야로 달려갔다고 생각합니다.

갈릴리 청년 예수가 광야의 시험과 시련을 겪으면서 비로소 사인私人에서 공인公人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먼저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인으로 살아온 예수가 공인으로 질적 향상하게 된 계기가 바로 광야의 시련이라면,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광야의 시험과 유혹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는 이 시련과 유혹을 거쳐 비로소 그의 공생애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시련과 유혹을 통해 그의 하나님나라 운동이 비로소 시동을 걸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기야 예수가 범상치 않은 존재임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드러난 것 같습니다. 예수 자신도 그것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모친 마리아의 신비로운 눈빛이나 부친 요셉의 과묵함과 정중함에서 어린 예수는 그 자신의 비범함을 알아차렸습니다. 때때로 자기 존재 속에서 꿈틀거리는 카리스마의 요동 소리도 듣곤 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가 그의 동갑내기 친척 요한의 소식을 들으며, 그의 속에는 하나님 찾기와 자기 찾기의 거룩한 충동이 꿈틀거리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요한은 "회개하라!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고 광야에서 외치면서, 요단강에서 자기 변혁과 사회변혁을 함께 세례 운동으로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많은 민중과 적지 않은 엘리트가 그곳으로 몰려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듣고 청년 예수도 조용히 자리를 박차고 요단강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사촌 형제 같은 세례 요한은 매우 놀란 눈빛으로 그를 따뜻하고 정중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 강에서 놀라운 '사건'이 터져 나옵니다. 예수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열리는 듯하더니,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형상으로 나타나고 놀라운 메시지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누가복음서 3:22)."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세례 요한도 놀랐습니다. 정말 놀랐던 사람은 갈릴리 청년 예수 자신이었습니다. 놀랄 뿐만 아니라, 매우 당황스러웠고 또한 몹시 겁도 났습니다. 예수는 왜 겁이 났을까요?

당시 로마 지배 체제는 매우 강고한 세계적 패권 체제였습니다. 공화제에서 황제의 절대 권력 체제로 이동한 지 상당 시간 지난 때였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신적 권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황제는 적어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신학도 단단하게 구축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로마 지배 체제의 한낱 식민지로 떨어져 있던 유대 사회에서의 식민지 권력은 로마 패권 권력의 하부 조직에 불과했습니다. 청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호명된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로마 황제 숭배 체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자가 나타났다는 뜻이 됩니다. 바로, 누구든지 황제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로마 형법에 의해 무자비하게 십자가 처형을 당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유대 토착 식민 정부였던 헤롯 왕가도 황제 권위에 도전하는 인물은 한사코 제거하려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 세력도 스스로 하나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자를 대번에 신성 모독 죄로 몰아 돌로 쳐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갈릴리 청년 예수가 성령의 선포로 하나님의 아들로 알려지게 되었으니, 당황의 수준을 넘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의 실존적 고뇌와 역사적 고민이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청년이 두려워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그 자신의 비범함을 어릴 때부터 눈치챈 예수였기에, 이것을 아바(Abba) 하나님의 호명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거룩하고 지엄한 소명으로 믿어, 한편 속으로는 뿌듯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처럼 갈등하는 그의 마음속에는 이 번민을 이겨 내고자 하는 거룩한 충동 또한 강하게 솟구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실존적 고뇌와 역사적 고민은 짙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름 앞에 사인私人 예수는 공인公人 예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마침내 갈릴리 청년은 공인으로서 하나님나라 운동이라는 공공적 운동에, 공공적이기에 감동적인 변혁 운동에 자신의 온 존재를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서는 예수가 성령 충만하여 요단강에서 돌아왔고 이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갔다고 증언합니다(누가복음서 4:1-2). 그곳에서 40일 밤낮 단식하며 하나님 뜻 확인하기와 자기 정체성 찾기에 열중했던 것입니다. 일종의 영적 사투였고, 정치·사회적 몸부림이기도 했습니다. 40일 밤낮 굶주린 후 그가 매우 시장했다고 느꼈을 바로 그때에 사탄이 접근했습니다. 청년이 기진맥진한 실존적 상황에서 사탄이 그에게 접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절하기 힘든 유혹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탄의 유혹을 살펴보면서, 청년 예수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의미 있게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우선 우리는 예수에게 슬그머니 접근해 왔던 사탄을 뱀과 같은 징그러운 짐승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머리에 무시무시한 뿔을 달고 붉은 얼굴로 위협하는 괴물과 같은 귀신으로 보아서도 안 됩니다. 원래 악마는 위장술과 변신술에 뛰어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사탄은 매우 유혹적인, 그리고 매력적인 말솜씨와 논리, 그리고 매너를 보여 주었을 것입니다. 저는 사탄의 본질이 패권 권력의 이데올로그(Ideologue), 곧 권력 옹호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악마적 패권 권력을 무조건 찬양하고 그 권력을 숭모하게 만드는 힘이 바로 사탄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히틀러 권력을 비호하면서, 영광스럽게 포장하여 널리, 깊이 전달했던 히틀러의 이데올로그였던 괴벨스와 같은 존재가 바로 예수를 유혹했던 사탄이었습니다. 이렇듯, 사탄은 매우 세련된 논리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첫 번째 유혹은 그 흔한 돌을 소중한 떡(재화)으로 바꿔 보라고 했습니다. 몹시 시장했던 청년 예수에게도 매우 절박한 요구, 그리고 '정당한' 요구처럼 들렸습니다. 언뜻 보기엔 마귀가 민생 경제를 몹시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기야 당시 팔레스타인 상황에서도 경제적 양극화가 극심했습니다. 빚진 자들의 신음 소리가 하늘에 닿을 정도였습니다. 극빈자들의 정당한 불평 소리는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정직한 종교 지도자들도 빚진 자의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빚진 자를 일정 시기에 빚의 멍에에서 해방해 주는 희년의 절박성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예언자들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러기에 사탄의 이 요구도 당연한 대중추수주의적 요구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포퓰리즘(populism)이 갖는 호소력을 지닌 요구였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아들로 호명된 젊은이라면, 마땅히 존중해 주어야 할 시대적 과제이기도 했습니다. 정말 사탄은 매우 교활하게, 적절하고 절박한 민중적 요구를 청년 예수에게 던졌던 것입니다. 예수가 덥석 받으리라고 확신하면서, 동시에 비루한 미소를 은근히 흘리면서 자신 있게 예수를 유혹한 것입니다.

