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정치를 다시 묻다 - 근대의 신학-정치적 상상과 성찬의 정치학> / 윌리엄 캐버너 지음 / 손민석 옮김 / 비아 펴냄 / 232쪽 / 1만 3000원

윌리엄 캐버너를 알게 된 건 박사 논문을 쓰면서이다. 급진정통주의(Radical Orthodoxy)를 연구하면서 그가 성찬에 유독 깊은 관심을 두고 있음을 보았다. 성찬을 하나의 종교적 의례로 국한하지 않고 성찬 공동체를 하나의 정치체로 이해했다. 그는 근대국가가 계약적 연대를 통해 구성된 상상의 공동체라는 신화를 폭로하면서, 진정한 보편성과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정치체로 성찬 공동체를 대안 정치체로 제안한다. 최근에 번역된 <신학, 정치를 다시 묻다>(비아)는 캐버너 저작 중 근대국가와 시민사회, 세계화의 신화를 폭로하고 신성한 참여(divine participation)를 통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확인한다.

'급진정통주의'란 무엇인가

급진정통주의는 존 밀뱅크(John Milbank), 그레이엄 워드(Graham Ward), 캐서린 픽스톡(Catherine Pickstock)에 의해 1990년대 케임브리지에서 출발한 신학 운동이다. 세속주의에 경종을 울리고 포스트모던 해체주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고전적 정통신학, 즉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를 거쳐 앙리 드 뤼박(Henri de Lubac),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와 같은 가톨릭 신신학(nouvelle théologie)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붙잡는다.1)

'Radical'은 근원적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조명을 통해서 해석될 수 있으며 근대의 자율적 이성을 통해서는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기에 신성적 참여로서의 존재적 변화를 강조한다. 김성원은 이들의 방법론을 크게 5가지로 구분했다. 신플라톤적 방법, 일원론적 방법, 절대적 메타내러티브 방법, 비변증학적 방법, 비상관관계적 방법이다. 초월과 내재, 믿음과 이성, 성과 속, 자연과 은총 등 이원론을 극복하고 신이 인간이 된 성육신적 존재론과 근대적 존재론을 넘어서는 성만찬의 참여적 존재론과 같은 일원론적인 통전적 해석을 시도한다.

급진정통주의는 근대성과 세속주의를 가장 크게 비판한다. 근대성은 신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을 배제하려는 이원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형이상학의 종말을 통해 보편적 이성에 근거한 단일한 진리 체계를 완성하려 했다.2) 밀뱅크는 현대신학이 신앙에서 동떨어져 자율성에 근거한 철학을 수용하면서 존재와 앎을 분리했고, 세속적 지식의 우위성을 주장하면서 지식의 폭거를 막지 못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한다.3)

그렇다고 중세 기독교의 과오를 잊은 채 근대 이전 과거의 것들을 복원하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기독교 의례와 전통을 복원하려는 복고풍 신학이 아닌 근대 정치와 세속 이성이 배제해 온 초월성과 신성적인 것을 복원해야 근대성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합리적 이성의 존재 이전에 송영적 자아(doxological self)로서 하나님 안에 참여할 때에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며 삶을 이어 가는 것이 가능하다. 제임스 스미스는 같은 의미에서 인간을 예전적 동물(liturgical animal)이라 부르며, 세속의 욕망에 이끌려 잘못된 것을 향하는 인간은 예배를 통해 거룩한 것을 욕망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캐버너의 관심은 무엇인가

캐버너는 듀크대를 다니며 스탠리 하우어워스 밑에서 박사 논문을 썼다. 2년 뒤 1998년에 그의 논문을 <고문과 성찬례 Torture and the Eucharist>를 냈는데, 이 책을 보고 세인트존스대학 니콜라스 힐리(Nicholas Healy) 교수는 캐버너가 밀뱅크, 하우어워스, 매킨타이어, 린드벡을 통과해 오늘날 교회가 현실에서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 주었다고 호평했다. 이 책에서 캐버너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이어진 칠레의 피노체트 군사정권하에 가톨릭교회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했지만, 일부 교회가 성찬을 통해 희생자들과 연대하고 그들의 고문당함과 죽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성찬의 피 흘림으로 재해석하면서 성례전 신학이 저항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4)

성찬이 사회 개혁과 변화를 이끄는 자원이 될 수 있을까. 조지 헌싱어는 <성찬과 교회 일치 The Eucharist and Ecumenism>에서 성찬의 문화 변혁적 기능을 언급한다. 성찬은 세속 문화와 대비되는 기독교의 독특성을 가장 잘 보여 주며 사회 분열을 극복해 진정한 연대와 화해, 평화의 공동체를 지향할 뿐 아니라 파편화한 사회에서 진실한 공동체를 형성하게 해 준다고 주장한다.5)

캐버너는 2002년 성만찬과 전례가 갖는 정치성을 발전시켜, <신학, 정치를 다시 묻다>(원제: Theopolitical Imagination, 신학-정치적 상상력)에서 근대국가와 시민사회의 대안으로 성찬 공동체와 정치체를 제안한다. 세속 국가 이면에 작동하는 거짓된 믿음과 허구적 신화를 폭로하면서 종교화해 가는 세속 정치의 한계와 종교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은 급진정통주의가 취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세속적 욕망이 모여 있는 현대 도시와 근대국가는 인간의 투쟁과 폭력의 연속이며, 정치인들과 도시계획가가 제사장과 예언자를 대치하는 기독교의 모조품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캐버너의 관심은 자본주의로 확장된다. 2008년 나온 <소비된 존재 Being Consumed>는 거짓된 욕망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이 자신의 욕망을 소비하며 영적인 갈급을 채우려 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참된 행복은 성만찬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진실한 연합에 있으며, 그 연합 안에서 충만함을 느끼고 자본주의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무엇을 소비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라면, 예수를 소비해서 아니, 하나님에 의해 우리가 소비당함(consumed)으로 자율성이라는 허망된 욕망에서 진정 해방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2011년 나온 <성스러움의 전이 Migrations of The Holy>와 2016년 나온 <야전병원 Field Hospital>을 보면, 그가 교회론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찬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의 정치성, 또는 정치적 교회는 종교가 현대 정치를 비판할 뿐 아니라 대안 공동체로 기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관심이 성찬을 중심으로, 인간 고난의 이해, 대안적 공동체, 욕망의 성화와 소비주의 극복, 현대 정치 비판으로 확장되어 감을 확인할 수 있다.

