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 독립 시위운동 주도하다 체포당한 교인들, 1925년 대홍수로 마을과 함께 수몰, 6·25 전쟁 때 미군기 폭격으로 예배당 파괴, 군부 독재 권력에 의한 교회당 강제 철거, 이명박 정부의 4대강 개발로 유기농업 교인들 피해….

북한 강변의 용진교회는 상처가 깊은 만큼 마을과 시대의 아픔을 치열하게 끌어안고 110년간 탄탄히 서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가 언급한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용진교회는 자신이 입은 상처를 통하여 생명과 평화를 심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처를 먼저 돌보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는 상처 입은 사역자이자 치유하는 사역자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 110~111쪽)

"사회적 약자와 고난받는 분들을 위해"라는 용진교회 주보의 중보 기도 제목에서 치유하는 교회의 정체성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요 10:10-11)는 예수님 말씀과 맞닿아 있습니다. 용진교회는 상선약수上善若水(지극한 선은 물과 같다)라는 노자의 말처럼, 교회 앞에 흐르는 북한강처럼 낮은 자세로 사람들을 섬기며 아름다운 역사를 만든 것입니다.

용진교회 예배당. 이근복 그림

1902년 이웃 분원교회 교인들이 용진에 와서 기도하였을 때 조현병을 앓던 김씨 부인이 치유되자, 교인이 된 주민들이 김원명 씨 사랑방에서 예배하기 시작하였고 1907년 정식으로 교회가 창립됩니다.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예수 공동체는 교육 선교에 눈을 떠 1914년 경진학교를 설립하였고(현 송촌초등학교), 교회 개척에도 열심이어서 1914년 봉안교회를 비롯하여 양수교회 등 6개 교회를 세웠습니다. 1908년 곽안련(Charles Allen Clark) 선교사에게 세례받은 이강원 집사가 1914년에 장로가 되면서 용진교회는 조직 교회가 되었고, 이듬해 교회를 건축할 때 가까운 수종사 주지였던 이강원 장로의 동생이 교회당 대들보로 쓰라고 느티나무 네 그루를 헌납하였다고 합니다.

1919년 3월 15일, 용진교회 신도들과 주민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팔당을 지나 면 소재지 덕소에 이르렀을 때는 5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튿날 주일, 일제 헌병들과 보조원들은 예배하던 용진교회를 포위하여 신도 10명을 체포하고, 마을사람 7명을 연행하였습니다. 이들은 8개월에서 1년 6개월간 옥살이를 하였는데 한 분이 옥사하였습니다. 1925년에는 서울과 경기 일원의 대홍수로 예배당이 훼손되었고, 1950년 6·25 한국전쟁 때도 미군 폭격기 때문에 예배당과 대부분의 가옥이 파괴되었습니다.

1957년 부임한 박창균 목사는 사회주의적 신념을 갖고 박정희 군부독재, 그리고 자본가와 싸우는 것이 예수 부활 신앙이라는 신학으로 목회하였습니다. 통일 운동을 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하였지만, 용진교회 교인들은 적극적인 3·1 운동 참여 전통에서 비롯한 민족적 저항 의식이 있어서 교회의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 참여를 잘 수용하였습니다.

1972년 10월 경찰서장이 파출소장과 예비군 중대장을 대동하고 류창렬 목사를 찾아와 유신헌법을 적극 지지하고 홍보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를 단호히 거절한 것이 발단이 되어, 1973년 개축 허가를 발부받아 온 교인들이 정성을 다해 건축한 새 예배당이 개발제한구역에 있는 불법 건축물이라는 이유로 강제 철거를 당합니다. 권력의 힘으로 보복한 것입니다. 박준순 목사도 류창렬 목사를 이어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며 교회를 새로 건축하여 1988년 4월 헌당 예배를 드렸습니다. 1989년에 취임한 박승희 목사는 성경 공부에 열심이었고, 1994년 8월 15일 교회 앞뜰에 '용진 3·1 의거 기념비'를 건립하였습니다. 2003년 김선구 목사가 부임하였고 그해 기장 총회는 용진교회의 역사 참여를 높이 평가하여 '총회 역사유적지'로 지정하였습니다.

2006년 제87주년이 되는 3·1절, 용진교회의 3·1 애국선열 추념탑을 송촌독립공원으로 이전하여 기념식과 완공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강제 철거된 예배당 터를 남양주시 지원으로 확장하여 송촌독립공원을 세웠는데, 지역사회가 용진교회의 역사성을 인정한 뜻깊은 사건이었습니다.

다시 용진교회와 마을은 격랑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됩니다. 이명박 정부는 2009년 2월 대운하를 염두에 두고 4대강 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는데, 팔당 지역이 대표적인 개발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용진교회는 1994년부터 창조질서 보전의 신앙고백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유기농 운동을 이끌어, 팔당댐 건설 이후 서울의 수돗물 공급을 위한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생존권이 철저히 박탈당한 지역 농민들에게 대안 농업의 길을 연 상황에서, 된서리를 맞게 된 것입니다. 이에 2009년부터 용진교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생태공동체운동본부'가 중심이 되어 금식 기도회 등으로 '생명의 강 살리기'를 위한 저항운동을 펼쳤습니다.

용진교회에 가던 날은 바람이 선선했고 햇살이 따사로웠습니다. 하늘은 남북 정상이 올랐던 백두산의 하늘처럼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습니다. 경의중앙선의 운길산역에서 저를 맞이해 준 김요섭 목사님과 최남식 장로님에게서 상처를 보듬기 위해 환대하는 용진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교회 박물관에서 차와 과일을 나눌 때 군사정권의 폭력으로 철거된 옛 교회당 벽돌과 기왓등을 넣은 보관함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벽에 걸린 역대 장로들 사진이 많지 않아 물어보니, 적은 분들이 끝까지 헌신하여 공동체를 지켰는데 최 장로님은 3대째 장로이고, 그날 만나지 못한 주재동 장로님도 2대째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림이 될 사진은 망설임 끝에 두 팔을 벌려 마을을 품고 있는 동산 앞 교회 장면이 찍힌 것을 택하였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용진교회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될 것입니다.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는 매월 2차례 업데이트됩니다.

이근복 / 목사,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거쳐 현재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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