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가 '사건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시대적 요청에 대한 신앙고백과 응답을 신학적 접근과 표현으로 정리합니다. 매달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칼럼을 게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신학위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제는 '코로나19와 한국교회'입니다.
1. 재난 가운데서 서로를 지키는 길은?

코로나19 대유행이 일상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있는 상황이 두 달 넘게 계속되고 있다. 대구 경북 지역의 대유행이 한풀 꺾이면서 우리나라는 그런대로 통제가 되는 듯하지만,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듯 불안은 계속되고 있다.

매일매일 업데이트되는 전 세계의 확진자와 사망자 통계를 보면 정말 당황스럽다. 변화의 폭이 몇 천 혹은 몇 만 정도가 아니다. 이틀에 10만 명 이상 확진자가 불어나고 있고, 사망자도 매일 수천씩 더해 가고 있다. 우리나라만큼 진단 검사를 많이 하고 있는 나라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통계표가 거의 수직으로 상승하고 있다면, 실제 상황은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전염병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는 예측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상황을 성공적으로 통제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우리나라 과학자들이나 정치가들은 사태를 다소 낙관적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세계적 상황은 훨씬 더 불안하고 불확실해 보인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정치가들의 정책 판단도 국민들에게 확신을 주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고 있는 모습이고, 분명한 해결책이나 전망도 없는 상황에서 과학자들 의견 역시 매우 다양하게 갈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수많은 사람이 병으로 쓰러져 가는 가운데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이 갑자기 살길을 잃어버린 경제적 사회적 약자들에게 이 상황은 더욱 견디기 힘든 시련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실직으로 내몰리게 될지 전망이 참으로 암울하다. 그리고 임대료를 비롯한 제 비용을 조달하기에도 부족한 수입 때문에 생업이 생존을 지켜 주기보다는 오히려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을 하루하루 견뎌야 하는 수많은 경제적 약자와 소상공인들은 정말로 힘들게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을 것이다. 통계 숫자상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불법체류자들과 노숙인들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은 더욱 시선 밖으로 멀어져 가고 있을지 모른다. 장애인들과 노인들을 포함해서 스스로를 보호할 힘을 충분히 갖지 못한 신체적 약자들에게는 이 상황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일지 짐작하기 쉽지 않다.

그뿐이 아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재난을 맨몸으로 견뎌 내고 있을 것이다. 대형 교회들의 그늘에 가려진 채, 힘들다는 소리도 제대로 못 하고 시간을 버텨 내고 있을 작은 교회 공동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복음의 힘은 권력이나 힘에 있지 않고, 가난에 있다는 신념으로 교회를 위해 헌신해 왔을 작은 교회 신자들과 목회자들에게 지금의 시련은 정말로 가혹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정말로 힘겹게 이 재난의 상황을 견뎌 내고 있을 모든 분에게 온 마음을 다해 위로와 격려를 보내고 싶다. 특별히 이 상황을 누구보다 어렵게 견뎌 가고 있을 교회와 신자들이 이 위기와 재난의 상황 속에서도 복음의 놀라운 힘을 더욱 깊이 발견하고 체험하는 귀한 기회를 얻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이 위기와 재난 속에서도 우리를 공포와 절망의 포로가 되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 낼 수 있게 하는 힘이 된다고 믿는다. 우리는, 재난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과 하나 되어 오시는 화육의 예수님, 그들을 위해서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 주셨던 십자가 수난의 예수님, 그리고 끝내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 주신 부활의 예수님에게 희망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다. 신자와 교회는 소외된 약자의 처지에 있으면서도 누가 내 편인지 그리고 누가 내 이웃이고 나를 도와줄 사람인지 묻기보다는, 오히려 위기에 처한 다른 사람의 친구와 이웃이 되어 주었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과 실천 속에서 희망의 길을 찾아왔던 사람들이다.

이 재난과 위기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내어 주는 의료봉사자들과 수많은 자원봉사자의 모습을 생각하자. 우리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으로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는 길을 찾아보자. 우리가 이 위기를 넘어서 새롭게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는 힘도, 이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한층 성숙한 교회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길도, 그와 같이 예수님을 따라서 십자가의 삶을 배우고 실천할 때 비로소 열릴 것이라고 믿는다.

2. 우리는 전혀 새로운 도전과 질문들 앞에 서 있다

급변하는 상황과 다급한 대책의 요구들을 생각하면, 아직은 깊은 반성이나 성찰을 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 재난의 실체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이 재난이 장차 가져오게 될 고통이 얼마나 클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다.