과연 예수는 어떻게 했을까요? 예수는 다음과 같이 단호하고 간명하게 대응했습니다. "사람은 만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이 예수의 선언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떡만으로'라는 프레임은 매우 이데올로기답습니다. 빚의 탕감과 굶주림에서의 해방은 매우 중요하고 절박한 구조적 처방임에 틀림없습니다. 허나, 만으로 모든 인간 문제, 사회 정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프레임이기도 합니다. 이 주장은 자칫 무시무시한 전체주의로 이끌고 갈 수도 있음을 청년 예수는 꿰뚫어 보고 경고한 것입니다. 가난의 극복을 집단적 신화의 수준으로 격상해 총체적인 정치적 압박을 도모했던 전체주의적 움직임이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떡이 인간 삶에 매우 필요한 자원이긴 하지만, '떡만으로'라는 프레임은 떡 못지않게 중요한 다른 문제들을 철저히 무시하는 전체주의적 정치를 호출해 내고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음을 청년 예수는 날카롭게 지적한 것입니다. 사탄이 이데올로그 과용자라면 청년 예수는 이데올로기의 창조적 해체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젊은 청년 예수의 분별력 있고 단호한 대응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사탄은 예수의 날카로운 대응 앞에서, 유혹의 꼬리를 슬그머니 내리고 두 번째 시험으로 다시 유혹합니다.