<신학, 정치를 다시 묻다>에서는

이 책에서 캐버너는 국가와 시민사회, 세계화를 통해 공공선(Common Good)이 보장되는 이상적인 사회를 구현할 수 없다고 고발한다. 종교의 옷을 입은 거짓된 신화이다. 그는 대항 정치로서 성찬의 참된 공동체를 제안한다. 시민들의 계약을 통해 형성된 국가는 참된 하나의 몸을 이룰 수 없다. 근대국가가 그리스도의 거짓된 몸의 사본에 불과하다면, 성찬을 통해 관계 맺는 교회는 진실된 관계성에 근거한 보편성(catholicity)의 몸, 그리스도의 몸에 주목한다.

국가는 개인들이 동의한 권위, 즉 폭력을 합법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할 권리를 갖지만, 그것은 신성한 것이 아니며 종교적 권위에 기댄 모조품에 불과하다. 정치적 연대는 상상된 국가라는 공동체로 구체화한 듯 보이지만 실상은 허상에 가까운 것이다.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정치를 통해 보편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는 성만찬이 갖는 보편적 특징들이 전체 교회와 지역 교회에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전체로서 교회가 지역 교회들의 연합이 아니며, 성찬이 행해지는 지역 교회가 곧 전체성을 발휘하는 보편적 교회이다.

교회는 그 자체로 독자적인 사회적 신체이며 계약과 조건으로 규정되지 않는 공적인 공동체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내적 동기를 유발하고 이웃과 연대하며 공공선과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을 제공하는 차원에서 다른 차원의 공공성을 유지한다. 앙리 드 뤼박 말처럼 교회를 구성하는 중심에 성찬이 있으며, 성찬이 행해지는 곳마다 에클레시아 같은 시민들의 자발적 정치체가 형성되어 하나의 도시와 국가를 구성한다. 종교는 개개인의 내면에 자리하는 사적인 영역이 아니며 참된 공적인 것을 추구하는 다른 공간을 만들어 낸다.

성찬은 개별 사건이 아니라 시공간을 뛰어넘는 그리스도 몸의 전체성을 경험하는 참된 보편성을 보여 준다. 성찬은 지역과 중앙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를 극복하고, 지역이 곧 중심이며 중심이 다원화한 이상적인 연대적 공동체를 탄생시킨다. 캐버너가 최근 작업들에서 성찬이 갖는 연대성을 교회를 넘어서는 보편적 연대로 확장하지만, 초기 저작들에는 그런 점이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단초를 제공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한국교회와 사회에서 본다면

캐버너 같은 급진정통주의자들을 만나는 독자는 신학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일이 가능할 뿐 아니라, 기독교 전통과 의례에 근거한 실천이 사회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개신교의 빈약한 예전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생각들이지만 잃어버린 교회 전통을 재해석하는 한편, 단조로운 예배를 반복하는 것만이 아닌 성만찬을 중심으로 신성한 참여와 존재적 연대를 통한 사회변혁을 출발할 수 있다면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으리라 평가한다. 하지만 한국교회 상황에는 무리하게 적용하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

어쩌다가 교회 절기에 행해지는 성찬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 고통받는 이와 연대하는 차원에서 시행되는 광화문광장의 성찬에서는 캐버너와 같은 신학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의례에 대한 우리의 배움이 미천할 뿐 아니라 참여하는 자와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서 그 어떤 것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적 엄숙함을 넘어 하나의 메시지로 체화되는 예전으로 확장하려면 교파적인 이해와 교리적인 이해를 뚫고 나가야 하지만, 우리 신학은 그러기에 너무 빈약하다. 여전히 성찬에 관한 종교개혁자들의 논쟁을 답습할 뿐이다.

우리는 군사독재 시절 고문당하는 이들의 고통과 예수의 십자가 고통을 일치시킬 수 있을까. 그분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심으로 개인주의를 넘어선 인류 보편적인 연대를 경험할 수 있을까. 새로운 사회의 비전과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를 성찬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 신학의 빈곤함이 신앙의 빈곤함으로, 더 나아가 사회적 변혁의 불가능으로 이어질 뿐이다. 부디 캐버너의 논의가 그런 변화의 단초를 제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승환 / 장신대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신학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새물결아카데미에서 공공신학을 강의해 왔으며 최근에는 인문학&신학 에라스무스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공공신학, 급진정통주의, 도시신학, 공동체주의 등에 관심을 갖고 연구 중이다.

1) 김성원, 「급진적 정통주의 신학 방법론」 (한들출판사, 2008), 18.
2) James K.A Smith, 「급진정통주의 신학」 (CLC, 2011), 95-96.
3) John Milbank. Catherine Pickstock, Graham Ward eds, Radical Orthodoxy, (Routledge, 1999), 21.
4) William T. Cavanaugh, Torture and Eucharist, (Blackwell Pub, 1998), 2.
5) George Hunsinger, The Eucharist and Ecumenism, (Cambridge Uni Press, 2008), 245-261.

외부 기고는 <뉴스앤조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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