상황이 이처럼 불확실하고 유동적인데도,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은 이미 우리 삶에 대해서 수많은 질문과 도전을 제기하고 있다. 전례 없는 상황이기에, 전례 없는 충격과 무게감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사고방식이나 삶의 방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교회와 신자들에게도 그 도전의 크기는 결코 적지 않다. 주일날 모든 신자가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멈출 수 없는 것이라고 배워 왔고 믿어 왔는데, 갑작스럽게 주일 정기 예배를 멈추어야 한다는 일이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이었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이처럼 우리의 오랜 관습과 전통이 문제가 되는 상황에 직면하여, 우리는 다시 한번 멈추어 서서 예배와 교회에 관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묻고 다시 길을 찾아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그냥 예외적인 상황이니까 모든 것을 예외로 하자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쩌면 예배를 둘러싼 예측하지 못했던 특별한 갈등 상황은 우리가 별다른 질문이나 반성 없이 관성적으로 받아들여 왔던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야기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모든 교회와 신자들은 위기 상황을 오히려 기회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라도 이 위기가 갖는 신앙적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하고, 나아가 지금까지 살아온 개인과 교회 공동체로서의 우리들 삶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3. 바이러스는 모든 경계선을 넘을 수 있다

지금이 전쟁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봉쇄'나 '격리'와 같은 전시에나 사용했을 법한 말들을 우리는 매일 접하고 있다. 묘한 것은 이런 말들이 과도하게 넘쳐나는 것과는 정반대로 지금까지 그런대로 잘 작동해 왔다고 여겨왔던 모든 종류의 경계선, 울타리, 장벽 등이 거의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구화한 시대에 창궐하는 바이러스는 그 철통 같은 국경선을 거의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모습이다. 국경의 강제적 봉쇄로 확산 속도를 다소 늦출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이상은 결코 아니다. 주로 비말을 통해서 전파되는 바이러스이기에 그나마 봉쇄나 격리가 일정한 속도 제어의 효력을 발휘하지만, 공기전염이 가능한 다른 종류의 바이러스나 병균이 출현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런 경우라면 인간 집단들이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만들어 놓은 국경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리적 장벽만이 아니다. 인종적·문화적 장벽이나 울타리도 거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코로나19 발생 초기, 미국이나 유럽에서 혹은 아프리카에서도 황인종을 향한 인종차별적 태도가 강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중국 혐오, 황인종 혐오 그리고 서구적 우월주의와 패권주의가 묘하게 결합하여, 코로나19는 자신들과는 관계 없는 아시아인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인 것처럼 만들어 내는 분위기가 어리석은 몇몇 사람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백악관 비서들 인터뷰나 글에서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더니 바이러스가 미국이나 유럽으로도 확산되기 시작하니까, 초강대국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코로나19는 감기 비슷한 거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허풍을 떨었다. 마침내 상황이 나빠지고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오기 시작하니까, 이제는 중국을 비난하다 못해 중국에 배상을 요구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최소한의 과학적 상식에라도 맞는 이야기라면 일부라도 인정할 수 있을 테지만, 오히려 그들에게서 보는 것은 시대착오적 인종주의 장벽 혹은 문명 장벽 같은 것을 만들어서 자신들을 방어해 보려다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는 몰골이다.

차라리 의학자들은 솔직하기라도 하다. 그들은 정확히 말하고 있다. 기적의 약 같은 것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범위와 모르는 것을 구별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알고 있는 과학적 지식의 한계에 기초해서, 희생을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전례 없는 바이러스의 확산 앞에서 과학과 의학도 결코 완벽한 울타리가 될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지금 우리는 뼈아프게 깨닫고 있다.

지금까지는 경제적 수준의 차이 혹은 계급의 차이는 웬만한 병원균들도 뛰어넘을 수 없는 엄청난 장벽처럼 보였다. 물론 코로나19의 대유행이 가져올 결과를 따져 보면, 아마도 또다시 경제적·사회적 약자들에게 더 많은 희생과 고통이 전가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 코로나19의 확산은 경제적 수준의 장벽, 계급의 장벽도 일정하게 무력화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제1세계라고 칭하기도 했던 미국과 유럽 상황이 그 어느 곳보다 더욱 심각하다는 점이 그것을 증명한다. 기후변화와 전염병의 대유행에 대한 과학자들의 경고는 인간이 가진 경제적·정치적·과학적 방어기제를 훨씬 능가하는 재앙은 얼마든지 올 수 있다는 것이고, 이제는 그것이 더욱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만약 코로나19보다 더한 것이 온다면, 그때 인간이 만든 모든 울타리나 경계선은 보호막이 아니라 감옥이 되고 말지도 모르겠다.

생태학자들은 이미 전조와 계속되는 경고가 있었는데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결과가 바로 코로나19로 터져 나왔다고 본다. 사스·에볼라·메르스 등 예상치 못한 전염병의 공습이 계속되어 왔고, 전염병의 대유행이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경고도 많이 있었다는 지적이다. 생태학자들이 보기에 이런 사전 경고들은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파괴적인 전염병의 지구적 확산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었다고 말한다. 인간의 탐욕이 자연 생태계를 착취하고 바이러스의 숙주로서 역할을 해 온 야생동물들 삶을 파괴해 온 결과, 바이러스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인간을 숙주로 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실은 바이러스가 우리를 향해 선을 넘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지켜야할 선을 넘어가 바이러스를 불러왔다는 것이 진실이다.