마귀는 예수를 높은 역사 전망대로 데려갔습니다. 그곳에서 한때 세계를 다스렸던 강대국들의 화려한 모습을 한순간에 보여 주었습니다. 패권 갑질 행위자들이 누렸던 온갖 달콤한 특권들, 풍요로운 안락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였습니다. 패권의 그 위풍당당함도 보여 주었습니다. 특히 팍스로마나의 거짓 평화의 화려한 겉모습과 거짓 번영의 찬란한 외피를 드러내 보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놀랍게도 사탄의 정직한 고백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탄은 이 모든 권력과 특권은 자기 소유물이어서 자기가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정말 이 사탄은 정직하게 말했습니다. 교활하게 숨기지 않고 말입니다. 이것은 세계 역사가 증명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기도 합니다. 모든 제국주의 패권 권력은 악마적이었습니다. 약소국들을 강점·착취·억압·차별하여 엄청난 고통을 약소국 민족에게 퍼부었습니다. 그것은 구조적 악마의 주특기입니다. 지난 100여 년간의 우리 민족이 주변 강대국들에게 당한 부당한 고통을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악마는 이러한 권력 놀음을 하면서 예수에게 경배하기를 요구했습니다. 여기서의 경배는 단순한 강압적 위협과는 다릅니다. 약자들이 알아서 항복하고 즐겁게 강자들을 존중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조직폭력배가 약자들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협박하는 짓거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것이 바로 악마의 간교입니다. 오히려 강압적 무릎 꿇기를 강요하는 것이 정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뜻에서 역설적으로 볼턴이 북한 당국에 대해 보여 주는 강압적인 요구가 트럼프의 요구보다 더 정직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갈릴리 예수는 두 번째 유혹에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예수의 하나님은 세계 패권 권력을 옹호하거나 그것을 누리는 잔인한 강대국 황제 같은 존재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사랑의 아바(Abba)로 확신했습니다. 예수의 하나님은 절대 권력을 절대적으로 비워 내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비워 내시는 하나님은 스스로 무력한 하나님임을 당당히 드러냈습니다. 청년 예수는 바로 이 같은 무력한 하나님만 섬기라고 역설했습니다. 예수를 잔인하게 못 박는 패권적 신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악마적 패권 권력에 의해 못 박히시는 무력하게 보이는 그러한 하나님만 섬기라고 했습니다. 청년 예수가 그의 공생애를 통해 증언하고 보여 준 공공의 하나님은 비록 처형당하는 아픔을 겪더라도 지극히 작고 꼴찌 된 자들의 아픔을 치유하면서 그들을 보듬어 주시는 바보 하나님이었습니다. 바보는 약자의 아픔과 서러움을 로 고, 로 살피시는 엄마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만 높이 받들고 섬기라고 역설했던 것입니다. 이번에도 사탄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물러서기는 했으나, 마귀는 세 번째로 무지막지한 요구를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를 성전 꼭대기 높은 곳으로 데려가서 그곳에서 뛰어내리라고 호령했습니다. 두 번씩이나 예수를 유혹했으나 실패한 사탄은 세 번째는 매우 거칠게 청년 예수를 몰아세우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사탄다운 교활함도 드러내 보였습니다. 먼저 뛰어내리라는 사탄의 명령은 예수에게 자살을 유도한 것과 같습니다. 말로는 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사탄은 사탄 본성의 악마적 충동에 따라 투신자살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예수가 꿈쩍하지 않을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사탄스럽게, 가증스럽게 유혹합니다. 이번에는 성서 말씀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인용하고, 오용하고, 악용합니다. 바로 이 점이 사탄스러운 점입니다. 짐짓 거룩한 위력을 과시하려는 듯하지만, 거룩한 언어들을 멋대로 활용합니다. 우리의 지난 역사에서 악마적 군사 권력이 이러한 가증스러운 짓을 거침없이 해 왔음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합니다. 민주 질서를 근원적으로 무력화하려 했던 군사독재 세력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 가치를 기가 막히게 왜곡했습니다. 민족적 민주주의 이름으로, 행정적 민주주의 이름으로, 한국적 자유민주주의 이름으로 군부독재는 끈질기게 민주적 기본 질서와 민주적 기본권을 유린해 왔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거룩한 언어를 추악하게 도착·전도·변질한 것인데, 이러한 교활한 재능은 본래 전체주의 악마 권력의 장기이기도 합니다.