그렇게 보면 결국 남의 불행을 기초로 해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해 온 인간의 삶의 방식이 불러온 결과가 바로 바이러스의 대유행이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제 살을 파먹고 살아온 삶의 결과가 바이러스의 대유행인 것이다. 지금 벌어지는 재난은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높은 울타리와 장벽을 쌓아 자연의 일부임을 스스로 부인하려 할 때부터 예견된 결과다. 두려움과 공포는 사람들을 자기중심적으로 만들 수 있고, 더 튼튼한 장벽을 설치하여 자기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장벽은 코로나 19 앞에서도 무기력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닥쳐올 기후 재앙이나 또 다른 신종 전염병들 앞에서는 더욱 철저하게 자신의 무의미와 무가치함을 드러내고 말 것이다.

4. 모두가 잠재적 희생자요 잠재적 해결사다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새로운 용어에 우리 모두 익숙해지고 있다. 그리고 한동안 수급 문제로 논란이 일어날 정도로 마스크가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 두 가지는 다 바이러스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들 간 거리와 간격을 유지하는 것이니까, 외적으로 보면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의 사이나 관계를 벌려 놓으려고 하는 시도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실천해 보면 더욱 뚜렷이 느끼게 되는 일이지만, 사회적 거리 두기는 자신을 위한 일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을 위한 깊은 배려의 마음이다. 마스크도 마찬가지다. 외적으로만 보면 소통의 가장 중요한 도구인 입과 코를 가리는 일은 소통을 차단하려는 행위처럼 보인다. 그래서 시위 현장에서 무리가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것은 소통 불능 상황을 표현하는 것으로 읽히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장에서 마스크는 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다.

거리 두기와 가리기가 울타리나 장벽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와 너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 사이의 관계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상징이 되고 있다. 거리 두기와 마스크는, 소극적으로 보면 우리들 각자가 모두 잠재적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도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내가 상대방을 다치게 할 수도 있고, 상대방이 나를 다치게 할 수도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그런데 더욱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들 각자가 문제를 일으키고 확산시키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문제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보호해 줄 수도 있고 지금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장본인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조금 더 강하게 말하면, 우리들 각자가 서로를 살게 할 수도 죽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지금은 바이러스 확산을 막을 수 있는 백신도 없고, 정확한 치료제도 없다. 현재로서는 이 재난을 막아 내고 또 재난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소위 말하는 사회적 거리 두기와 마스크 착용하기를 포함하는 우리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예방 수칙 혹은 행동 수칙을 지키는 것이다. 의학자들도 그것이 가장 강력한 감염과 확산 방지 수단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 각자는 재난의 잠재적 희생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재난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잠재적 해결사다.

최악의 상황이 역설적으로 최고의 시간이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장 불안한 이 상황에서 비로소 우리는 이웃들과 다른 사람들의 소중함을 배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힘과 도움에 의존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우리 삶이 수많은 다른 이의 삶과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 깊이 깨닫게 된다. 중국 후베이성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의 건강 상태가 지금 나의 삶과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 비로소 알게 되는 시간이다. 물리적 거리를 두고 살면서도, 마스크를 쓰고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으면서도, 또 때로는 격리와 고립의 상태에 처하면서 오히려 어느 때보다 깊이 우리가 공동체임을 느끼게 된다.

이 재난 상황에서 잠재적 희생자나 잠재적 해결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어쩌면 교회도 예배도 마찬가지다. 결코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예배 그 자체가 가해행위가 될 수도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진정한 예배는 사람들의 고통과 고난에 동참하여 문제의 해결을 돕는 가장 적극적인 행위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 도움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없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의 삶에 많이 기대어 살고 있다는 의식이 없다면, 사회적 거리 두기와 마스크는 그야말로 불통과 고립의 표현이요 심하면 적대의 표현이 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소중함을 깊이 인식하면서 실천하는 사회적 거리 두기와 마스크 착용은 재난을 극복하고 생명을 살리고 공동체를 회복하는 소중한 도구가 된다. 교회와 예배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교회의 존재와 예배의 실천이 교회 밖 수많은 사람의 삶에 얼마나 깊이 의존하고 있는 것인지 인식하지 못한다면, 교회 밖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의 삶을 진정으로 존중하지 못한다면, 교회의 예배는 자화자찬이 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향한 가해행위가 될 수 있다. 이 재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웃들과 친교와 연대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참된 예배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양권석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 사건과신학팀 위원장, 성공회대학교

*이 글은 '사건과 신학' 3월 전체 취지문입니다. 더 많은 원고를 홈페이지(바로 가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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