사탄은 세 번째 유혹에서 참으로 사탄스럽게 주술적 신통력을 동원합니다. 설령 청년 예수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린다 해도 사탄의 신통력은 주술적으로 예수를 안전하게 안착시킬 것이라고 유혹했습니다. 그것도 거룩한 성서의 말씀을 장황하게 이용하면서 말입니다. 주술적 신통력은 언제나 기복적 축복을 즐겨 사용하여 종교의 양적 팽창을 노리는 종교 지도자들이 갖기를 갈망하는 값싼 카리스마의 능력입니다. 종교 장사꾼들의 장기가 바로 주술적 거짓 카리스마를 과대 선전하는 일입니다. 만사형통의 복음을 값싸게 팔아 교회 왕국을 세우려 할 때 바로 이 주술적 종교 술책을 사용합니다. 저는 세 번째 사탄의 유혹에서 십자가에 달려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던 갈릴리 청년 예수를 주술적으로 힐난하고 조롱했던 당시 종교 지배자들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 신음하는 예수에게 진정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장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와 자기 자신을 구원하라"고 힐난했습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놀림이자, 견디기 어려운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는 카잔차키스가 지적한 최후 유혹에 시달렸습니다. 이러한 조롱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마침내 제 스스로 화가 치밀어 오기를 부리도록 유혹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새삼 기억해야 할 십자가 예수의 감동적인 모습은, 사탄의 최후적 유혹을 예수가 너무나 멋지게 물리친 모습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매우 감동적인 거룩한 하나님 아들의 진짜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무력하게 죽을 수 있는 힘을 보여 준 모습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참으로 허무하게 죽는 것으로 그 유혹을 물리치는 모습, 이것이야말로 정말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끝까지 주술적 힘을 거부하시면서 무력하게 죽을 수 있는 예수의 힘이 바로 예수 복음의 놀라운 공공적 힘, 감동적 힘, 변혁적 힘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허무하고 무력하게 처형당하신 예수는 부활 사건을 통해 생명의 숨결을 멘붕과 절망에 빠져 있던 제자들에게 직접 불어넣어 주시고, 용서의 힘과 평화 만들기에 힘껏 나서도록 격려하셨습니다. 약하디 약한 존재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청년 예수가 선제적 원수 사랑으로 원수의 증오와 그 악을 해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활의 힘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요한복음의 에필로그인 20장과 21장을 다시 깊이 읽어 보면, 사탄은 부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영원히 무력화할 것임을 우리는 예감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하나님 아들'로 호명을 받으셨는데, 광야의 시험 이후 하나님나라 운동을 펼치시면서 왜 자기 스스로를 '사람의 아들'로 호명했을까를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인권 주일'이기에 더욱 이 문제를 풀어내야 할 것입니다. 공생애를 걸쳐 예수님은 당시 유대 율법주의자들로부터 온갖 비난을 받았습니다. 특히, 가장 신성시했던 안식일 법을 예수와 제자들이 짐짓 어겼다고 하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때 예수는 당당하게 선언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장엄한 인권 장정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스스로를 사람의 아들이라고 했을까요?

이것은 이스라엘의 절박한 꿈이었던 예루살렘 귀환이 이루어진 이후 유대인들은 다니엘의 묵시 종말론적 희망을 가슴 깊이 품고 살아왔다는 사실과 연관됩니다. 다니엘은 장기간 지긋지긋한 패권 국가들로부터 유대인들이 끊임없이 시달려 왔기에, 언젠가 이 패권적 갑질에서 해방하는 그날을 꿈꾸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 다니엘은 유대인을 오랫동안 괴롭혔던 패권 국가들을 잔인한 괴수로 상징화했습니다. 이 짐승들의 강점과 강압적 지배가 끝나면, 잔인한 짐승이 아닌 새로운 권력의 출현을 바랐습니다. 짐승의 시대는 지나가고 마침내 사람다운 사람이 지배하는 새 시대가 온다고 믿고 바랐습니다. 이러한 종말론적 희망, 곧 인격적 인간이 사랑과 평화로 이끄는 새 질서에 대한 희망을 유대인이었던 청년 예수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의 지배 시대가 끝나길 바라며 하나님나라가 올 것을 바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손잡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일궈 낼 것이라 믿었습니다. 바로 이 일을 역사의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가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역사와 부활의 예수를 이렇게 표현한다면)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원수도 자매 형제가 되게 하고, 그 사랑 속에서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춤하는 새 질서를 세우며, 지금도 성령의 능력으로 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의 하나님께서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손을 잡고 짐승 왕국을 근원적으로 청산해 내고 하나님나라의 새 질서를 세우려 할 것입니다.

짐승의 시대는 가고, 사람의 아들이 평화와 공의의 왕으로 오시어 사랑 질서(Love-dom)를 세우시려는 그리스도 예수의 뜻을 충실하게 이해하고 이룩하려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한국교회를 이끌어 갈 때 바로 비로소 갈기갈기 찢어진 한국교회는 하나가 될 것이고, 나아가 이들이 평화 세우기에 앞장 설 때 부당하게 분단된 조국도 당당하게 평화의 같은 민족으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되어 악마와 괴수의 구조를 해체하게 될 때 마침내 인권은 뿌리 깊은 나무처럼 우람하게 버틸 것이고, 평화는 마른 땅에 단비처럼 내릴 것이며, 공의는 큰 강물처럼 흐르게 될 것입니다. 새 역사가 한반도에서 동터 올 것입니다.

이 글은 새길교회 한완상 신학위원의 2018년 12월 19일 '인권 주일 예배' 설교('광야 시험의 현대적 의미: 실종된 예수의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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